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8화 (169/301)

168. 나를 따르라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에서 한 줄기 빛살이 직선으로 내려온다.

그 모습이 언뜻 신비로워 보일 지경이다.

임송화는 멍한 눈길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기로 나간단 말이지…….”

천장에 뚫린 구멍은 어른 주먹이 겨우 들락거릴 정도다.

빙백독광사가 머물고 있던 공동과 또 다른 곳이다.

천장이 훨씬 높고 주변도 더 넓다.

자연히 임송화의 시선이 한쪽에 정좌를 하고 운기하는 적비연에게 향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안 거지?”

기가 막힌다.

흑천련 본단에서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지냈을 줄 알았는데.

언제 천하를 돌아다니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 천하를 돌아다닌들 이런 곳을 알기도 어려울 텐데.

어쨌거나 출구를 알아도 빠져나가기가 어렵다.

이 넓은 공동에서 천장에 뚫린 저 구멍까지 갈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데 적비연은 그것도 아주 간단하게 해결했다.

수하들에게 빙백독광사의 내장을 길게 잘라내도록 지시한 것이다.

해체 작업에 시간이 꽤나 걸리긴 했지만, 이미 죽어 버린 빙백독광사는 살아 있을 때만큼 무섭진 않았다.

비늘은 여전히 단단했지만, 입 안쪽으로 들어가서 안에서부터 잘라내면 될 일이었다.

적비연이 능숙하게 제독 작업을 끝냈기에 중독될 위험도 없었다.

이제 가늘고 길게 잘라낸 내장을 밧줄처럼 이용해서 이곳을 빠져나가게 되리라.

“참, 강호 도처에 고수가 널려 있다더니. 해도 너무한 거 아냐?”

임송화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현청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렇소. 투혈권왕이 저토록 다재다능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내 말이요. 저렇게 재주가 많은데 왜 흑천련에서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을까요?”

“원래 재주가 너무 많아도 굶어 죽기 딱 좋다지 않소?”

현청이 농담처럼 말했다.

만약 이 말을 적비연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으리라.

지금 이렇게 살아 나갈 수 있는 것도 그 다양한 재주 때문이 아니던가?

임송화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저런 재주들 좀 가져봤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현청이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임송화도 긴장이 풀렸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임송화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이제 우린 어쩌죠?”

그녀의 목소리에 현청도 더는 웃음을 잇지 못했다.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다려 봅시다.”

“뭘요?”

“맹에서 연락이 오지 않겠소?”

“맹이…… 과연 연락을 해올까요?”

“그렇지 않으면?”

“도사님은 너무 순진하다는 거 아세요?”

“내가 말이오?”

“그래요. 여기 도사님 말고 다른 도사가 또 있나요?”

“어…… 쉿. 너무 그렇게 대놓고 얘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어때서요? 이미 수신위들 사이에서 도사님 별명이 도사님이라고요.”

“헉, 그게 정말이오?”

“정말 모르셨어요?”

“몰랐소. 나는 나름대로 악랄하게 행동한다고 한 건데…….”

“풋! 그게 악랄하면 난 때려죽일 년이게요?”

“아, 그런 뜻은 아니었소.”

“지금도 봐요. 아, 그런 뜻은 아니었소. 이렇게 순진하게 대꾸하다니.”

임송화가 목소리까지 흉내 내며 따라하자 현청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그만 놀리지 마시오.”

“그, 그만 놀리지 마시오. 그건 더 놀려달라는 건가요? 아니면 놀리지 말라는 걸 그만하라는 건가요?”

“그, 그건…… 그게 그 말이잖소?”

“오, 그건 아시네요?”

임송화가 깔깔거리며 웃자 현청도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그가 웃음기를 거두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의심은 하고 있었소.”

“뭘요?”

“맹이 우리를 그저 이용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끝났네요.”

“뭐가 말이오?”

“순진무구한 도사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 정도면 우린 분명히 이용당하고 있다고요.”

“그렇다고 해도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임송화가 말을 끊고는 현청을 빤히 보았다.

현청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무, 무엇을 말이오?”

“정말 대의를 위해서는 개인의 삶은 얼마든지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냐고요.”

“그건…….”

현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적가장에서 그 사건을 겪고 나서는 그 생각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현청 자신은 그렇게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가장의 무고한 사람들은?

그들은 그 뜻에 동의했을까?

과연 무림맹은 그들 개개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런 암계를 꾸몄을까?

아니, 그보다 흑천련의 후계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살심을 품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정과 사는 어째서 반목해야 하는가?

간자의 신분이긴 하지만, 사파에 몸을 담은 후부터는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복잡하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뻑뻑하다.

임송화가 운기하는 적비연을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사부님이 그랬어요.”

“……?”

“복잡한 문제일수록 간단하게 생각하라고.”

“그걸 어찌……?”

“그 누구도 개인의 삶을 말살할 권리는 없어요. 무림맹이 이런 식으로 내 삶을 이용하겠다면, 나는 당차게 거부할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내 삶을 걸어볼 만한 다른 사람을 찾아보려고요.”

“소저, 설마……?”

현청이 그녀의 시선을 쫓아 적비연을 보았다.

한편 적비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적가장에서 입었던 상처는 거짓말처럼 회복되어 지금은 거의 정상인이나 다름없었다.

확실히 환생한 직후의 회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회복력.

그럼에도 천상원의 명성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일까?

적비연의 이런 초인적인 회복력이 엽강호가 건넨 영단의 효력 때문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자들이 많았다.

어쨌거나 적비연으로서는 공연한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 나쁠 것은 없었다.

전신 세맥을 따라 내력이 시원하게 일주천하고 나자, 적비연이 서서히 눈을 떴다.

슈우우우.

주변으로 미미하게 퍼져 있던 기운이 그의 몸으로 갈무리됐다.

-어떠냐?

극마가 묻는 말에 적비연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어떨 것 같아?’

-글쎄. 초절정 사 단이었으니까 이제 한 단 정도는 더 오르지 않았을까?

물론 공력과 무공 수위가 정확하게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지금 적비연은 무공 수위에 비해서 공력이 월등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공력이 차고 넘치게 되면 무공 수위도 어느 정도 상승할 수밖에 없다.

힘이 세다고 싸움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강해질수록 싸움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단순히 공력만 흡수하는 게 아니라, 무공 기억까지 흡수하다 보니 아무래도 환생 직후에는 무공 수위가 올라갈 수밖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 단에 올라섰어. 기분 상 육 단을 앞둔 느낌이야.’

-오, 축하한다! 그래도 투혈권왕의 공력과 무공이 꽤 도움이 된 모양이군.

적비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기억에 투혈권왕의 기억까지 더해져서 흑천투권공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이것까지 복용하게 된다면…….’

적비연이 품에서 구슬처럼 생긴 돌을 꺼내 들었다.

푸른빛을 영롱하게 머금은 보석.

하지만 보석이 아니다.

빙백독광사의 내단이다.

언뜻 야명주같이 생겼지만, 투명한 표면 안에는 물처럼 흐르는 무언가가 있다.

독과 한기를 머금은 내단.

잘 복용한다면 극음의 기운을 얻게 되는 것과 동시에 만독불침지체를 만들어주겠지만, 까딱 잘못하면 독과 한기를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도 있다.

‘아직은…….’

이론상으로는 어찌 복용해야 할지 알고 있다.

아상의 기억이 있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빙백독광사는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신수가 아니던가?

누가 먹어봤다는 기록도 없고, 누군가 먹고 엿 됐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없다.

모든 과정을 적비연이 처음으로 겪어야 한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복용하다가 죽으면 다시 환생하잖냐?

‘그러기엔 투혈권왕의 지위가 아깝지. 게다가 기껏 얻은 빙백독광사의 내단을 버리는 셈이 되고.’

-하긴.

투혈권왕의 신분이라면 흑천련 가장 깊숙하게 접근할 수가 있다.

특히 후계자가 되기라도 한다면?

강호 정세를 뒤흔들 위치가 된다.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빙백독광사의 내단을 품에 갈무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모여.”

그의 부름에 무인들이 신속하게 집합했다.

대부분 수신위들이었고, 다른 소속 무인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들 대부분의 눈빛에는 적비연을 향한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비연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기적을 이뤄왔으니까.

적비연이 무인들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희들은 흑천련의 무인인가? 나의 수하인가?”

순간 무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멈칫거렸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곤란한 질문.

누군가 손을 들어 물었다.

“주군, 그게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 너희들이 흑천련이 아닌, 내게 목숨을 걸 수 있는지 묻는 거다.”

“당연한 질문입니다. 저희들은 애초에 목숨을 바쳐 주군을 지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대답한 자는 수신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반철룡이 투혈권왕의 손에 죽었으니 마음이 흔들릴 법도 한데 다행히 충심은 유지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론 부족하지.’

적비연이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만약 내가 본 련과 반목을 한다면?”

“……!”

순간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지금 반역을 모의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때,

“물론입니다! 어차피 저희는 이곳에서 진작 죽었을 목숨! 저희 목숨을 어떻게 쓰시든지 그건 주군의 뜻에 달렸습니다!”

우렁차게 대답한 사람은 바로 좌호법 엽강호였다.

이런 문제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그걸 안 엽강호가 얼른 분위기를 끌어오기 위해 나선 것이다.

한사 역시 포권을 취하며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주군의 뜻이 어디에 있든지 저는 따릅니다. 제 목숨은 주군의 것입니다.”

그러자 수신위들이 너도나도 충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적비연이 아니었다면 이름 모를 동굴에서 죽었을 목숨.

여벌로 얻은 목숨을 주인에게 바치겠다는 선언이 이어졌다.

그렇게 모든 무인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나자, 적비연이 한쪽에 선 무인에게 다가갔다.

조걸(朝傑)이라는 수신위였는데, 진급심사에서 적비연과 함께 싸웠던 자는 아니었다.

“정말 가능해?”

“무슨 말씀이신지.”

“내게 충성을 맹세해도 괜찮겠냐고.”

“물, 물론입니다! 저는 주군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을 겁니다!”

“그게 진심이라면 좀 더 솔직해지는 게 어떤가?”

순간 조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무인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걸과 적비연을 번갈아 보았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이라도 진심을 다해 충성을 맹세한다면 네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조걸이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적비연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네가 간자라는 걸 모를 줄 알았나?”

“……!”

순간 조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가 경악한 얼굴이 되더니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주, 주군! 용서하십시오! 실은 제가…….”

“이미 늦었어. 기회는 줄 때 잡아야지.”

싸늘하게 말을 뱉은 적비연이 수도를 그었다.

쉬이이잇!

한 줄기 섬광이 스치자 무릎 꿇고 있던 조걸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린 조걸이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이 한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곧 한사가 다가와 시체의 배를 가르자 내장에서 꾸물거리는 시커먼 생명체가 드러났다.

“헛! 저, 저게 뭐야?”

“거머리? 아니, 애벌레?”

무인들이 놀란 가운데 적비연이 말했다.

“흑살고(黑殺蠱)다. 이놈은 간자였다. 간자가 이중 첩자가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보통 저런 걸 심어놓지.”

“그런……!”

“저놈이 무림맹 간자라니!”

“저런 찢어 죽여도 싼 놈 같으니!”

무인들이 저마다 분개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적비연은 속으로 뇌까렸다.

‘무림맹 간자가 아니라, 일 공자인 파천신군의 간자지.’

간자의 몸에 흑살고를 심어두는 것은 주로 파천신군이 써먹는 방법이었다.

뭐, 그렇다고 거기까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용케도 알았구나.

‘잠영이 끝난 후 혈맥을 점하고 침술을 놓는 과정에서 흑살고를 느꼈었지.’

-그랬군. 근데 왜 굳이 지금 이 시점에 죽인 거냐? 진작 죽여 버리지.

‘최대의 효과를 위해서.’

-뭔 효과?

‘저런 극단적인 본보기가 생기면 심리적으로 남은 자들의 충심이 저절로 올라가거든.

적비연이 무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걸로 불순분자도 제거했으니, 너희들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나와 함께 새로운 강호를 열자.”

다음 순간 무인들이 공동이 떠나가라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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