159. 멸문지화(滅門之禍)?
사예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왔네?”
“이렇게 시끄럽게 난리를 쳤는데 안 올 수가 있나?”
“말은. 시끄럽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순순히 따라간다고 했을 텐데. 왜 이런 짓까지 벌인 거지? 게다가 혈조야귀에 이 공녀라니. 처음부터 속였군.”
“순순히 따라간다는 사람이…….”
말을 뱉던 사예린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됐어. 어차피 말싸움으로는 정파 놈들을 이기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지. 어차피 이렇게 된 것 화끈하게 붙어나 볼까?”
“원한다면.”
파앗!
말을 마친 적비연이 섬검보를 펼치면서 단숨에 사예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사예린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 차며 물러났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흑월아 한 자루가 떠나갔다.
휘리리리링!
적비연이 능숙하게 허리를 젖히고는 날아드는 흑월아를 검 끝으로 낚아챘다.
흑월아가 초승달 모양처럼 휘어져 있는 걸 이용한 것이다.
끼이이이잉!
검신에 걸린 흑월아가 비명을 지르듯 마찰음을 터뜨리더니 한 바퀴 회전한 후 사예린의 목숨을 노리듯 되돌아갔다.
쒸에에엑!
하지만 흑월아는 사예린의 애병.
그녀가 자신의 병기에 당할 리가 없었다.
휘리릭, 탁!
몸을 팽이처럼 회전한 사예린이 날아드는 흑월아를 어렵지 않게 낚아챘다.
물론 적비연도 여기까지는 예측한 바였다.
진짜 공격은 지금 이어지는 검초다.
파바밧!
빠르게 쇄도한 적비연이 그대로 가문의 절기를 펼쳤다.
쒸에에엑!
검봉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산산조각 내버린다는 섬전파검!
따다다앙!
연거푸 충격음이 들리면서 검기가 불같이 일어나던 검기가 연기처럼 흩어져간다.
‘섬전파검으로는 무리인가?’
파스스스……!
부채꼴처럼 펼쳐 든 흑월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찰나,
쉬리리링!
사예린이 춤을 추듯 몸을 회전했다.
휙! 휙! 휙! 휙!
네 자루의 흑월아가 나비처럼 너풀너풀 날아든다.
지금까지는 벌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면, 이제는 나비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예측 불가능하게 날아든다.
땅! 깡!
두 자루의 흑월아를 쳐낸 적비연이 훌쩍 몸을 날리고는 또 다른 흑월아 한 자루를 밟고 튕기듯 솟구쳤다.
팟!
“제법?”
사예린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그녀가 허공으로 도약하면서 곧장 흑월아를 다시 날렸다.
휘리리릭!
까앙!
적비연의 정면에서 불꽃이 터졌다.
그런데 튕겨 나갈 줄 알았던 흑월아가 그대로 검신을 축으로 한 바퀴 빙글 회전하더니 다시 적비연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게 아닌가?
조금 전 적비연이 흑월아를 되돌릴 때와 비슷한 상황.
“헛!”
헛바람을 삼킨 적비연이 얼른 고개를 젖혔다.
퀴리리리링!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흑월아가 멀찍이 날아갔다.
이 모든 상황이 두 사람이 허공으로 도약한 찰나의 순간에 이뤄지고 있었다.
이제 사예린의 손에 남아 있는 흑월아는 없다.
그녀가 골치 아픈 이유는 다루기 까다로운 흑월아를 워낙 자연스럽게 부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흑월아가 없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금이면!’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한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사예린의 허리춤을 베어가려고 할 때였다.
퀴리리리리링!
허공을 베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흑월아 한 자루가 뒤를 노리며 날아드는 게 아닌가?
“칫!”
회전하던 적비연이 사예린 대신 뒤에서 날아든 흑월아를 쳐냈다.
투까앙!
간신히 흑월아를 튕겨냈으나 바로 다음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경황이 없어도 적에게 등을 보이면 안 되잖아?”
달콤한 목소리에 이은 묵직한 충격!
퍼억!
“컥!”
등에 일장을 얻어맞은 적비연이 그대로 장원 바닥으로 추락했다.
쿠당탕탕!
처참하게 쓰러진 적비연이 한참이나 미끄러져 가면서 전각 벽에 쿵 부딪쳤다.
쿠르르르……!
그렇잖아도 불에 타고 있던 전각은 묵직한 충격이 전해지자 불씨를 흩날리면서 잔해를 떨어뜨렸다.
“젠장!”
적비연이 혀를 차고는 일어났다.
방심했다.
흑월아가 손에 없는 상태에서 공격이 들어올 줄이야.
그나저나 방금 그 흑월아는 뭐지?
단순히 비도술을 이용해서 궤적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손을 떠난 흑월아가 제 의지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게 아니면 사예린의 힘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되돌아온 것이다.
혹시 은잠사 같은 실로 흑월아가 연결된 건가?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눈치챘을 거다.
착!
바닥에 착지한 사예린이 생글 웃는다.
정말이지 뭇 남성들의 마음을 녹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
하나 그 미소 속에 살심이 가득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놀란 것 같네?”
“조금.”
“너 재미있어.”
“…….”
“무공 수위는 나보다 조금 아래인 것 같은데…… 임기응변이 뛰어나달까? 마치 수많은 전투를 몸으로 겪은 사람 같아.”
“내가 좀 노련하지.”
적비연이 히죽 웃자, 사예린이 깔깔거렸다.
“재미있네, 재미있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묘하게 닮았어.”
“그럼 그자도 굉장히 매력적이겠군.”
“글쎄, 어떨까?”
아마도 반철룡을 두고 말하는 거겠지.
닮을 수밖에.
‘내가 반철룡이니까.’
적비연은 얼른 곁눈질로 예홍 쪽을 보았다.
단휘도 도착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이제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괴독자를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장원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전각을 집어삼킨 화마는 걷잡을 수 없이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젠장! 손해가 막심하네.’
확실히 사예린은 자신보다 무공 수위가 높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면 어떨까?
모르긴 해도 밀리진 않을 것 같다.
사예린 말대로 무수한 경험이 무공 수위 격차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벽력적가주의 신분으로 마공이나 사공을 사용할 수는 없는 일.
본 가의 절기로만 싸우려니 무공 격차를 극복하기가 버겁다.
사라라랑.
사예린이 흑월아를 부채처럼 펼치더니 가볍게 휙 던져 올렸다.
쉬쉬쉬쉬쉭.
놀랍게도 허공에 뜬 흑월아가 제자리에서 부유하듯 회전했다.
-호오, 대단한 기술이군.
옆에 선 극마도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기로 조종하는 건가?’
-글쎄. 조종까지는 아니지만 기로 조절하는 건 맞다.
‘방금 내 뒤를 공격한 건 능공섭물(凌空攝物)의 수법이었나?’
-아니, 그보다 아래 수준. 능공섭물은 기를 이용해서 물체를 강한 힘으로 끌어당겨야 하지만, 저 흑월아는 아주 약간의 기운만으로도 움직이게 할 수 있지.
‘무슨 소리야? 지금 봐서는 이기어검(以氣馭劍)이라도 부리는 것 같은데.’
-클클. 애송이 주인아, 곧 알게 될 거다.
‘너 계속…….’
하지만 적비연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극마가 소리쳤다.
-지금이다!
찰나,
따다다당!
허공에 떠서 회전하던 흑월아가 서로 부딪치더니 휙휙 튕겨나가는 것이 아닌가?
쒸익! 쒸이익! 쒸에에엑!
‘이거였나!’
적비연이 미간을 팍 구겼다.
이제야 극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튕겨 나간 흑월아가 사방에서 적비연을 향해 쇄도했다.
-이제 알겠냐? 저 여자는 아주 약간의 기운만 조절해도 흑월아가 알아서 움직이는 거다.
‘그런 거군!’
적비연이 내심 놀라면서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쉬까앙! 투까앙! 깡!
튕겨나간 흑월아가 다시 다른 흑월아와 부딪치면서 쇄도해 온다.
그야말로 난장이 된 것 같은데, 이 속에서도 규칙이 있다.
흑월아가 서로 부딪친 후에는 어김없이 적비연을 향해 날아든다는 것이다.
극마의 말대로 사예린은 아주 약간의 기운으로 흑월아를 툭툭 건드리기만 할 뿐이다.
그러면 흑월아는 서로 부딪치면서 그 관성과 반동을 이용해 적에게 쇄도한다.
신병이기에 속하는 흑월아와 사예린이 흑천련주에게 배운 창세비월도(創世飛月刀)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비도술의 일종인 지금 공격은 창세비월도에서도 육초식인 대폭작(大爆炸)!
그렇게 어지럽게 날아드는 흑월아는 서로 부딪치고 튕기며 피로 얼룩진 세상을 만들어낸다.
적비연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지만 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베이는 걸 완전히 막진 못했다.
마치 새떼가 마구잡이로 날아들며 부리로 쪼는 것만 같다.
하지만 버텨야 한다.
-버티면 끝은 온다!
극마가 소리쳤다.
적비연도 알고 있었다.
이기어검 수준은 아니라지만, 이 정도로 기를 조절하려면 사예린은 공력 소모가 상당할 것이다.
그런 만큼 이처럼 고난도의 비도술은 오래 유지하기 힘들 터.
마침내 사납게 달려들던 흑월아가 거짓말처럼 흩어져 날아가더니 사예린의 손으로 돌아가 잡혔다.
차차차착!
“후우!”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사예린을 노려보았다.
찰나,
콰과앙!
갑자기 옆의 벽이 부서지더니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나타나는 게 아닌가?
“흐아아압!”
이어서 들려오는 기합성!
‘투혈권왕?’
적비연이 두 눈을 부릅뜨는 사이 코앞까지 다다른 투혈권왕이 쌍권을 내질렀다.
꽈앙!
“커억!”
피를 토한 적비연이 그대로 포탄처럼 날아가더니 전각을 부수며 안까지 날아 들어갔다.
콰과광!
쿠르르르르…… 쿠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에 타던 전각이 무너져 내렸다.
“가주님!”
마침 가주전 지붕에서 혈조야귀와 일전을 벌이던 묵검이 벼락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단숨에 날아왔다.
“노오오옴!”
하지만 그 뒤를 혈조야귀가 바짝 쫓았다.
“등을 보이다니. 어리석은!”
쉬쉬쉬쉬야악!
열 개의 칼날로 변한 손톱이 묵검의 등을 할퀴었다.
“어딜!”
찰나지간 하천웅이 일갈을 터뜨리며 회오리치듯 솟구쳐 올라왔다.
까가가가강!
묵검과 혈조야귀 사이를 가르며 나타난 그는 만검세가의 절초인 선풍만엽 초식을 펼치고 있었다.
“치잇! 이 귀찮은……!”
혈조야귀가 혀를 차고는 하천웅에게 마구 조공을 펼쳤다.
투까가가가강!
두 사람이 연신 불꽃을 터뜨리며 격전을 벌이는 사이, 혜성처럼 떨어져 내린 묵검이 낙뢰휘검 초식을 펼쳤다.
번쩍!
어둠을 찢는 빛이 터지고,
짜르르르르릉!
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떨어지는 일검!
쩌어엉!
검으로 주먹을 때렸는데,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이 울린다.
“크흡!”
묵검이 신음을 삼켰다.
두 주먹을 내민 투혈권왕이 피식 웃었다.
“제법이지만…… 본좌에게는 어림없다.”
말을 마친 투혈권왕이 오른 주먹을 뒤로 뺐다.
묵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권격을 맞으면 즉사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내공 겨루기를 하는 중이라 여유가 없다.
마침내 투혈권왕의 주먹이 날아드는 순간,
투콰아앙!
무너진 잔해더미에서 느닷없이 적비연이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엇!”
깜짝 놀란 투혈권왕이 반사적으로 주먹의 방향을 틀었다.
쒸에에에에엑!
섬뜩한 파공성을 이끌며 날아드는 한 줄기 빛이 그대로 투혈권왕의 일권과 부딪쳤다.
꽈자자자자자앙!
이번에는 금속성이 아니라 천지가 뒤흔들리는 뇌성벽력이 울렸다.
그 소음만으로 주변의 기왓장이 다르르 떠는 소리를 내지른다.
구천혈마검의 제일초식 구천일관시!
“끄읍!”
두 눈을 부릅뜬 투혈권왕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어지는 순간,
슈우우욱, 쿠당탕탕!
포탄처럼 튕겨 나가면서 전각을 부수며 나뒹굴었다.
쿠구구구궁!
마침 불에 타던 전각의 잔해가 투혈권왕을 덮쳤다.
콰르르르르……!
“사제!”
사예린이 소리치고는 달려가려고 했지만, 적비연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들었다.
“남의 집에서 난리를 쳤으면 계산은 끝내야지.”
* * *
벽력적가장이 내려다보이는 인근의 전각 지붕 위.
그곳에 꼿꼿하게 서서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무림맹 총군사 가후였다.
그의 곁으로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스윽 나타났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가후가 불에 타는 장원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직일세. 조금만 더 기다리세. 저들의 욕망과 살심이 더 타오를 때까지. 조금만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