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2화 (163/301)

162. 탈출

촤아아.

커다란 배가 강물을 가르며 힘차게 나아간다.

하늘에 뜬 조각구름은 유유히 흘러 해를 스친다.

갑판 위에 누운 사예린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후우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폐부에 쌓여 있던 답답한 감정과 잡스러운 생각들이 한숨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져 간다.

“월혼.”

그녀의 부름에 갑판 위로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대낮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시커먼 흑의를 갖춰 입은 무인.

사예린의 호신위인 월혼이다.

“평화롭지?”

사예린의 말에 월혼은 눈을 가늘게 뜰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인이 던진 말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고민하는 눈치다.

사예린이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에 그 난리가 있었는데 오늘은 모든 게 거짓말처럼 평화로워.”

말을 마친 그녀가 뱃머리에 서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상강을 거슬러 오르는 배.

군데군데 어선이 보이고 저 먼 곳으로는 뭍이 보인다.

어느 누구도 이 배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배에 흑천련 무인들이 가득 타고 있다는 걸 안다면 어느 누구든 기겁을 하리라.

이곳은 정파의 영역이니까.

펄럭펄럭! 펄럭!

마주쳐 오는 바람에 깃발이 세차게 휘날린다.

사예린은 고개를 돌려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바라보았다.

붉은 바탕에 금빛 수실이 무성한 깃발.

깃발에 새겨진 문양은 언뜻 물고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여인의 나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깃발이다.

어디 그뿐인가?

배 곳곳에 홍등이 걸려 있다.

물론 대낮인 지금은 고요하기만 하다.

하지만 한밤중이 되면 그 어떤 배보다도 휘황한 빛을 뿜으며 요란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이 배를 보고도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것은 모두 저 깃발과 홍등 때문이다.

취몽선(醉夢船).

장사와 동정호를 오가면서 돈 많은 손님을 태워 하룻밤 꿈같은 시간을 선사하는 곳.

배는 화려하고 크다.

당연히 지금도 선내에는 술과 기녀가 가득하다.

하지만 흑천련 무인 누구도 술과 기녀에게 손을 댈 수 없다.

사예린이 엄령을 내렸기에.

어쩔 수 없이 취몽선에 올랐지만 술과 기녀에게 손을 대는 순간 몰락은 한순간에 일어난다.

그야말로 독이 든 술잔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혈기왕성한 사내들은 분내를 맡으면 이성을 잃게 마련이 아니던가?

훈련된 무인이라지만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한순간의 실수로 어떤 판단을 내릴지 모를 일.

하지만 사예린은 그 실수가 생길 틈조차 주지 않았다.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다.

술과 기녀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엄명했을 때, 누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불평했다.

불행하게도 그 불평은 사예린의 귀에 들렸고, 그 자리에서 사내는 목을 잃었다.

그 후로는 누구도 기녀와 술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녀들은 모두 갑판 최하층에 몰아넣었다.

“취몽선을 구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네.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지?”

사예린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혹 마음에 걸리시는 거라도……?”

월혼의 말에 사예린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직은. 굳이 말하자면 너무 자연스럽달까? 아주 물 흐르듯이.”

사예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엽강호를 따라 상강에 도착하자, 한사가 취몽선에 올라서 기다리고 있었다.

엽강호와 한사는 적가장에 벌어진 일을 확인하고서 취몽선부터 탈취했다고 했다.

선주를 인질로 삼아 기녀와 무인들을 전부 갑판 최하층에 가두고, 엽강호는 곧장 적가장으로 달려온 것이다.

비상 통로를 어찌 알았냐는 질문에는 천상원주를 협박해서 정보를 빼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공력을 증폭시켜 주는 영단을 탈취하고 복용해서 남다른 기운이 유지되고 있었다.

단 두 사람이 취몽선을 탈취했다는 게 해명되는 순간이었다.

거기에 천상원에서 탈취한 다른 영단도 보여주었다.

다만 두 사람은 반철룡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엽강호와 한사는 반철룡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실종된 걸로 알고 있었다.

해서 두 사람만 부랴부랴 장사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적가장에서 그 사달이 벌어진 걸 알고 그렇게 행동했다는 건데…….’

되짚어봐도 이상할 건 없다.

말은 된다.

한데 너무 완벽하지 않나?

따깍.

사예린의 새하얀 치아 사이에서 손톱이 부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골몰히 생각에 잠겼던 모양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월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잠시 쉬시는 게 어떠신지.”

그럴까?

하긴. 너무 오랫동안 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상황에 과민하는 것이리라.

“그래, 조금 쉬어야겠어.”

말을 마친 사예린이 다시 갑판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안으로 드시는 것이…….”

“아니. 여기가 좋아. 날도 좋네.”

말을 마친 사예린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일단은 쉬고 생각하자.

당장 정파 영역에서 벗어나려면 체력을 아껴야 할 테니까.

* * *

몸이 흔들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부드럽게 흔들린다.

마치 요람에 누워 있는 것만 같다.

적비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

그리고 밀려드는 기억들.

천천히 손을 들어 보았다.

크고 두툼한 손.

‘나…… 투혈권왕인가?’

투혈권왕 진천(眞天).

새로운 신분으로 깨어난 적비연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옆에서 엽강호가 얼른 다가왔다.

“주군! 정신이 드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얼른 돌아보았다.

“주군!”

호신위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고는 적비연에게 다가왔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고개를 숙여 보니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검상이 있다.

다행히 적비연의 혼이 들어오면서 회복은 빠른 상태였다.

‘내가 찌른 상처 때문에 아파 죽겠네.’

투혈권왕의 몸으로 환생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살살할 걸 그랬다.

-그게 조절한다고 조절이 되냐?

옆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

극마가 어딘지 심술 난 표정으로 부유하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쳇! 자주 죽지도 않으면서 이왕이면 좀 기절한 다음에 죽음 안 되냐? 모처럼 내게도 설쳐댈 기회가 오나 싶었더니.

그게 불만이었나?

하긴 반철룡의 몸으로 싸우다가 심장이 꿰뚫리면서 즉사를 해버렸으니.

그건 그렇고.

일단 의식도 찾았고, 상황 파악도 됐으니 연기를 할 차례인가?

적비연이 이마를 짚고는 물었다.

“어떻게 된 건가? 여긴 어딘가?”

“취몽선을 탈취해서 도주 중입니다.”

“그런데 자네들은 어떻게……?”

적비연이 짐짓 놀랍다는 표정을 짓자 엽강호와 한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꾸했다.

“주군을 가까이에서 지켜 드리지 못한 죄, 죽어 마땅합니다! 저희들은 백발 광인과 맞서 싸우다가 겨우 절벽을 건너 살아남았습니다. 이후 장사로 곧장 달려왔습니다.”

“하면 호법장은……?”

그때 선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예린이 들어왔다.

“네가 애지중지하는 호법장은 애석하게도 죽었어.”

“뭐라고요?”

적비연이 깜짝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사예린이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네가 죽인 거나 다름없지.”

“내가 죽였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저!”

“벽력적가주.”

“무슨……?”

“그가 반 호법장이었다. 아니, 반대인가? 반 호법장이 그였어.”

“대체 그게 무슨……?”

적비연이 아무나 설명을 하라는 듯 고개를 돌리자, 현청이 넌지시 나서며 말했다.

“반 호법장이 벽력적가주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럴 수가! 대체 어째서……!”

-캬아! 주인 연기는 언제 봐도 흥미진진하다.

‘시끄러워.’

사예린이 걸어오며 말했다.

“그러니까 정신을 바로 차렸어야지. 내가 말했잖아?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럴 수가…….”

적비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자, 사예린이 차갑게 웃었다.

“사제는 항상 그게 문제야. 당하기 전까지는 의심을 하지 않는 것. 요즘 세상에 그건 순박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야.”

“혼자 있고 싶소.”

적비연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사예린이 코웃음을 치고는 선실을 나갔다.

적비연이 다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좌우호법만 남고 모두 나가도록.”

처척!

호신위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고는 물러났다.

마침내 선실에 엽강호와 한사만 남자 적비연의 눈빛이 대번 차갑게 식었다.

“이 배는 천상원주의 안배인가?”

“그렇습니다. 기녀들과 무사들은 모두 최하층에 가둬두었습니다.”

“또 다른 건?”

“배를 타고 동정호까지 가면 위험하다고. 그 전에 하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일을 계획한 자는 다름 아닌 무림맹 총군사 가후다.

투혈권왕의 기억을 모두 흡수하고 나니 거의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흑천련 사절단은 정말로 자신을 볼모로 삼아 일단은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본래의 임무는 실패했지만, 벽력가주인 자신을 사로잡는 것도 손해는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한데…….

’야밤에 복면인들이 사절단을 급습했다.

흑천련 사절단이 거짓으로 둘러댄 말이 아니라, 정말로 급습을 당한 것이다.

이에 사절단은 단단히 오해했다.

벽력적가주가 볼모로 잡혀가기로 약속한 다음 사절단을 방심시켜서 급습한 것으로.

격분한 사절단이 적가장에서 난장을 부렸고 이 사달까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이 모든 일을 예견했다는 듯 무림맹 무인들이 적가장을 포위했고.

‘결국 가후가 본가를 미끼로 사용했다는 말인데…….’

-하여튼 머리 쓰는 것들은 믿을 만한 놈이 없다니까. 그놈이 네 뒤통수를 칠 줄이야.

옆에 선 극마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가후에게는 실망이 크다.

무림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더니.

이런 식으로 이용당할 줄이야.

만약 자신의 추측대로 이 모든 일을 가후가 꾸민 것이라면 이미 동정호에도 수많은 무인들이 대기하고 있을 터다.

강을 이용해서 빠져나가는 게 가장 빠른 만큼 길목을 차단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육로가 낫다.

“망성(望城)에서 하선해야겠다.”

적비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 * *

묵검이 지객당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입구를 지키던 무인 두 명이 그 앞을 막아섰다.

순간 묵검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비켜라.”

반박을 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한 목소리.

무인 두 명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검을 뽑아들었다.

차차앙!

“군사께서는 지금 바쁘시오.”

“비키지 않으면 벤다.”

묵검은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

두 무인이 긴장한 채로 검파를 움켜쥐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 실내에서 가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습니다. 들어오시죠.”

그제야 두 무인이 검을 거두고는 물러났다.

묵검이 실내로 들어서니 탁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가후가 눈에 들어왔다.

묵검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탁자를 거칠게 짚었다.

타앙!

“지금 차가 넘어갑니까?”

“어지러울 때일수록 차분해질 필요가 있지요.”

가후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묵검이 미간을 구겼다.

“군사께서는 본가를 미끼로 사용했소! 본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비밀을 아는 자가 많을수록 계책은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지요.”

“그 때문에 본가가 입은 피해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맹에서 모든 비용을 지불해 드릴 겁니다.”

“돈 문제가 아니오! 돈이라면 이제 본가도 차고 넘치오! 당주와 각주뿐만 아니라 본가의 무인 다수가 죽었소!”

가후가 찻잔을 내려두고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멸문은 피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순간 살기가 일어나자 주변으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슈슈슈슉!

차차차차앙!

가후의 호신위들이 일제히 예기를 드러내며 묵검을 겨눴다.

가후가 고개를 저었다.

“무례하게 굴지 말고 물러나라.”

그의 말에 호신위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묵검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가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밀이 많은 건 비단 본 군사만이 아닌 듯합니다만.”

“무슨 말이오?”

가후가 찻잔을 다시 들며 물었다.

“지금 대체 벽력적가주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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