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3화 (164/301)

163. 탈출

가후가 묵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벽력적가주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묵검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묵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걸 알려야 할 이유가 없소.”

“보십시오. 귀가도 이렇듯 비밀이 많은데 맹은 오죽할까요?”

가후가 어딘지 비꼬는 투로 말하자 묵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가후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에 말을 이었다.

“저도 깜빡 속았습니다. 아주 훌륭한 계책이었습니다. 벽력적가주가 죽은 것만큼 파급력은 없겠지만, 실제로 흑천련이 벽력적가주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여론 형성을 할 수는 있겠지요.”

“애초에 가주님을 미끼로 삼았다는 거요?”

“그럴 리가요. 저는 벽력적가주가 그 순간에 나타날 줄도 몰랐습니다. 아, 벽력적가주가 아니죠, 참. 그자의 신원을 확인해 보니 투혈권왕의 호법장이라지요? 벽력적가주가 어찌 그런 사람과 연결 고리가 있었던 건지…….”

“어느 쪽이든 본가를 위험에 빠트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

“무림의!”

순간 가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묵검이 흠칫거리고는 가후를 보았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가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림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군사…… 당신 그런 사람이었소? 대의명분을 내세워 사람 목숨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무엇을?”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까?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대의를 좇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을 위태롭게 만드는?”

“대의? 무엇이 대의란 말이오?”

“강호에서 절대악을 없애는 것이지요.”

“설사 그렇더라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평화를 운운한다는 건…….”

“…….”

“능력이 부족하다는 거요.”

묵검이 가후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작은 희생? 진정 능력이 있다면 그 작은 희생을 치르지 않고 대의도 이루겠지.”

가후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마주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이거…… 뼈 때리는 말씀이군요.”

“본가는 이제부터 복구 작업으로 바쁠 예정이오. 당장 가솔들이 묵을 장소도 부족하오. 멀리 배웅하진 않겠소.”

축객령이었다.

적가장을 떠나라는.

그 뜻을 알아챈 가후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는 찻잔을 내려두었다.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벽력적가주님이 어디 계신지는 알려주지 않으실 건지?”

묵검이 가후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건 나도 모르오.”

“흠. 아쉽군요. 혹시 뵙게 되면 이 말씀은 전해주시기를.”

“말하시오.”

“맹을 위하는 마음도 좋지만…… 너무 앞서가면 함께 달리던 사람들이 뒤를 보게 된다는 것을.”

“무슨 말이오?”

“모든 음모는 앞이 아니라 뒤에서 일어나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 무슨 개 같은…….”

“진심으로 적 가주님을 걱정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두가 내 마음 같지가 않은 것이 인간사 아니겠습니까?”

묵검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가후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렸다.

“한 시진 내로 비워주시오.”

“그러지요.”

묵검이 나가고 나자 가후가 탁자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떻게 됐지?”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자의 말대로 비상 통로는 모두 다섯 군데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상강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두 곳. 둘 중 북쪽에 위치한 출구에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역시 강인가?”

“어선을 위주로 탐문을 벌였지만 수상쩍은 배가 이동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역시 육로가 아닐지.”

하지만 가후가 고개를 저었다.

“육로는 느리고 눈에 띄기 쉬워. 어디 집 안에 들어가서 꼼짝하지 않고서야.”

“하면…….”

“움직이는 집 안에 들어갔다는 뜻. 흑천련 무인들을 다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배가 뭐지?”

“……!”

“그래, 그거야. 취몽선.”

“전서를 띄워 동정호로 흘러드는 취몽선을 수색하라 지시하겠습니다!”

“아니, 취몽선을 탈취할 정도면 그쪽에도 머리 쓰는 자가 있어. 동정호까지 가지 않을 거야. 어쩌면 이미 망성에서 내렸을지도 모르겠군.”

“추격 지시 내리겠습니다!”

“늦었어. 검영대(劍影隊)는 이제 빠지라고 해. 지금부터는 추혼단(追魂團)이 나선다.”

“추혼단이……!”

가후가 고개를 들고는 창밖을 보았다.

“너무 많이 놓쳤어. 투혈권왕, 월희마녀는 제거했어야 했는데. 모처럼 일이 꼬이는군. 재미있어. 혹시 교패의 안배인가?”

가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 *

타닥, 딱……!

모닥불이 타들어간다.

적비연은 멍한 표정으로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았다.

“좀 어때?”

옥구슬이 구르는 듯 맑은 목소리.

하지만 감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보니 사예린이 옆에 서서 모닥불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사예린.

코 흘리며 뒷골목을 돌아다니면서 구걸하던 시절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그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모 잃은 고아였다.

죽이 잘 맞았다.

사예린은 손놀림이 좋았고, 훗날 투혈권왕으로 불릴 진천은 덩치가 크고 주먹이 셌다.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저잣거리에서 배수(扒手: 소매치기) 짓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하오문의 눈에 띄어 입문하게 됐고, 그곳에서 겁간을 당한 사예린을 진천이 구해주었다.

그때 죽인 자들이 무려 일곱 명.

그날로 하오문에게 쫓기던 것을 지금의 흑천련주가 구해준 것이다.

그렇게 어려서는 오누이 같은 사이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둘의 관계는 많이 변했다.

지금은 서로 절대권력을 두고 다투는 관계.

기억을 더듬은 적비연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괜찮소. 좋아지고 있으니.”

“다행이네. 일단은 배에서 내리긴 했는데 잘한 결정인지 모르겠어.”

“교 선생도 경계하는 가후가 아닙니까? 동정호로 흘러갈 것을 미리 예측했을 겁니다.”

“그렇게 대단한 가후라면 우리가 중간에 내릴 것도 계산에 넣어두지 않았을까?”

“아마 지금쯤 알았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다면 추혼단이 나섰을 겁니다.”

“추혼단이!”

사예린이 고운 미간을 팍 찡그렸다.

추혼단이 추격을 시작하면 나는 새도 발 앞에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추격의 귀신들이면 자유로이 나는 새마저 발밑에 떨굴까?

그야말로 강호 최고의 추격 조직.

육신이 없으면 그 혼이라도 쫓는다 하여 이름 붙은 추혼단이다.

추혼단이 나선다는 것은 작정을 했다는 뜻이다.

“이거 어렵게 됐는데.”

사예린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적가장에서 포위당한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그녀의 육감이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매우 낮아졌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었다.

애써 무시했다.

그래도 길이 있을 거라고.

그런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벌써 여러 차례 흑천련 본단으로 연락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회신은 오지 않았다.

연락책이 모두 당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강서로 넘어가는 경계 지역에 정도 무인들이 빽빽하게 진을 치고 있으리라.

벽력적가를 멸문시키지도 못하고 독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정도면 무림맹이 애초에 작정을 한 것이다.

사절단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엿을 먹이려고 단단히 준비한 거다.

‘과연 가후. 교 선생이 그토록 경계할 만하군.’

사예린이 손톱을 이 사이로 물면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정말 심하다.

사절단이 공식 방문하겠다고 공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그렇다면 가후는 정말 천외천의 두뇌를 가진 자가 아닌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두었을까?

생각에 빠진 채로 무심히 던진 눈길이 모닥불 맞은편에 앉은 혈조야귀에게 머물렀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하지만 곧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겠지.

그래, 과민한 반응이다.

혈조야귀는 자신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는 진심으로 벽력적가주를 죽이고자 했다.

다만 벽력적가주가 아니었다는 게 아쉽게 됐지만.

복잡한 상념을 털어낸 사예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추혼단을 떨쳐낼 방법은 있고?”

적비연이 사예린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금 내 의견을 묻는 겁니까?”

“그래.”

“웬일입니까? 언제나 사저는 육감만 믿지 않았습니까?”

“옛날에는 네 의견을 주로 물었지.”

옛날이라는 것은 둘이 함께 오누이처럼 지내던 시절을 말한다.

그녀가 흑천련주의 제자로 발탁되기 전까지.

확실히 그때까지는 사예린이 주로 진천에게 의사 결정을 맡기곤 했다.

적비연이 사예린을 보고 물었다.

“사저 육감은 어떤지?”

“글쎄. 한 가지는 분명해. 이대로 의풍지단으로 향했다간 경계지에서 몰살당하고 말 거야.”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육감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네 생각은?”

적비연이 사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찢어집시다.”

“찢어져?”

“세 갈래. 아니면 두 갈래도 좋고. 일단 사저와 내가 찢어져야 둘 중 하나라도 살아 돌아갈 확률이 커질 겁니다. 어차피 무림맹이 본격적으로 나선 이상 우리가 뭉쳐 다녀봐야 전면전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흐음.”

사예린이 가녀린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적비연은 짐짓 무심한 척 모닥불만 보았다.

따닥…… 딱……!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가 이따금씩 울려왔다.

한참이 지났을 때 사예린이 고개를 들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다 죽지 않을 방법은 그것뿐이네.”

적비연은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혹시라도 사예린이 끝까지 함께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여러 가지로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이제 겨우 의심에서 벗어났는데, 다시 또 그 빌어먹을 육감이 설치면 여간 피곤해지는 게 아닐 테니.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적비연의 물음에 사예린이 대꾸했다.

“내가 남쪽으로 가지.”

“그럼 제가 북쪽으로 가지요.”

“우리 애들 좀 붙여줘?”

적가장에서 일어난 싸움으로 권왕계의 무인들이 상당수 희생한 상태였다.

애초에 권왕계는 세가 약해서 이번 임무에 투입된 인원 다수가 새로 조직된 호신위 위주이기도 했다.

현재는 투혈권왕과 호신위만 남은 상태.

적비연이 호신위들에게 진법 훈련을 시켰던 게 이번 전투에서 효능을 발휘한 셈이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전면전을 펼칠 것도 아닌데 머릿수가 많아봐야 꼬리 밟히기 십상이죠. 괜찮습니다.”

“그것도 그렇겠네. 그럼 혈조야귀와 괴독자는 서쪽으로 이동하는 걸로.”

처척!

혈조야귀와 괴독자가 포권을 취하며 즉각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자박자박.

재만 남은 장작더미 근처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곳에 한 줄기 미풍이 불면서 또 다른 사내가 내려섰다.

척!

먼저 있던 사내는 포권을 취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어느 쪽이지?”

그야말로 지독한 한기를 품은 음성.

길게 찢어진 눈매는 뱀 꼬리를 연상케 했고, 한일자로 얇게 다물어진 입술은 더 없이 무감해 보인다.

아이의 눈물조차 얼어붙게 만든다는 그는 바로 추혼단주 무정검(無情劍) 사일룡(史一龍)이다.

“흔적은 세 방향. 가장 확실한 것은 서쪽. 괴독자와 혈조야귀로 파악됩니다.”

사내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괴독자가 지나간 자리라면 경공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독기로 초목이 시든 흔적이 있었을 것이다.

혈조야귀는 그가 익힌 경공술의 특성상 오른발 용천혈 부분의 발자국이 유독 깊이 찍혔을 테고.

“나머지는?”

“투혈권왕이 북쪽, 월희마녀가 남쪽으로 파악됩니다.”

“가능성은?”

“칠 할 이상.”

“일 대에서 오 대는 북, 육 대에서 십 대는 남으로 간다.”

“하면 서쪽은?”

“접경지로 전서 띄워.”

“단주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잠깐 눈을 가늘게 뜬 무정검이 얼음장처럼 찬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나는 북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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