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나를 따르라
창밖으로 장강이 흐른다.
해는 서쪽 강줄기 너머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물빛은 황금을 품은 색이 되었다.
‘이리도 아름답다니.’
임송화는 하염없이 창밖을 응시하면서 감상에 젖어들었다.
탁자에 둔 찻잔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흐느적거리듯 피어오른 김이 엷게 흩어져가는 모습은 지금의 여유를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무림맹 권역에서 이런 여유라니.
도주자의 신분을 잊게 만들 정도다.
‘미쳤어, 정말 미쳤어.’
임송화의 시선이 저만치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는 적비연에게 향했다.
어딘지 그윽한 눈으로 강물을 바라보는 적비연.
물론 그녀에게는 적비연이 아닌 투혈권왕의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다.
관제묘 지하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길게 이어진 땅굴을 통해 어디 허름한 전각에서 오늘 밤을 보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뭔가?
창밖으로는 장강이 흐르고, 바로 아래로는 사람들이 북적한 골목이다.
강변객잔(江邊客棧).
지금 적비연 일행이 머물고 있는 장소의 정식 명칭이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객잔.
무혈현 부두 근처에 즐비한 객잔들처럼 장강을 바로 볼 수 있으며, 술과 음식 그리고 잠자리를 제공한다.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말밖엔.’
미로처럼 얽힌 지하통로를 적비연은 능숙하게 찾아갔다.
일행이 다다른 곳은 굳게 닫힌 철문 앞.
철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자 상단 일부분만 슥 열리더니 한 사내의 눈이 빼꼼 드러났다.
눈동자는 적비연 일행을 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마치 불청객을 보기라도 한 듯.
하지만 적비연이 ‘강호에서 낚이지 않는 물고기’라는 암어를 던지자 사내의 표정이 달라졌다.
곧 철문이 열리면서 우람한 덩치가 드러났다.
그렇게 그를 따라 이동하니 이곳 강변객잔으로 오게 된 것이다.
물론 나중에는 적비연의 설명으로 알았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왜 자신들이 이런 곳에 태연히 머물 수 있는 건지.
강호는 정과 사로 양분되었지만, 인간이란 길이 있으면 걷기 마련 아니던가?
정파의 무인이 사파 권역으로 들어설 때도 있고, 사파 무인이 정파 권역에 들어설 때도 있다.
특히 강동칠괴처럼 정사의 권역을 넘나드는 자들도 있었다.
이럴 때 무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했다.
이곳 강변객잔이 바로 그런 시설 중 하나다.
정파 소속이 아닌 무인들이 경계를 넘어왔을 때, 몸을 안전하게 숨길 수 있는 곳.
무인들 사이에서 안가(安家)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리고 강변객잔은 강동칠괴가 자주 애용하던 안가였다.
물론 강변객잔에서도 투혈권왕이 이곳을 찾을 줄은 전혀 몰랐기에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보통 안가는 강동칠괴처럼 개별 활동을 하는 무인들 중심으로 암암리에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참 미친 능력이야.’
임송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쫓기거나 말거나 일단 눈에 보이는 풍경이 한가로우니 마음은 편안했다.
적비연의 말대로 무혈현은 오히려 경계가 허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주자들이 일부러 강 건너 무혈현까지 올 거라고는 무림맹도 상상조차 못할 테니까.
임송화는 적비연을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언뜻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돌렸다.
‘나도 미쳤지. 미쳤어.’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진짜 미쳤나 보다.
하천웅에게 마음이 흔들린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지금 왜 투혈권왕을 보면서 설레고 있나?
처음에는 이런 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마음이 하천웅을 바라볼 때와 닮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실 이번 도주행을 겪으면서 그 감정이 더 커졌다.
‘정말 미치겠네. 그럼 도대체 벽력적가주는 얼마나 대단하단 거야?’
임송화가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가에 도착한 후 적비연은 임송화와 현청을 불러서 여추백에게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적어도 사절단으로 같이 왔던 두 사람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았기에.
때문에 임송화는 지금 이 모든 일에 적비연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도 깨달았다.
어째서 하천웅과 반철룡, 그리고 투혈권왕에게서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인지.
세 사람의 연결 고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벽력적가주였다니.
‘그럼 내 마음은 벽력적가주에게 흔들리는 걸까? 아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미쳤네, 임송화 진짜 미쳤어.’
그녀는 또 한 번 고개를 흔들었다.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설렌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뭘 그렇게 혼자 생각하십니까?”
어느새 현청이 다가와 물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해서인지 현청도 이젠 임송화를 꽤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 그냥…… 생각이 복잡해서요.”
“하긴 그럴 만도 하죠. 저도 놀랐으니까요.”
임송화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투혈권왕이 적 가주님을 섬긴다는 게 진짜 뜻밖이었죠?”
“그것도 좀 그랬지요. 아무리 련 내 세력이 약했다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전 그보다 다른 이유로 더 놀랐습니다.”
“뭔데요?”
“우리 두 사람을 콕 집어서 불렀잖아요. 그리고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 두 사람에게만 알려주었죠.”
“아!”
그제야 임송화가 외마디 비명처럼 탄성을 터뜨렸다.
주변 무인들이 슬쩍 보았지만 이내 관심을 끄고는 시선을 돌렸다.
임송화가 힐끗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여전히 창가에서 골목길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왜 난 그 사실에 집중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아슬아슬한 게 간자 생활이라지만, 이것도 오래하면 적응되니까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거죠.”
“그래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요. 왜 도사님과 저만 불러내서 그런 말을 해준 걸까요? 설마 우리가 무림맹 소속이라는 걸 눈치챈 걸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럴 만한 흔적은 남기지 않은 것 같은데. 왠지 우리 정체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도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뜻을 함께하실 의향이 진짜 있어요?”
“글쎄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죠. 아직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습니다. 소저는?”
임송화의 시선이 적비연에게 또 향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일단은 따라가려고요.”
“일단은?”
“네. 벽력적가주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졌어요. 그를 직접 만날 때까지는 다른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그 말의 무게를 아십니까? 작금의 사태를 보면 무림맹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무림맹이 적가장에서 한 행동을 보면…….”
“알아요. 그래서 더 따라가 보고 싶어요. 벽력적가주는 무림맹처럼 날 이용하진 않았으니까요. 이건 그저 내 결정인 거죠.”
잠시 임송화를 바라보던 현청이 곧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이럴 땐 가끔 부럽습니다.”
“뭐가요?”
“왠지 복잡한 문제도 임 소저에게는 쉬운 것처럼 보여서요.”
“지금 저 단순하다고 놀리는 거죠?”
“아,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전 그저 진심으로…….”
현청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당황하자 임송화가 풋 웃었다.
“이래서 도사님은 모든 문제가 어려운 거예요.”
“무슨 뜻인지……?”
“틀에 갇혀서 꽉 막혀 있다고요. 보세요. 지금도 농을 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잖아요? 이런 분이 어떻게 간자가 되셨대? 간자의 기본 덕목이 사고의 유연성이죠.”
“하하. 그렇습니까?”
“그럼요. 조금 더 단순하면서도 유연하게 생각해 보세요.”
임송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듯 말했다.
하지만 현청에게 그 말의 울림이 조금 남다르게 다가왔다.
“부족한 점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저.”
포권까지 하며 인사하자 임송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봐. 꽉 막히셨다니까.”
현청이 빙그레 미소 짓고는 창가에 앉은 적비연에게 시선을 던졌다.
‘나도 일단은 당신의 뜻을 한 번 보고 싶어졌습니다.’
한편 두 사람의 시선을 받는 적비연은 창밖의 골목을 하릴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그가 보는 것은 한 소년과 소녀였다.
꼬질꼬질한 두 아이는 골목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철전 한 닢이라도 받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 모습이 적비연에게 묘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투혈권왕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었다.
사예린과 함께 뒷골목을 누비며 배수 짓을 하던 시절.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손가락을 빨던 시절.
생존에 대한 열망으로 독기를 넘어 악기까지 품던 그 시절.
당시 투혈권왕의 감성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닿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이.
생존을 위협하는 조그마한 뭔가가 있다면 악착같이 싸웠다.
삶 자체가 전쟁이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본능에 내맡겨진 삶.
그렇게 명줄을 이어갔다.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사예린이었다.
부모형제가 없는 그로서는 뒷골목에서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된 사예린이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흐음.”
확실히 새로운 육신을 얻게 되면 그 육신의 기억에 가장 함몰하게 된다.
자아를 침범할 정도는 아니지만 많은 영향을 주는 건 사실이다.
‘참 강호의 일은 알다가도 모른다더니.’
사예린과 그런 사이였을 줄이야.
늘 풍요롭게만 살아왔던 자신이었기에 이러한 기억을 흡수할 때마다 사고의 폭이 확장되는 게 느껴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을 느낄 때마다 생각의 깊이도 달라진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무공의 성취에도 영향이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사예린은 무사히 돌아갔을까?
공교롭게도 가후가 남쪽을 맡았다.
물론 추격의 신이라는 추혼단주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만, 가후의 지략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필 골목길에서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았기 때문인지 적비연은 사예린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장강은 그 질문마저 삼킨 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도도하게 흐르기만 했다.
* * *
건너편 무혈현을 바라보는 장강의 부두.
적비연이 배를 타고 건너갔던 곳.
그곳에 한 무리의 무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두 한쪽에 지어진 창고 안에는 간이탁자 위에 큼직한 지도를 펼쳐둔 가후가 있었다.
한 사내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반경 십 리 이내를 샅샅이 뒤졌지만 사공은 보이지 않습니다!”
“흐음.”
가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명 이곳 부두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하지만 사공이 사라졌다.
‘사공이 제 발로 사라졌거나, 제거당했거나.’
만약 제 발로 사라진 거라면 이런 쪽으로 경험이 꽤 있는 자이리라.
그렇다면 어리진 않을 테고, 노인일 것이다.
이런 경험이 처음도 아닐 테고.
한 명이 더 달려와 보고했다.
“추혼단주 사망! 추혼단 일 대에서 오 대 전멸!”
“허!”
가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니, 그건 어이없는 웃음에 가까웠다.
투혈권왕을 쫓던 추혼단이 전멸해?
‘듣던 것과 좀 다르군. 투혈권왕.’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쉰 가후가 천천히 눈을 떠 지도를 살폈다.
도주자들은 곧장 경계지로 가지 않았다.
접경지대에 무림맹 병력이 대거 배치되었을 거라는 걸 안 것이다.
그래서 굳이 장강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한데 장강에서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코앞이 흑천련 권역인데.
‘설마…….’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가후가 창고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의 시선이 강 너머 무혈현으로 향했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남았다?’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렇다면 장단을 맞춰줄 수밖에.
그가 걸음을 옮겨 한쪽에 세워진 마차로 향했다.
마차는 특이한 모양이었는데, 사방이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출입구는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가후가 마차를 보며 읊조리듯 말했다.
“이번엔 당신이 좀 도와줘야겠소. 월희마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