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71화 (172/301)

171. 낚시

장막(帳幕) 안에 여섯 사람이 있었다.

탁자에 놓인 지도를 보면서 장고(長考)에 잠긴 이는 무림맹 총군사 가후였고, 그런 그를 묵묵히 기다리는 다섯 명은 추혼단 육 대주부터 십 대주였다.

펄럭!

마침 장막이 젖혀지면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얼핏 도라고 생각될 정도로 기다란 대검을 패용한 그는 바로 검영대주 명부천(明夫穿)이었다.

일전에 벽력적가를 포위하고 총공격을 감행했던 조직이 바로 검영대였다.

“놈들이 오히려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가다니. 어지간히 추혼단이 우스웠나보군요.”

말에 가시가 있다.

추혼단 대주들이 눈을 치뜨고서는 명부천을 노려보았다.

명부천이 굵직한 눈알을 부라리며 으르렁거렸다.

“뭘 야려? 추혼단도 이젠 예전만 못하다니까. 이백오십 명이 고작 서른 명도 안 되는 것들을 잡지 못해서 이 난리라니. 역대 추혼단주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말씀이 지나치시오!”

육 대주가 발끈해서 나서자 명부천이 입매를 치켜들고 바짝 다가섰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지나치긴. 나서기만 하면 뭐든 다 해낼 것처럼 굴던 놈들이.”

육 대주를 노려보는 명부천의 눈빛에는 시기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영대가 뭐만 하려고 하면 추혼단이 먼저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적가장에서 검영대가 놓치니 곧바로 추혼단이 투입되지 않았나?

이런 식으로 추혼단이 공을 가로챈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참에 제대로 한풀이를 하는 것이다.

육 대주가 살기 어린 눈으로 명부천을 쏘아보았다.

“지금 말 다 하셨소?”

“아니. 아직 다 안 했지. 너 이 새끼들, 위아래가 없어. 대주라고 다 같은 대주인 줄 알지?”

“이익……!”

육 대주가 어금니를 뿌득 갈면서도 나서지 못했다.

명부천의 말대로 다 같은 대주가 아니기에.

검영대와 같은 별동대는 단에 소속된 대보다 상급 조직으로 봐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계급상 육 대주가 검영대주보다 아래인 셈.

육 대주의 얼굴 앞으로 바짝 다가선 명부천이 눈을 내려 깔고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이러니까 그 모양이지. 위에 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잘난 척 설쳐대기만 하니 전부 뒈질 수밖에.”

육 대주가 주먹을 콱 틀어쥐고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명부천을 쏘아보았다.

“눈 깔아, 이 새끼야.”

“……!”

“눈 깔아.”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막사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 얼음장 같은 침묵을 깬 것은 총군사 가후였다.

“그만하지.”

장고에서 깨어난 가후의 음성에 명부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군사님.”

“됐네. 그쯤하게. 추혼단 절반이 전멸한 건 안타깝게 됐지만, 육 대주의 문제는 아니지.”

어딘지 육 대주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에 검영대주는 심기가 불편했다.

하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낼 만큼 어리석진 않다.

무림맹에서 총군사가 가진 지위는 절대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명부천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짐짓 큰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나름 허를 찔러서 무혈현에 남았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장강을 타고 오가는 배만 검열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루에 오가는 배만 수십 척일세. 그 배를 다 감시하려면 범선 수십 척을 띄워 벽을 쳐야겠지.”

“까짓 그러면 안 됩니까? 이참에 본 맹의 위엄을 보여줄 겸.”

가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럴 때의 표정을 보면 영락없이 인자한 서생의 미소다.

하지만 명부천은 알고 있다.

저 한없이 포근한 미소 속에는 누구라도 벨 수 있는 예리한 소도(小刀)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자네는 늘 감정이 앞서고 서두르는 경향이 있어. 주의하게.”

척!

“명심하겠습니다!”

명부천이 포권을 취하며 깍듯하게 대답했다.

가후가 이렇게 주의를 준다는 것은 듣기 좋은 조언을 한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충고다.

한마디로 아슬아슬한 선을 탔다는 말이다.

이제부터는 말 한마디도 신중해야 하리라.

하지만 가후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장강에 범선으로 벽을 치면 놈들이 꼼짝이라도 할까? 배를 타고 이동한다면 걸러내지 못할 이유야 없겠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제 발로 걸려들 리가 만무하지.”

“생각이 짧았습니다.”

“범선은 한 대로 충분하네.”

“……?”

명부천은 물론 추혼단의 다섯 대주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후가 말을 이었다.

“그들이 무혈현에서 강을 타고 이동하기로 결심했다면 우리는 모른 척해주는 게 최선일세.”

“그러다가 자칫 놓치기라도 하면…….”

명부천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가후가 고개를 저었다.

“금목원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월희마녀와 투혈권왕은 어려서부터 동고동락한 사이더군.”

“하나 지금은 서로 실권을 놓고 대립하는 구도가 아닙니까?”

“글쎄. 대립이라. 금목원 정보에 의하면 두 사람은 딱히 대립 구도로 보긴 어려워. 실세 격차가 너무 크니까.”

“그렇군요. 한데 그게 지금 투혈권왕을 잡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그때 장막이 걷히더니 또 다른 인물이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칼로 깎아놓은 것처럼 반듯하게 생긴 얼굴.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장강에서는 낚시를 해야 제맛이란 말씀.”

그는 바로 혈천단주(血天團主)인 살소공자(殺笑公子) 자휘겸(紫輝兼)이었다.

그의 웃음은 묘하다.

뭇 여성들을 홀리기에 충분한 미소지만 어딘지 차갑고 소름 끼치는 면이 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표정과 달리 내뱉는 말투에는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살소공자로 불리는 자휘겸의 특징이다.

“혈천단주……!”

명부천이 신음처럼 읊조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섯 대주들도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혈천단주까지 올 줄이야.

혈천단.

무림맹 최고의 타격단이다.

추혼단과 더불어 무림맹 최고의 삼 대 조직 중 하나.

추혼단이 추격의 신이라면, 혈천단은 무력의 신이다.

오죽하면 혈천단이 지나가는 곳은 그 이름처럼 하늘이 핏빛으로 물든다고 할까?

그런 혈천단이 왔다는 것은 가후가 투혈권왕을 절대 놓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하긴 추혼단을 부를 때부터 알아봤다.

한데 혈천단주까지 부를 줄이야.

언제나 효율성을 따지는 가후가 아니던가?

가장 적은 힘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두는 것이 가후가 추구하는 바였다.

한데 이 정도라면…….

명부천의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살소공자가 그대로 꺼낸 듯 말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시는 게 아닌지.”

가후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게.”

“혈천단이 군사님의 명을 받들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 사람이 오자마자 소, 닭 이야기를 하는가?”

“그저 얼마나 큰 소인지 궁금했을 따름.”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네. 그것이 정말 소일지, 닭일지. 아니면 범일지.”

살소공자의 눈이 묘하게 휘었다.

웃는 것 같지만 뭔가 생각에 빠진 것 같은 표정.

“흥미롭군요. 군사께서 판단보류를 하시는 건 극히 드문 경우. 추혼단주 사망 소식을 믿기 어려웠는데 보통 일은 아니신 듯.”

“추혼단주 성격상 방심하진 않았을 테고. 이쯤 되면 닭은 아니겠지.”

“뭐, 추혼단이 그간 과한 명성을 얻은 것일지도. 그러다 보면 제아무리 추혼단주라도 방심할 수도.”

“단주님은 그런 틈을 두시지 않습니다!”

아까부터 추혼단을 은근히 깎아내린 명부천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던 육 대주가 불쑥 나섰다.

‘저 미친……!’

명부천이 아찔한 표정으로 육 대주를 보았다.

그가 얼른 가후를 돌아보았다.

가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명부천은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말릴 생각이 없으시다!’

아니나 다를까, 살소공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육 대주를 보았다.

“그쪽은?”

“추혼단 육 대주입니다.”

육 대주가 살소공자를 빤히 마주 보았다.

명부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미친 새끼…….’

살소공자의 왼쪽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끝났다.

살소공자는 늘 오른쪽 입매가 올라갔다.

그가 왼쪽 입매를 치켜 올리는 순간에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된다.

가후의 미소에 소도가 숨었다면, 살소공자의 미소에는 대도가 숨어 있다.

살소공자가 명부천을 보며 말했다.

“대주 말마따나 확실히 기강이 해이해진 듯. 위아래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판단력이 흐려졌으니 그런 실수를 할 수밖에.”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육 대주가 다시 나섰다.

“추혼단주님이 살아 계셨더라도 이렇게 본 단을 능멸……!”

쒸이잉! 파앗!

순간 한 줄기 섬광이 날아가더니 육 대주의 무릎을 베며 지나갔다.

곧이어,

“끄아아아악!”

육 대주가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아니, 꿇은 것이 아니라 넘어졌다고 봐야 하리라.

놀랍게도 육 대주의 오른쪽 무릎이 완전히 절단된 것이다.

엎드려서 절규하는 육 대주에게 살소공자가 걸어갔다.

“다음부터 보고할 때는 그렇게 한쪽 무릎을 꿇도록.”

하지만 이제 육 대주가 보고할 일은 없으리라.

이는 육 대주에게만 하는 충고가 아니다.

명부천을 비롯한 다른 대주들에게 일괄적으로 내리는 충고다.

가후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뭣들 하는가? 옮기지 않고.”

“아, 옛!”

칠 대주와 팔 대주가 얼른 육 대주를 부축해서 장막 밖으로 나갔다.

살소공자가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분위기가 어수선하기에 좀 정리를.”

“자네 덕분에 더 어수선해진 것 같군.”

“이런. 그럼 다음에는 깔끔하게 죽이는 걸로.”

“차라리 그러든지.”

가후의 말에 살소공자가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가후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자네 말대로 낚시를 해볼 생각이야.”

“미끼는 오는 길에 봤습니다.”

사라라랑.

살소공자가 품에서 흑월아를 꺼내 펼쳐 보였다.

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은잠사에 엮은 비도술을 사용하니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네.”

“매우 마음에 듭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아직은 다섯 자루를 동시에 쓰기엔 무리지만 우선 두 자루를 이용하기로.”

조금 전 빛살처럼 날아가 육 대주의 무릎을 절단한 것도 바로 은잠사에 연결된 흑월아 한 자루였다.

가후가 말했다.

“범선 한 척에 검영대와 미끼만 태울 걸세. 놈들이 나타나면 검영대가 시간을 끌 것이고, 그사이 자네가 나타나 마저 처리하면 되네. 그러는 동안 출항한 범선들이 일제히 놈들을 포위할 것이고.”

“알겠습니다. 검영대주는 부디 내가 갈 때까지는 버티도록.”

‘네가 오기 전에 이 몸이 직접 처리해 주마!’

명부천은 속생각을 삼키는 대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후가 미소 지었다.

“아무리 자네라도 방심하지 마. 추혼단주를 죽인 자야.”

“부디 염려놓으시길.”

살소공자가 예의 그 섬뜩한 미소를 얼굴 가득 그렸다.

* * *

“타고 갈 범선이 한 척 마련됐고, 의뢰한 일도 마쳤소. 도합 십만 냥이오.”

엄청난 금액.

하지만 적비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신세 지고 맡긴 일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적비연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전표를 건네주었다.

“고맙소. 그런데…… 여긴 어찌 아셨소?”

그는 아무래도 투혈권왕이 안가를 알고 있다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적비연이 대충 둘러댔다.

“친구에게 들었네.”

주인장도 더는 묻지 않았다.

객잔을 나온 적비연은 일행을 이끌고 범선에 올라탔다.

평범해 보이는 범선.

장강을 오가는 수십 척의 범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외형이다.

무혈현과 구강현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장강을 따라 조금만 나아가면 된다.

적비연 일행이 오른 배가 출항하자 인근의 여러 척 배가 함께 출항한다.

이 역시 안가에서 돈을 받고 의뢰대로 준비한 것이다.

갑판으로 나온 엽강호가 옆에서 기지개를 켰다.

“드디어 완전히 벗어나는군요.”

“글쎄. 생각보다 너무 수월한 게 좀 걸리네.”

지금쯤이면 가후가 무혈현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엽강호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범선이 진 치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니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아까부터 강 복판에 떠서 꿈쩍도 하지 않는 범선 한 척을 유심히 보았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지. 저쪽에서 미끼를 준비한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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