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69화 (170/301)

169. 나를 따르라

다그닥…… 다그닥…….

죽립을 푹 눌러쓴 적비연이 말을 몰았다.

그 뒤로는 수레에 짐을 가득 실은 일행이 뒤따르고 있었다.

적비연 곁에는 말에 탄 한사가 무적표국(無敵鏢局)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었다.

워낙 화려한 깃발이었기에 슬쩍 보기만 해도 뇌리에 박혀들 것만 같다.

게다가 무적표국이라는 요란한 이름이라니.

한적한 부두에 도착한 적비연이 배를 정박해두고 물건을 정리하는 사공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노인장, 여기 배가 몇 척이나 있소?”

사공은 적비연을 힐끔거리고는 대답했다.

“소선(小船) 두 척뿐이오. 보아하니 표국에서 오신 분들 같은데 좀 더 육로를 따라 황석(黃石)까지 가신 다음 배를 타시는 게 좋을 거요.”

모르는 소리다.

만약 그랬다간 얼마 가지 못해 적비연 일행은 무림맹 추격자들에게 발각되고 말 테니.

‘당장 남동쪽으로 향해도 모자랄 판에 반대로 올라가라니.’

표사 역할을 맡은 임송화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투혈권왕이 어떻게든 길을 찾을 거라고 믿었다.

정말이지 겪으면 겪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으니까.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고 여긴 그 천연동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났다.

적비연은 빙백독광사의 머리뼈 일부를 잘라서 대궁(大弓)과 화살을 만들었고, 그 화살에 길게 잘라낸 내장을 연결해서 천장의 구멍으로 쏘았다.

지상으로 연결된 내장을 타고 올라간 적비연이 흑천투권공으로 구멍을 넓혔고, 나머지 무인들도 그 내장을 밧줄 삼아 타고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천연동굴을 벗어나니 확실히 무림맹의 감시망이 느슨해졌다.

아니, 무림맹의 감시망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리라.

일단 추혼단주를 비롯해 추혼단 절반을 전멸시킨 것이 주효했다.

무림맹은 이제 투혈권왕이 아니라 추혼단을 찾아야 하는 엉뚱한 상황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은 빠르게 북동쪽으로 내달렸다.

통산(通山)에 다다랐을 때부터는 동굴에서 가지고 나온 야명주를 암시장에 내다 팔고 배와 수레 등을 사들여서 표국으로 위장했다.

적비연은 표두, 다른 무인들이 표사를 맡았다.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대담하게 움직이니 주변의 의심은 줄어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명의 무인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몸을 숨기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도주자들이 이렇게 백주대낮에 보란 듯이 다닐 줄을.

그것도 무적표국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내걸고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패기 어린 부자가 요란한 이름을 내걸고 신생 표국을 하나 세웠나 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렇게 장강까지 왔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장강을 따라 내려가서 동남쪽의 구강현(九江县)으로 가야 한다.

그럼 이 지긋지긋한 도주행도 끝이 난다.

구강현은 흑천련 권역이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적비연은 장강을 건너서 무혈현으로 가고자 했다.

한마디로 바로 옆에 안락한 집이 있는데, 굳이 가시밭길을 건너서 호랑이 굴에 더 머물겠다는 소리다.

이에 적비연은 이렇게 말했다.

“호북 경계에 무림맹 무인들이 밀집해 있어. 지금 바로 구강현으로 가고 싶은 충동과 유혹이 들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사지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지. 진짜 안전하게 이동하려면 당장 유혹을 참아야 해. 좀 더 이 압박감을 견뎌야지. 그래서 우리는 무혈현으로 간다.”

누군가 반대하며 나설 법도 하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지금껏 적비연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까.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적비연이 사공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급히 옮겨야 할 물건이 있어서 황석까지 올라갈 수가 없소. 배를 구해서 건너게 해주면 사례는 넉넉하게 해드리겠소.”

잠깐 멈칫거린 사공이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얼마나 사례를 하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배를 구하는 게 그리 말처럼 쉬운…….”

절그럭!

적비연이 노인 옆으로 돈주머니를 툭 던졌다.

흠칫거린 노인이 돈주머니를 주워 들고는 풀어보았다.

곧 노인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 이걸 다……?”

“그만하면 어디서 배를 빌리기에 충분하지 않겠소? 무사히 건너면 그만한 액수를 더 드리리다.”

노인의 표정이 대번 바뀌었다.

예의 그 퉁명스러운 반응은 이제 찾아볼 수도 없었다.

“무척 바쁘신 분들 같은데 잠시 기다려 주시면 제가 얼른 배를 구해봅지요.”

“고맙소.”

“별말씀을요.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요.”

노인이 얼른 자리를 비웠다.

적비연과 일행은 부둣가에서 짐을 정비하면서 노인을 기다렸다.

“저 노인네가 무림맹 사람은 아니겠지요?”

엽강호가 옆으로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어떻게 아십니까?”

“강동칠괴 기억 때문에. 자주 여길 이용했으니까.”

“아…….”

노인은 이기적이고 돈 욕심이 많은 자다.

살 만큼 살아서 그런지 모험심도 강한 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강동칠괴를 진작 무림맹에 고발했을 거다.

그래도 강동칠괴가 살아 있을 때는 노인에게 짭짤한 수입을 가져다줬을 텐데, 지금은 그 수입이 사라졌으니 이 기회가 얼마나 반가울까?

한편 노인을 기다리는 동안 여추백은 장강의 도도한 물결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반 대주님…….’

반철룡이 호법장이 된 지는 한참이 지났지만 지난 세월 그는 반철룡을 오랫동안 대주로 대했다.

그래서 호법장보다는 대주라는 호칭이 더 입에 붙었다.

반철룡의 죽음은 충격 그 자체였다.

벽력적가주의 인피면구를 벗겼을 때 그의 얼굴이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도대체 제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반철룡이 벽력적가주 행세를 하다니.

혹시 사악한 사술에 걸린 게 아닐까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사파 무인이 사악한 사술에 걸려?

이게 말인가? 방귀인가?

하지만 이런 엉뚱한 상상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 현상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개를 들어 투혈권왕을 보았다.

반철룡을 죽인 자.

그런데 이상한 것은 투혈권왕에게서 최근 반철룡의 냄새가 난다.

‘반 대주님. 이렇게 가버리시면 저는 어쩌라는 겁니까? 도대체.’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무림맹 사절단이 오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된 느낌이다.

그 전까지는 평화롭기만 하던 강호가 이제 보이지 않는 힘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여추백이 뭔가에 이끌린 듯 적비연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서 뭘 하려고 그러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끌려 다니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뭐라도 해야겠다.

“주군.”

마침내 적비연 곁에 선 여추백이 무거운 목소리를 꺼냈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반면 적비연은 묵묵히 강만 바라본 채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반 대주…… 아니, 반 호법장님이 벽력적가주의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제일 궁금한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라도 다른 무인들이 들을 것을 생각해서 전음으로 물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었어.”

반철룡의 눈동자가 커졌다.

뜻밖의 대답이다.

여추백의 전음이 빨라졌다.

[왜 반 호법장님이 벽력적가주를……! 어떻게 된 건지도 알고 계십니까?]

여추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반철룡이 벽력적가주의 첩자였다면 투혈권왕은 어째서 그를 사예린으로부터 보호했단 말인가?

적비연이 돌아서서 여추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나를 무조건적으로 따른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 목숨들을 내게 맡기겠다고 했다. 맞나?”

[그렇습니다!]

“내가 흑천이 아닌 다른 하늘을 꿈꾸고 있다고 해도?”

[물론입니다!]

이미 동굴에서 어느 정도 각오한 바였다.

적비연의 말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단, 반철룡의 죽음에 대한 의문만 확실히 풀린다면.

잠시 후 적비연이 전음으로 놀라운 말을 전했다.

[반 호법장과 나는 같은 강호를 꿈꾸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와 반 호법장은 애초에 같은 분을 섬기고 있었다. 이 강호를 바꿀 수 있는 분.]

[그게…… 대체 누굽니까?]

흑천련주는 아니리라.

흑천련주였다면 애초에 반역 모의를 연상케 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짐작 가는 바는 있다.

하지만 정말로?

적비연의 이어진 말이 그 가정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다.

[바로 위대하고 강하신 벽력적가주님이시다.]

-왜 안 나오나 했다. 이제 슬슬 그 소름 끼치는 자기 과시가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시끄러워.’

적비연이 극마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는 여추백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약 제대로 설득이 안 된다면 언젠간 제거해야 한다.

-잔인하구먼.

‘어쩔 수 없어.’

뜻이 다른 자와 강호를 누빌 수는 없다.

‘그래도 옛정이 있으니 단전을 폐쇄하는 정도로 괜찮겠지. 뭐, 그 정도까지도 안 가길 바라지만.’

마침내 여추백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적비연을 보았다.

[대체…… 벽력적가주가 원하는 강호가 무엇입니까? 그게 무엇이기에 반 대주님과 주군이 그를 따르는 겁니까?]

[강호일통.]

[그런……!]

[허황되다고 생각하나?]

[그건……!]

여추백이 말을 잇지 못했다.

흑천련주도, 무림맹주도 이루지 못한 강호일통을 꿈꾼다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여추백이 고개를 들고 물어보았다.

[벽력적가주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 겁니까?]

[없다면?]

[예?]

[없다면 날 따르지 않을 생각인가?]

[아, 그건 아닙니다. 주군께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만큼은 거짓이 아닙니다.]

적비연이 여추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추백 역시 그런 적비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인 모양이군.’

-그래도 적가장에서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게 주인 덕분이니까 그렇겠지.

하긴.

자신이 아는 여추백은 신의를 중시하는 자였다.

더구나 반철룡과 자신이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니 오히려 호감을 사면 샀지, 반감은 없으리라.

-이제 또 자기 자랑을 할 차례군.

극마의 말대로 적비연이 전음을 보냈다.

[내가 아는 한 벽력적가주님보다 더 큰 가능성을 지닌 분은 없다. 의아하겠지. 왜 하필 정파 무인을 따르는지. 하지만 그분은 정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 분이야말로 강호일통의 자격이 있지 않겠나?]

[그분이 흑천련주님보다도…… 대단하십니까?]

적비연의 표정에 살짝 그늘이 졌다.

이윽고 그의 입이 떨어졌다.

[가능성만큼은 더 큰 분이시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여추백이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음? 이걸로 끝? 너무 간단한데?

-그러게. 저 녀석 의외로 쉬운 놈일세.

고개를 든 여추백이 적비연을 보며 말했다.

[제가 믿고 따르던 반 대주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 대주님이 주군을 섬기기로 했습니다. 한데 주군이 벽력적가주님을 따르시겠다니, 저 역시 따를 뿐입니다.]

응. 그게 다 나야.

적비연이 생각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널 믿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이나 허공에서 얽혔다.

잠시 후 노인이 제법 너른 배를 구해서 돌아왔다.

일행은 배에 가짜 물자를 싣고 장강을 건넜다.

적비연은 약속대로 사공에게 넉넉한 돈을 챙겨주었다.

무혈현 으슥한 강기슭에 도착한 일행은 가짜 물자를 내팽개치고는 빠르게 이동했다.

무혈현 외곽의 관제묘에 도착하자 엽강호가 물었다.

“오늘은 여기서 묵는 겁니까?”

“그럴 리가.”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관제묘의 촛대를 각각 다른 방향으로 눕혔다.

그러자 놀랍게도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드러났다.

“가자. 오늘은 모처럼 편한 잠자리가 될 거다.”

적비연을 따라서 무인들이 지하 통로로 우르르 들어갔다.

모두 들어가고 나자 관제묘의 지하 통로 입구가 거짓말처럼 닫혔다.

적비연을 따라 걷는 여추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설마 이것도 벽력적가주의 안배인가? 도대체 벽력적가주는 어떤 사람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