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5화 (166/301)

165. 추혼(追魂)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으려나 했는데…….

임송화의 작은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들 일어서. 이동한다.”

적비연의 말에 무인들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모두 긴 잠영으로 한수를 건너왔기에 심신이 지쳐 있던 상태.

하지만 누구 하나 반박하는 이가 없다.

막다른 길.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적비연은 길을 뚫어냈다.

도저히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을 찾았다.

하늘이 무너졌는데 솟아날 구멍을 찾았으니 어찌 그를 따르지 않겠나?

게다가 지쳐 있던 몸에 적비연이 생기를 불어넣지 않았던가?

혈을 점하고 침을 놓으니 죽어가던 마음에 활기가 일어난다.

이제 그를 따르는 호신위들은 적비연을 은인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간자라는 신분 때문일까?

임송화가 나직한 소리로 소심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여기서 좀 쉬는 게 아니었나요?”

“쉰다는 건?”

적비연이 임송화를 보고 물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적비연의 눈동자는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깊다.

‘무슨 사람 눈이…….’

그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왜일까?

자신이 간자라는 사실도 다 알면서 넘어가 주는 것 같은 느낌은.

사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지만, 투혈권왕이 적비연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그저 이상한 느낌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임송화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무리 추혼단이라도 여기까지는 쫓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추혼단이 지쳐 포기할 테고, 경계가 느슨해졌을 때 다시 돌아나간다면 흑천련 권역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임송화가 또박또박 말했다.

현청이 그녀를 한 번 보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현청뿐만이 아니다.

다른 무인들도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는지 적비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적비연이 낭랑하게 웃었다.

“하하. 추혼단이 지쳐 포기를 한다고?”

“아닐…… 까요?”

임송화의 목소리에 자신이 없어졌다.

적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혼단을 과소평가하는군.”

“하면……?”

“무림맹 추혼단은 강호 제일의 추격조직이야. 지쳐서 포기? 그들이 맡은 임무에서 포기라는 선택지는 없어. 육신이 없으면 혼이라도 쫓는다. 그게 과연 비유일까?”

아니다.

실제로 추혼단은 망자의 혼까지 쫓는다.

한 번은 정사지간의 고수가 무림맹 비고에서 영단을 털어간 적이 있었다.

추혼단은 그를 끈질기게 추격했고, 결국 자결한 시신만 발견했다.

하지만 추혼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자결한 자가 훔친 영단은 그의 사부에게 전해졌는데, 병에 걸려 죽어가던 자였다.

사부를 살리기 위한 제자의 그릇된 열망이었다.

결국 추혼단은 그 사부를 찾아내어 배를 가르고 녹아 버린 영단을 회수했다.

배 속에서 녹아 버린 영단.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하지만 추혼단에게는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 되니까.

쫓을 육신이 없으면 그 혼을 쫓는다는 말은 그때부터 파생됐으니까.

죽은 이가 남긴 염원마저 샅샅이 파헤쳐서 그 뜻조차 말살해 버린다.

죽어서도 추혼단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건 그래서 나온 말이다.

지쳐서 포기?

그런 건 없다.

칠주야 동안 쫓아서 잡지 못하면 보름을 쫓는다.

보름이 흘러도 잡지 못하면 한 달을.

그래도 안 되면 일 년이고 십 년이고 추격의 끝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혼을 쫓아 무덤에서 시체를 꺼내 육시(戮尸)를 해서라도 끝을 맺는 자들이지.”

야명주가 박힌 공동에 적비연의 목소리만 담담하게 울렸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임송화도 말을 잇지 못했다.

추혼단이 그렇게 지독했던가?

하긴. 강호에서 지독하지 않고 유명세를 떨치는 조직이 있기나 한가?

강호를 너무 몰랐다.

아니, 사람에 대해 너무 몰랐고, 세상에 대해 너무 몰랐다.

그리고…….

‘투혈권왕에 대해서는 더 모르겠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자신도 모르는 무림맹 조직의 성격을 투혈권왕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적비연에게는 무림맹에서 먹고 자며 지낸 아상의 세월이 있으니.

하지만 그걸 모르는 임송화는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투혈권왕이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흑천련주의 제자답지 않게 어딘지 순박하면서 힘이 센 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치밀하기 짝이 없다.

현상을 살피고 계산하고, 행동하는 게 빈틈이 없는 사람 같다.

칼날같이 예리하면서도 부러질 것 같진 않다.

이 느낌…… 언제 느껴보았더라?

아, 하천웅!

그래, 그가 이런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함께했지만 반철룡도 그런 느낌을 주었다.

이 세 사람이 비슷한 느낌을 준다.

마치 피를 나눈 형제라도 되는 것처럼.

물론 외모와 무공, 성격은 제각각이다.

한데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닮은꼴이 있다.

우연일까?

이들의 연결 고리를 찾으라면…….

‘없어. 아무것도.’

다만 반철룡과 하천웅은 벽력적가주로 연결 고리가 생긴다.

투혈권왕은?

벽력적가주와 연결 고리는커녕 그렇게 감싸던 반철룡을 제 손으로 죽이는 데에 일조한 자가 아닌가?

‘아으! 모르겠다!’

임송화가 머리를 흔드는데, 적비연이 그나마 듣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좋아, 그럼 딱 반각만 휴식하지.”

그 말에 무인들이 저마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임송화도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정좌한 채 내공을 운기했다.

반각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공력을 회복해야만 한다.

한편 적비연은 공동 한쪽의 바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냥 이것저것.’

-아무래도 총군사가 뒤통수를 친 게 마음에 걸리나 보군.

적비연은 무언의 긍정을 보였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총군사 가후가 자신을 미끼로 삼을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신이 그곳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적가장을 미끼로 삼은 것일 테지.

-내가 말하지 않았냐? 이 강호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

‘알아. 그런데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아는 건 다르니까.’

-그럼 이젠 가슴으로 알았겠군. 이제 어쩔 생각이지?

‘일이 커졌어. 흑천련의 후계자가 되는 걸로 될 일이 아니지.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면…… 무림맹도 내 편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들도 본가가 강호제일의 문파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지.’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수많은 경험치를 쌓으면 뭐 하냐? 그 간단한 이치도 이제야 파악하는데.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극마의 핀잔을 반박할 수가 없다.

확실히 자신이 안일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강호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아가 있고, 타아가 있다지 않던가?

적비연의 자아는 타아의 경험으로 받아들인 사실들 중 배척하고 싶은 건 애써 외면했다.

그래, 벽력적가가 공명정대하며 무림 평화에 일조한다면 무림맹의 든든한 후원을 등에 업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애써 외면한 것이다.

하지만 이젠…….

‘외면할 수 없게 됐군.’

-그래서?

‘그쪽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나대로 방법을 찾아야지. 무림맹도 흑천련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내 세력을 갖춰야겠어.’

극마가 히죽 웃었다.

-이제야 뭔가 할 놈…… 아니, 주인으로 보이는군.

사실 적비연의 생각을 누군가 들었다면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한마디로 무림맹을 탈맹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소리.

물론 아직 공식적으로 탈맹 선언을 하진 않겠지만 이미 적비연의 마음속에는 무림맹을 지우고 있었다.

‘맹이 본가를 이용한 만큼, 나 또한 맹을 최대한 이용해 주지.’

-잘 생각했다. 자고로 강호의 주인이 될 자는 소속이 없는 법. 주인이 곧 조직 자체가 되어야 한다.

생각을 골몰히 하는 사이 반각이 지났다.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만 이동하지.”

무인들이 운공을 마무리하면서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송화가 조금은 가벼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앞으로 갈 길은 조금 수월하겠죠?”

“아니. 숨 한 번 잘못 쉬었다간 영원히 이 동굴을 벗어날 수 없게 될 거야.”

“……!”

임송화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다른 무인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적비연이 그저 겁을 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껏 자신들의 주인은 언제나 사실만을 말해왔으니까.

오히려 너무 겁먹을까 봐 약하게 충고한 적이 많다.

적비연이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공기처럼 움직여야 한다. 아주 잠깐 긴장을 놓게 되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테니 정신 바짝 차리도록. 대답도 생략한다.”

처척!

무인들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 * *

추혼단 일 대주는 반각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일각이 지나기 전에 추격의 실마리를 잡았다.

족적은 찾지 못한 게 아니라 사라진 게 맞았다.

“폭포수 아래 틈이 있습니다. 족적은 끊어졌고 이곳을 벗어날 방법은 그곳밖에 없습니다.”

“더 확실하게.”

“폭포수 아래 틈으로 달아난 것이 확실합니다! 수압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렵고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모르는 상태입니다.”

“잠영에 자신 있는 애들로 스무 명 추려.”

“존명!”

잠시 후 추혼단에서 잠영에 능한 자들 스무 명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제일 앞장서서 뛰어든 자는 삼 대주.

수압을 견디며 벽 틈으로 들어간 삼 대주는 내심 놀랐다.

‘투혈권왕이 이런 곳을 어떻게 안 거지?’

길이 있긴 있는 건가?

어둡고 좁은 통로다.

게다가 벽 안쪽과 바깥쪽의 수온 차가 엄청나다.

지독한 한수.

온몸이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리는 것만 같다.

내공을 끌어올리고 계속해서 잠영을 펼쳤다.

슈우우우. 슈우우우.

‘끝이 보이지 않는군.’

한참을 앞으로 나아가던 삼 대주가 멈칫했다.

여기까지가 딱 호흡의 절반이다.

지금이라면 되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더 나아가면 되돌아갈 수는 없다.

되돌아가기도 전에 숨이 모자라서 익사하고 만다.

끝을 알 수 없는 수중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있는가?

이건 무공 수위와 상관이 없다.

물고기가 아닌 이상 물속에서는 숨을 쉬지 못하니 죽을 수밖에.

하늘을 나는 무인도 물속에서 반각을 버티기가 어려운 법이다.

호흡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생명체인지 절감하기 시작한다.

지금 삼 대주가 그랬다.

호흡이 점점 차올랐고, 범인들을 우습게 여기던 무공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한 줌의 공기.

‘젠장! 어떻게 된 거야!’

도망자들은 틀림없이 이곳으로 달아났다.

그럼 역시 끝이 있어야 할 터인데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슈우우욱! 슈우우욱!

더욱 앞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뒤따르는 무인들도 곤욕이다.

제일 뒤편에서 따르던 두 명의 무인은 이미 몸을 돌렸다.

추격을 포기하고 되돌아 나가면 추혼단주에게 죽을 것이다.

그래도 당장의 본능을 이기기가 어렵다.

가장 앞서가던 삼 대주의 머릿속에 절망이 스친다.

‘틀렸다! 끝이 없다!’

아니, 끝은 분명히 있다.

족적은 끊어졌고, 공교롭게도 이런 수중 통로를 찾지 않았는가?

다만 그 끝이 너무 멀다.

하면 도주하는 자들은 어찌 이 통로를 지나간 건가?

아뿔싸!

준비가 부족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 수중 통로를 지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으리라.

처음부터 이 틈을 우연히 발견한 게 아니라면?

믿을 수 없게도 이곳을 원래부터 알고 있었다면?

‘제길! 돌아가야 해!’

준비 없이 들어온 것이 패착이다!

하지만 몸을 돌리기에는 통로가 너무 좁다.

들어온 상태 그대로 발끝부터 물러서야 한다.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돌아가! 물러서!’

수신호를 보냈지만, 제일 뒤따라오는 무인에게까지 전달되려면 한참이 걸린다.

마음이 급하다.

숨은 차오른다.

뒤늦게 무인들이 물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삼 대주는 알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단 한 사람도 이 수중지옥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 * *

“중도에 되돌아온 두 명 제외, 전원 사망입니다. 사인은 익사!”

보고를 올린 일 대주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추혼단주 무정검의 입매에 싸늘한 미소가 걸린다.

그가 정말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다.

일 대주 옆에는 살아서 돌아온 두 명의 무인이 온몸이 젖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일 대주.”

“명 받듭니다!”

“추혼단에 이렇게 약한 자들이 있었나?”

“없습니다!”

“처리해.”

“존명!”

곧이어 두 사람의 비명이 폭포수 아래에 차올랐다.

무정검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폭포수를 응시했다.

“수중에서 공기를 확보할 방법을 생각해. 이번엔 내가 앞장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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