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6화 (167/301)

166. 추혼(追魂)

적비연이 가진 아상의 기억 중에는 만초단주 곡양기에 관한 것도 있다.

아상의 인생에서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지만, 곡양기의 인생에서는 아상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아상이 살려준 그는 아상을 친부처럼 따랐다.

무공을 잃은 후에는 아상에게 질 좋은 약초를 제공하기 위해 약초꾼으로 살았다.

그러한 사실을 안 적비연은 만초단주인 그를 중용했고, 예상대로 곡양기는 천상원을 세우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리고 지금.

곡양기는 또 다른 방법으로 적비연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비교적 입이 무거운 곡양기는 좀처럼 무용담을 늘어놓지 않는 자였다.

그런 그도 아상만 보면 자랑처럼 얘기하곤 하는 일화가 있었다.

물론 그건 오롯이 자랑만이 아니었다.

무인이라면 꿈에나 그리는 영단을 취하지 못한 아쉬움에서 흘러나온 넋두리이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은 무공 한가락 한다던 시절.

그는 어느 산에서 실족하면서 천연 동굴로 떨어진다.

미로처럼 복잡한 동굴을 헤매던 그는 놀랍게도 지하 깊숙한 곳에서 빙백독광사(氷白毒光蛇)를 발견한다.

빙백독광사가 품은 내단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천연 영단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빙백독광사를 만나면 내단은커녕 목숨부터 걱정해야 한다.

빙백독광사가 내뿜는 숨결을 정면에서 맡으면 그 자리에서 폐부가 얼어붙는다.

다행히 빙백독광사가 수면 중이었기에 곡양기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곡양기 평생의 자랑거리였고, 동시에 평생의 한이었다.

빙백독광사의 내단을 잘 이용하기만 한다면 음의 기운을 극한까지 축적하는 것은 물론,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가 될 수도 있기에.

하지만 아름다운 꽃은 가시가 있는 법.

빙백독광사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곡양기가 엄두도 내지 못할 가시였다.

그때 곡양기가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탈출구가 바로 그 폭포수 아래의 틈이었다.

가죽 수통을 이용하는 방법은 곡양기가 직접 알려준 것이기도 했다.

-그럼 이곳에 그 빙백독광사가 있단 말이냐?

‘그렇겠지.’

사실 적비연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곡양기가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실제로 폭포수 아래에 틈이 있었고 이렇게 지금은 동굴 속을 걷고 있지 않은가?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지만 헤맬 필요는 없다.

갈림길이 나타나면 무조건 좌측으로 들어간다.

곡양기가 이곳을 빠져나왔을 때 무조건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했으니 그 반대로 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커다란 공동이 나타나는데, 그곳에 빙백독광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빙백독광사는 하루 중에 열 시진 이상을 자는 습성이 있으니 동혈을 따라 이동하다가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지금은 숙면에 빠져 있을 시간.

-빙백독광사는 하루에 두 번 깬다던데.

극마의 말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과 정오. 반 시진 정도 깨어 있지.’

-별걸 다 아는군.

‘이래봬도 영물에 관한 서책은 수없이 읽어봤으니까.’

-그것도 아상이라는 영감탱이 기억인가?

적비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신의 아상은 적비연이 가진 기억과 경험 중에서 가장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극마가 너스레를 떨었다.

적비연은 손을 들어 수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휴식이다.

그를 뒤따르던 무인들이 모두 자리에 멈춰 서는 정좌를 한 채 운공을 했다.

한 식경을 이동한 다음에는 반각을 쉰다.

이렇게 계속 반복한다.

이곳이 빙백독광사의 소굴이라는 말은 수하들에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수하들은 극도로 긴장하게 될 테고 반드시 실수가 나온다.

단지 뭐가 나올지 모르니 최대한 기척을 죽이면서 이동하라고만 알렸다.

그리고 쉴 때는 확실히 운기를 해서 체력과 공력을 회복하라고.

적비연의 말을 곧 천명처럼 받드는 수하들은 그대로 따랐다.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이동할 차례다.

‘이제 곧 빙백독광사가 있는 공동이 나온다.’

-확실히 오래 살고 볼 일일세. 전생에서도 보지 못한 빙백독광사를 다 보게 되다니. 크기는 얼마나 되지?

‘글쎄. 곡양기의 말로는 지름이 반 장 정도에 길이가 스무 장은 될 거라고 했지.’

-호오, 그럼 사람 수십 명쯤은 단숨에 꿀꺽하겠군.

‘아마도.’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다 왔다!’

적비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빛이 스며드는 출구를 보았다.

빛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색깔이었다.

자연광이 아닌 것이다.

걸음을 늦춘 적비연이 천천히 공동으로 들어섰다.

이내 사방에 빼곡하게 박힌 야명주가 눈에 들어왔다.

그 영롱한 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다.

하지만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면 바로 앞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가 잠들어있는지 알게 된다.

스르르릉. 스르르릉.

부드럽게 울려오는 숨결.

전방에 축축하게 젖은 둥근 벽이 이따금씩 부풀어 오르다가 가라앉길 반복한다.

둥근 벽은 진짜 벽이 아니다.

너무 커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빙백독광사의 몸통이다.

맙소사. 길이가 스무 장 정도라고?

그 두 배는 되어 보인다.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크다니!

아마 무인들이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빙백독광사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하리라.

하지만 끝까지 저 영물이 빙백독광사라는 건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차라리 만년설사(萬年雪蛇)나 천수백사(千手白蛇) 정도로 오인하는 게 낫다.

어차피 지금의 전력으로는 싸워서 이길 수도 없는 존재.

그렇다면 긴장이라도 덜 하는 게 나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공동으로 들어선 무인들은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잠든 빙백독광사를 보았다.

어떤 이는 너무 놀라서 비틀거리는 걸 옆 사람이 얼른 부축했다.

빙백독광사는 컸다.

나이가 얼마나 될까?

천 년, 아니, 어쩌면 만 년은 먹었을 것 같다.

빙백독광사의 내단은 머리 쪽에 있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 안에는 시리도록 빛나는 푸른 구슬이 있다.

전각도 거뜬히 삼킬 만큼 커다란 덩치지만 빙백독광사의 내단은 아이 주먹보다도 작다.

마치 작은 보석과도 같다.

하지만 그걸 찾아볼 엄두는 나지도 않는다.

괜히 빙백독광사의 머리 쪽으로 다가갔다가는 그 숨결에 뼛속까지 얼어 버려 즉사하는 수가 있다.

조심, 조심. 또 조심.

적비연은 최대한의 은신술을 펼쳐서 이동했다.

이를 본 엽강호와 한사가 역시나 혼신의 힘을 다해 기척을 죽였다.

그 뒤를 따르는 임송화는 혀를 내둘렀다.

‘이번엔 은신술까지? 하!’

저 큰 덩치로 저토록 섬세한 은신술을 펼치다니?

전직 흑천련주의 호신위라도 지냈던 건가?

어쨌거나 지금은 당장 눈앞에 있는 저 거룡(巨龍)을 깨우지 않는 게 중요하다.

‘도대체 이 미치도록 큰 뱀은 뭐지? 만년설사인가? 아니면 설화사(雪花蛇)? 아니지. 사방이 야명주로 덮여 있는 게 어쩌면 단서가 될 수 있겠어.’

신수나 영물 중에는 유독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

공동을 가득 채운 지독한 한기. 그리고 사방을 빼곡하게 채운 야명주. 거기에 전신을 덮고 있는 새하얀 비늘. 군데군데 검은 점이 이따금씩 보인다.

‘저 점은 단순한 무늬가 아닌 것 같은데…… 만약 저게 독점이라면…… 엇, 설마!’

임송화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런 미친!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한다.

그래, 아니겠지. 아닐 거야.

미쳤다고 눈앞에 이만한 빙백독광사가 있겠나?

삼대가 덕을 쌓거나, 삼대가 악을 쌓아야 비늘 한 조각이라도 볼 수 있을까 말까하다는 빙백독광사가 아닌가?

‘그래, 아니겠지. 아닐 거야.’

하지만 확인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제발 아니길 바라면서 전음을 보냈다.

[주군, 이 영물은 혹시…….]

[빙백독광사.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말도록.]

맙소사. 진짜다.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잠든 빙백독광사 옆을 지나간단 말인가?

그런데 지금 자신이 지나고 있다.

살이 떨린다.

빙백독광사라는 걸 알고 나니 손발이 어지러워진다.

[정신 차려!]

귓가로 전음이 박혀든다.

임송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 차라리 몰랐다고 치자.

제길, 거짓말이라도 해주지.

하긴. 거짓말을 했다면 믿었을까?

투혈권왕도 이미 자신의 표정을 보고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런데 앞서 걷던 엽강호와 한사가 멈췄다.

움찔거리고 앞을 보니 저만치 앞서가던 투혈권왕이 공동 절벽을 올려다보고 있다.

‘안 가고 뭐 하는…… 설마?’

안 좋은 예감은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적비연이 손가락으로 공동 절벽 중간쯤을 가리켰다.

그곳에 통로가 있었다.

‘맙소사! 빙백독광사가 잠든 방에서 암벽타기를 하겠다고? 제정신이야?’

정말이지 소리를 빽 지르고 싶었다.

* * *

제일 마지막으로 물속에 뛰어든 오 대주는 야명주로 어두컴컴한 통로를 비췄다.

하지만 그는 곧 야명주를 괜히 꺼내 들었다며 후회했다.

보지 않을 걸 그랬다.

좁은 통로에 떠다니는 인육 파편.

물 색깔은 온통 핏빛으로 벌겋게 변해 있었다.

제일 앞장섰던 추혼단주가 길을 막고 있는 시체들을 가차 없이 도륙한 것이리라.

보지 않아도 훤하다.

추혼단주 무정검은 그런 사람이다.

그 별호만큼이나 매정한 사람.

무인에게 감정은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하는 자.

인육 파편을 헤치면서 잠영을 해나가려고 하니 욕지기가 치민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점점 통로가 넓어졌다.

정말이지 잠영을 하면서 나아갈수록 놀랍기만 하다.

도주자들이 이런 곳을 어찌 알았을까?

그렇게 한참을 나아간 후에야 그는 얼음으로 덮인 수면으로 솟아올랐다.

얼음천장을 더듬으면서 유영을 해나가다가 마침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프하!”

숨을 한껏 들이마신 그가 물가로 걸어 나왔다.

후우우웅!

운기를 하자 장삼이 부풀어 오르면서 전신이 곧 바짝 말랐다.

오 대주가 올라온 것을 확인한 일 대주가 추혼단주 무정검에게 다가가 보고했다.

“이백삼십 명 전원 도착. 낙오자 없습니다.”

“쫓아.”

“존명!”

일 대주의 대답과 동시에 추혼단 무인들이 일제히 통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주자들은 모든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흔적이 분명하다.

지우려고 한 시도조차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까지 쫓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일 대주는 그렇게 착각했다.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이 상상 밖의 존재라는 것을 까마득히 모른 채.

* * *

임송화는 소리 나지 않게 긴 숨을 토해냈다.

숨 쉬는 것조차 겁난다.

그녀는 절벽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공동 아래에 똬리를 든 채 곤히 잠든 빙백독광사!

맙소사. 저길 지나오다니!

아무리 빙백독광사가 잠을 자던 중이라지만.

잠든 빙백독광사가 깼을 때만큼 무서운 재앙이 없다는데.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거다.

차라리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추혼단과 정면 승부를 벌이는 게 낫다.

그런데 어쨌든 했다.

투혈권왕의 눈빛만 마주해도 거절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었기에.

섭혼술 같은 사술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다.

아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사술이 어디에 있나?

대체로 섭혼술과 같은 사술은 인당혈(印堂穴)이 있는 상단전을 이용하기 마련이다.

상단전의 기운을 그렇게 오랫동안 발출하면 사람이 미쳐 버리거나 주화입마에 걸리고 만다.

그러니 사술은 아닌 게 확실하다.

아무튼 재미있는 사람이야.

임송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안 가고 뭐 하는 거지?

투혈권왕은 좀처럼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통로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보다 못한 그녀가 물었다.

[안 가십니까?]

[여기까지 왔으니 모처럼 좋은 구경을 놓칠 순 없잖아?]

[좋은 구경이라니…… 설마! 벌써 추혼단이?]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지금쯤 잠영을 끝내고 통로로 들어섰을 거야.]

[그렇게나 빨리……!]

의심을 해야 하는데 의심이 들지 않는다.

그가 그렇다면 그럴 것이라는 생각만 든다.

대신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그렇게 무림맹 조직에 대해 빠삭하시죠?]

적비연은 대답 대신 웃었다.

어떻게는?

내가 무림맹에 몸담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키는 사이, 기다리던 일이 벌어졌다.

타타타타탓!

저만치 아래쪽 통로에서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저 바보들……!’

임송화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관자의 입장이지만 빙백독광사가 깨어난다는 걸 상상만 해도 두렵다.

저 거룡이 기지개를 켜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침내 아래쪽 통로에서 무인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추혼단이다!

‘정말이었어! 정말 그들이 벌써 여기까지!’

하지만 그건 추혼단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앞장서서 달려온 일 대주가 영물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급히 멈춰 선 것이다.

그제야 다른 무인들도 기척을 한껏 죽이고는 빙백독광사를 경계했다.

그때 적비연이 불쑥 나서더니 사자후로 쩌렁쩌렁 외쳤다.

“여기야! 여기! 한참 기다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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