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낚시
구오오오……!
선실에 정좌를 하고 앉은 적비연은 벌써 두 시진째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지독한 한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한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주변은 온통 서리가 내려앉았고,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은 얼음으로 굳어 버렸다.
눈썹과 인중에도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런 적비연 앞에는 주먹만 한 구슬이 놓여 있었는데 미세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바로 빙백독광사의 내단이었다.
내단에 균열이 갔다는 것은 적비연이 그 기운을 흡수했다는 뜻.
주위로 지독한 한기가 팽배해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래 빙백독광사의 내단을 이렇게 빨리 흡수할 생각은 없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라고,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천천히 흡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정이 바뀌었다.
강심(江深)에 떠 있는 범선.
그곳에 사예린이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지가 활짝 펼쳐진 채로 검은 쇠사슬 같은 것에 묶여서 돛에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사지를 구속하는 검은색 쇠사슬은 공력을 억제하는 흑진철(黑鎭鐵)이리라.
흑진철은 공진철처럼 공력을 억제하는 기능의 금속인데, 보다 더 단단한 강철로 이루어져 있다.
무림맹의 추격이 끊어진 이유다.
그들은 굳이 인력과 심력을 낭비하면서 추격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저렇듯 강심에 미끼를 던져두고 걸려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사실 미끼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노골적인.
어디 구할 수 있다면 구해보라는 듯.
그래서 단 한 척의 범선만 띄운 것이다.
만약 진짜 투혈권왕이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갔으리라.
투혈권왕의 기억을 가진 적비연은 그 마음을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억이 자아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타아로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감정적으로 휩쓸릴 정도는 아니다.
적비연은 감정을 밀어내면서 생각했다.
사예린을 보고도 그냥 귀환할 것인가? 아니면 구할 것인가?
말들이 많았다.
그냥 가자는 의견을 내는 무인들도 있었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무인들도 있었다.
그냥 가자는 의견을 낸 자들은 대부분 사예린과의 껄끄러운 관계를 꺼내 들었다.
어차피 후계자로서 실권을 다투는 사이니까 이 기회에 정적을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건 투혈권왕과 사예린의 과거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두 사람은 단순히 정적이라는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사이다.
물론 적비연이 그 기억들에 함몰되지는 않았지만, 현재로선 가장 자아에 가까운 감정이긴 했다.
그렇다고 감정에 이끌려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결국 적비연이 그녀를 구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감정보다는 이성의 판단이었다.
만약 그녀를 이곳에 버려두고 귀환한다면?
흑천련주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사예린과 투혈권왕의 끈끈한 과거를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번 임무를 대차게 실패한 셈이 되니, 금의환향은커녕 제대로 대접도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
실권 다툼?
그게 걱정이라면 실권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사예린을 구하는 게 맞다.
그 결론에 엽강호는 넌지시 걱정을 비쳤다.
“후일 이 공녀가 주군의 발목을 잡진 않을까요?”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반철룡의 몸으로 지낼 때 이야기지. 하지만 지금은 다른 장이 펼쳐졌어. 오히려 이번에는 사예린이 내 힘이 될 수도 있을 거야.”
엽강호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적비연은 빙백독광사의 내단을 흡수하는 중인 것이다.
적들이 저렇게 대놓고 미끼를 내걸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
투혈권왕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했을 것이고,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으리라.
물론 적비연은 지금 저들이 생각하는 수준을 뛰어넘은 상태.
현재 초절정 육 단을 앞두고 있으며, 공력만큼은 무공 수위에 비해 넘쳐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걸로 부족할 수 있다.
상대는 교패도 두려워한 가후가 아니던가?
그저 사람 좋은 군사로만 여겼던 게 큰 착각이었다.
적비연은 흔들리는 선실에서도 돌처럼 굳은 자세로 꿈쩍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숨결이 희미하게 들락거린다.
손등을 따라 혈관이 불거져 나오면서 거뭇한 뭔가가 흐르는 것이 보인다.
불거져 나온 혈관이 점점 뻗어 나가면서 목을 타고 얼굴까지 뻗친다.
어딘지 섬뜩한 모습.
혈맥을 따라 질주하는 독기가 각 요혈을 지날 때마다 그 기운이 배가 되는 듯하다.
툭, 투둑……!
전신 혈맥이 독기에 뚫린다.
하지만 관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점점 큰 충격을 동반한다.
한기 때문이다.
한기는 기본적으로 혈맥을 굳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기가 흐르는 통로가 자연히 비좁아진다.
그 비좁은 틈으로 독기가 시원하게 빠져나가질 못하니 주요 혈도에서 통증이 느껴질 수밖에.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체내의 한기도 함께 쌓이니 독기가 뚫고 지나가야 할 관문들은 더욱 단단해지는 셈이다.
퉁! 투웅!
정수리까지 뻗어 올라간 독기가 백회혈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인체 혈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백회혈은 쉬이 문을 열지 않는다.
쿠웅! 쿠우웅!
다시 한번 차갑게 뭉친 독기가 거칠게 백회혈을 두드린다.
그 기운의 힘이 어찌나 센지 정좌하고 앉은 적비연의 몸이 움찔움찔 떨릴 정도다.
그럼에도 꽁꽁 얼어붙은 백회혈은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일종이 보호본능이다.
하지만 그 본능이 지금 적비연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만약 독기가 백회혈을 뚫지 못하면 범람한 독기는 전신 세맥으로 제멋대로 뻗어나갈 것이고 주화입마에 걸리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어쩌면 주화입마에 걸리기도 전에 중독당해서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물러날 수 있나?
없다.
이미 빙백독광사의 모든 기운을 흡수했으니 어떻게든 소화를 해야만 한다.
적비연은 침착하게 토납법을 수행하면서 다시 한번 독기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쿵! 쿵! 꽈앙!
머릿속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듯하다.
그 충격이 어찌나 큰지 까딱하다간 의식을 잃고 까무러칠 뻔했다.
하지만 곧 혈맥을 타고 이동하는 독기를 느끼면서 정신 줄을 붙들었다.
쏴아아아아!
가장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독기는 도도한 장강의 줄기처럼 거침없이 흘러간다.
‘큰 고비는 넘겼어.’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와중에도 선실 주변은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 * *
사예린은 돛에 결박되어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죽은 듯 미동도 없었다.
“독사처럼 노려보더니 이젠 지쳤나보군요.”
검영대 부대주 노일곤(盧日崑)이 선두에 선 명부천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명부천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제아무리 독한 년이라도 며칠째 굶으면 어쩔 수 없지. 공력도 운기하지 못할 테니.”
“하긴. 그나저나 조용하군요.”
노일곤이 강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범선 수십 척이 떠 있었는데 겉으로 보면 평화롭기만 했다.
“저놈들도 골치 아프겠지.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을걸? 원래 의리라고는 없는 것들일 테니.”
“혹시 미끼를 버리고 그냥 가버리진 않겠죠?”
“모를 일이지. 그래도 총군사가 결국 나타날 거라고 장담했으니 기다려 보는 수밖에.”
“우리가 먼저 찾아 버리면 안 됩니까?”
“나도 그러고 싶다만 안 된다잖냐? 우리가 먼저 찾으면 놈들이 그냥 미끼를 버리고 가버린다나?”
“허술하게 보여서 일단은 끌어들이겠단 심산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보여줘야지. 검영대가 허술하지 않다는 것을. 본 대가 어떤 조직인지.”
“반드시 놈을 잡겠습니다!”
“아니, 잡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죽인다는 생각으로 덤벼. 놈은 투혈권왕이다. 방심할 상대는 아냐.”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워할 상대도 아니다. 본 대가 어떤 조직인지 잊지 마라. 그 잘난 혈천단주가 나설 틈도 주지 않는 게 우리 목적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애들은?”
“모두 선내에 숨어 있습니다. 다들 몸이 근질거려서 미칠 지경입니다.”
“후후. 적가장에서 처리하지 못한 걸 이번엔 확실히 해야 해.”
명부천이 주변의 배들을 훑었다.
저 배들 중에 흑천련 무인들이 탄 배가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것들. 오래도 고민하는군.”
“그만큼 자신 없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미끼라는 건 알 테니까요. 다른 병력이 올 때까지 인질을 구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판단한 거겠죠.”
“그렇다면 주제를 안단 말인데…… 그럼에도 나타난다면 나, 검영대주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봤단 얘기고.”
“그런데 놈이 정말 빙백독광사 내단을 가져갔을까요?”
“그럴 거다. 추혼단주의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빙백독광사 내단은 없었다고 했으니.”
“그럼 대주님이 놈을 잡으시면 빙백독광사의 내단까지 덤으로 얻게 되시는군요?”
명부천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설마 놈이 벌써 내단을 흡수하진 않았겠죠?”
“미치지 않고서야. 빙백독광사의 내단은 의술 지식이 상당하지 않고서야 함부로 취할 수 있는 게 아냐. 놈이 그걸 흡수하려고 한다면 십중팔구 주화입마에 걸리거나 죽어 버릴 거다.”
“미리 감축드립니다! 빙백독광사의 내단을 취하시게 된 걸!”
“하하.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구나.”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빙백독광사 내단? 그거 내가 다 빨아먹었는데.”
“……!”
명부천과 노일곤은 그 자리에서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뭐야? 어느 틈에?’
찰나,
슈팟!
노일곤이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웬 놈이냐!”
일갈을 터뜨린 그는 곧 두 눈을 부릅뜬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곧게 내지른 검신이 어이없게도 상대의 시커먼 주먹에 사로잡힌 것이다.
“매, 맨손으로…… 검을…… 잡아……?”
놀랍게도 그의 검신을 낚아챈 사람은 바로 투혈권왕 적비연이었다.
전신이 물에 젖은 적비연이 히죽 웃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사람 보자마자 인사 대신 이런 걸 들이대면 쓰나?”
다음 순간,
쩌저저적……!
검신이 시퍼렇게 얼어붙더니,
따까앙!
어이없게도 단숨에 두 동강 나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어떻게……?”
주춤 물러난 노일곤의 눈앞이 순간 번쩍였다.
쉬잇, 푹!
“커억!”
노일곤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털썩!
노일곤은 자신의 목에 박힌 검신 조각을 붙들고는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투혈권왕……!”
스르르릉!
명부천이 검을 뽑아 들고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이야.
잠영을 해서 온 것인가?
“내가 네놈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
명부천의 전신에서 뜨끈한 기운이 치솟았다.
후우우웅!
내공을 발산하자 그의 장삼 자락이 거칠게 부풀어 올랐다.
한편 적비연은 명부천에게 성큼 다가섰다.
“날 잘못 알았다면…….”
성큼성큼!
“하아아앗!”
순간 명부천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쒸아아아앙!
예리한 검기가 허공을 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명부천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아니, 쥐고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툭, 뎅그랑!
갑판에 명부천의 검이 떨어졌다.
어느새 바로 앞에 다가선 적비연이 그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고는 들어 올렸다.
“덤빌 게 아니라, 도망쳤어야지.”
명부천의 온몸이 차갑게 굳어가면서 전신의 핏줄이 검게 물들었다.
투둑, 툭!
검은 핏줄이 터질 듯 불거져 나온다.
‘크읍……! 독……?’
명부천은 백회혈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독기와 한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퍼억!
그의 머리가 수박처럼 통째로 터져 나갔다.
-화끈하네.
‘나름 사파의 정점에 선 몸에 들어와서 그런가, 손속이 잔인해지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는 사이 배 난간을 잡고 누군가 불쑥 올라섰다.
물에 흠뻑 젖은 엽강호와 한사였다.
엽강호가 갑판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벌써 요란하게 하셨군요?”
“뭐, 이제부터 더 요란하게 해야 하는데.”
적비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실 쪽에서 함성에 가까운 기합성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놈들!”
“이여어어업!”
“죽어라앗!”
검영대원들이 터진 둑 사이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마구 달려 나왔다.
적비연이 히죽 웃었다.
“환영식이 좀 격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