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1화 (162/301)

161. 탈출

쉬잇, 쉬이잇!

불타는 전각 사이를 바람처럼 달린다.

흑의 무복을 입은 흑천련 무인들은 마치 전각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검은 물결 같다.

“이쪽이다! 여기에 놈들……!”

쉬이익, 푹!

“커억!”

다른 쪽을 향해 소리치던 무인은 흑월아에 목이 꿰뚫린 채 그대로 절명했다.

하지만 전각 뒤편에서 무인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냐!”

“저쪽이다! 가자!”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

“칫!”

혀를 찬 사예린이 앞장섰다.

현청과 임송화는 투혈권왕을 부축한 채 그 뒤를 따랐다.

임송화가 현청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우리는 다시 흑천련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소. 총군사가 우리 얼굴을 보고도 별다른 기별을 주지 않았으니.]

현청의 말에 임송화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의 말대로 총군사는 자신들을 알아봤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새로운 신분을 준 사람이 바로 총군사 가후니까.

하지만 가후는 두 사람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은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는 뜻이 아니겠나?

[그래도 모처럼 고향 온 기분이었는데.]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정말 놀랐어요. 전 벽력적가주가 꼼짝없이 죽은 줄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반 호법장일 줄이야.]

[나도 놀랐소. 반 호법장과 벽력적가주가 대체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건지…….]

[하 가주님은 괜찮겠죠?]

[부상이 심각해 보이긴 했지만 죽은 것 같진 않았소. 너무 염려 마시길.]

[누, 누가 염려했다고요.]

임송화가 짐짓 얼굴을 붉히고는 대답했다.

잠시 후 그녀가 불쑥 전음을 이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말이오?]

[벽력적가의 행동이요. 사절단을 급습하다니. 뭐, 명분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벽력적가주가 볼모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그자는 벽력적가주가 아니라 반 호법장이었죠.]

[흐음. 나도 그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소.]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림맹이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요. 어쩌면 이건…….]

현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군사의 계책일지도 모르겠소.]

[그럼 더 이상하잖아요? 벽력적가를 미끼로 삼았다는 건데.]

[아직 확실한 건 없으니 지켜봅시다.]

임송화는 뭐라고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한편 불타는 전각 모퉁이 너머에서는 연신 파육음과 비명이 솟구치고 있었다.

촤악! 촤촤촤악!

“크아악!”

“아악!”

“흐익! 살, 살려…… 커억!”

현청과 임송화가 서로를 힐끔 보고는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곳에는 혈귀가 된 사예린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늦어. 지금부터 수라첨쇄진(修羅尖碎陳)으로 이동하도록.”

“복명!”

흑천련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사예린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함정이든 뭐든 여기서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지.”

* * *

적가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천상원.

부원주 제중원은 화로에서 구슬만 한 철구를 집게로 꺼내 들었다.

모두 두 개.

이내 그것들을 은빛 한철 위에 내려두자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떨어댔다.

치이이이익!

따르르르르!

잔뜩 달궈져 있던 철구가 한기를 만나니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떨어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시커먼 철구는 움직임을 멈췄다.

제중원이 심호흡을 하고는 작은 집게로 철구의 덮개를 조심스레 열었다.

딸깍.

쉬이이이이……!

구슬만 한 철구를 열었을 뿐인데 방안을 가득 메울 정도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툭, 데굴데굴.

은쟁반 위를 구르듯 철구에서 떨어져 나온 단환이 한철 위를 미끄러진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약향.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도 어쩐지 가슴이 뛰고 기운이 넘치는 느낌이다.

제중원이 돋보기로 단환을 세세히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됐습니다.”

“다행이네요.”

“삼목자(三木子)와 제혈청(制血淸), 용령지(龍靈芝)를 일 할 오 푼, 삼 할 삼 푼, 그리고 사 할 일 푼의 비율로 넣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잡다한 약재가 세밀한 비율로 섞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였기에 일부러 말한 것이다.

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중원이 두 번째 철구로 집게를 가져가다가 멈칫거렸다.

“정말…… 이대로 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면요?”

“아무래도 단환이나 만들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적가장이 난리가 났는데…… 혹 적 가주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강한 분이에요. 걱정 마시고 계속 하시던 일을.”

은하란이 눈짓으로 철구를 가리켰다.

제중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두 번째 철구를 열었다.

그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비키라니까! 당장 원주를 만나야 한다고!”

“글쎄, 원주님을 만나시려거든 내일 오전에…….”

다음 순간 조제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이닥쳤다.

제중원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고, 은하란이 차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원 세 명을 어깨에 매단 채 숨을 헐떡이는 사람은 바로 엽강호였다.

그 뒤로 한사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엽강호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됐소! 주군이 여기로 가면 할 일을 알려줄 거라기에 왔소!”

“잘 오셨습니다.”

은하란은 차분한 표정으로 대꾸하더니 지금 막 만들어낸 단환 두 개를 엽강호와 한사에게 내밀었다.

두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고 바라보자 은하란이 모든 경계심을 단숨에 풀어 버릴 것만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드세요.”

“이, 이걸 말이오?”

“네, 그리고 이것도 받으시고요.”

엽강호와 한사가 얼떨결에 단환을 받아 복용하고 나자, 은하란이 품에서 주먹만 한 물건을 꺼내서 건넸다.

“이, 이건……?”

“다른 영단과 폭약이에요. 이곳을 습격했으면 그 정도는 가져가야 믿겠지요. 지금부터 내 이야기 잘 듣고 기억하세요.”

은하란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엽강호와 한사가 한참이나 집중해서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였다.

문득 천상원 어딘가에서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하란이 엽강호와 한사를 보며 말했다.

“가세요. 지금 저 소리는 여러분이 한 짓입니다.”

말뜻을 알아들은 엽강호와 한사가 얼른 걸음을 옮겼다.

“아, 알겠소!”

두 사람이 달려가자 제중원이 그제야 긴장하느라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물었다.

“원, 원주님은 저들이 이곳에 올 거라는 걸 다 알고 계셨습니까?”

“네.”

“역시…… 그것도 천문이나 역학으로 아신 겁니까?”

은하란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신이 아니랍니다.”

“하면 어찌……?”

“일전에 가주님이 오셨을 때, 일이 생길 시에는 저 두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겠다고 말씀해 주셨답니다.”

“아…… 그랬군요.”

은하란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저 두 사람에게 달렸죠. 상황에 따라 대처할 방법을 알려드렸으니.”

* * *

촤아악! 촤악!

“크아악!”

“으악!”

파육음과 비명이 난무한다.

수라첨쇄진으로 이동하는 흑천련 무인들은 거침이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유기체가 되어 하나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이따금씩 낙오자가 생겼지만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괴독자는 최전방에서 독공을 사용해서 길을 열었다.

평소대로라면 투혈권왕이 후미를 맡았어야 했지만, 의식을 잃은 그는 현재 현청과 임송화의 부축을 받으며 중앙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칫! 끝이 없어!”

사예린이 혀를 찼다.

베고 베어도 적은 끝없이 나타난다.

게다가 화마가 집어삼킨 이 적가장은 마치 미로가 된 것만 같다.

그럴 수밖에.

현재 무림맹은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대라금쇄망(大羅禁鎖網)을 펼쳤다.

대라금쇄망은 가후가 만든 최고의 진법 중 하나였다.

특히 지금처럼 전각이 많은 곳에서는 귀신도 빠져나갈 틈이 없다는 완벽한 포위진이다.

한마디로 지금은 진법과 진법의 대결이다.

하나는 뚫으려 하고, 하나는 막으려고 한다.

아직까지는 팽팽하다.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사예린의 생각은 달랐다.

창과 방패가 팽팽하다는 것은 결국 방패가 이기고 있다는 뜻이다.

수라첨쇄진이 대라금쇄망을 뚫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수라첨쇄진은 점차 무뎌지고 말 것이다.

결국 사로잡히게 된다.

아니, 사로잡힐 수야 없지.

정파 놈들에게 생포당해서 어떤 수모를 겪을지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마지막에는 목숨을 던진다.

동귀어진이라도 하는 거다.

촤아아악!

“커억!”

옆에서 달려들던 무인 하나를 베어내자 뜨끈한 피가 얼굴을 훅 덮쳐온다.

피하려면 피할 수 있지만, 지금은 한 줌의 체력도 아껴야 할 때다.

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촤아아악!

다시 한번 흑월아가 솟구치면서 핏방울과 비명이 튀어오른다.

그러는 사이 사예린의 생각은 또 바뀌었다.

그래, 죽긴 왜 죽나?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한다.

비굴하게라도 살아남아서 복수를 해야 분이 풀리지 않겠나?

촤촤촤아악!

차차착!

손을 떠나간 흑월아가 이번에도 세 명의 무인을 단숨에 베어내고는 사예린의 손으로 돌아와 잡혔다.

촤촤악!

목을 잃고 쓰러지는 세 명의 무인을 보니 다시 정신이 돌아온다.

그래, 지금은 동귀어진도, 복수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벌써 최악의 경우만 가정하고 있지 않나?

지금은 최상만 생각해야 한다.

그래, 무조건 뚫는다.

우선 이 지긋지긋한 미로를 뚫는다면 숨통이 좀 트이리라.

타다닷!

수라첨쇄진이 빠른 속도로 모퉁이를 돌았다.

그런데…….

“헛……!”

“제길!”

달려가던 무인들이 저마다 걸음을 멈췄다.

일일이 세기도 힘들 만큼 많은 무인들이 전방에 가득 포진해 있지 않은가?

저걸 뚫고 간다고?

수라첨쇄진이 아무리 잘 구성된 진법이라지만 한계가 있는 법.

사예린이 얼른 몸을 돌렸다.

하지만 뒤쪽에서도 이미 수많은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전각은 불에 타고 있으니 지붕으로 달아날 수도 없다.

불을 지른 게 오히려 발목을 잡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말이 씨가 됐나?

동귀어진인가? 아니면 투항인가?

그때,

콰콰아앙!

느닷없이 불타던 전각 한쪽 벽이 터져 나가더니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흑천련 무인들은 물론, 무림맹 무인들도 화들짝 놀라면서 돌아섰다.

사예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는……?”

“이 공녀님! 이쪽입니다!”

전각 안에서 뛰쳐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엽강호였다.

“네가 어떻게……?”

“자세히 설명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그러자 혈조야귀가 옆으로 다가왔다.

“우선 가시죠.”

그러는 사이 무림맹 쪽에서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쳐라!”

순간 사예린도 결단을 내렸다.

“가자!”

흑천련 무인들이 엽강호를 따라 불타는 전각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무림맹 무인들도 그 뒤를 쫓아 들어가려는 순간,

콰콰아아앙!

요란한 폭음이 울리더니 안으로 들어갔던 무인들이 인육 파편이 되어 튕겨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피, 피햇!”

우지끈! 쿠르르르릉!

마침내 활활 타오르던 전각 지붕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주저앉은 전각으로 다가와 어금니를 까득 갈았다.

“대체 이게……! 흩어져서 수색해라! 비상 탈출로가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존명!”

무림맹 무인들이 일제히 흩어져 날아올랐다.

한편 무너져 내린 전각의 지하에는 비밀 통로에 들어선 흑천련 무인들이 있었다.

엽강호가 투혈권왕 쪽으로 다가갔다.

“주군은 괜찮으신가?”

“부상이 깊습니다.”

현청이 대답하자 엽강호가 투혈권왕의 상의를 젖혔다.

“지혈 좀 확인하지.”

탄탄한 가슴에 새겨진 검상.

그리고 가슴 한쪽에 선명한 붉은 점 세 개.

엽강호가 흠칫거리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주군이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앞장섰다.

“가시죠. 이 통로로 곧장 상강(湘江) 인근까지 갈 수 있습니다.”

사라라랑.

순간 날카로운 예기가 엽강호의 목에 바짝 다가섰다.

흠칫거린 엽강호가 돌아보자, 사예린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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