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74화 (175/301)

174. 살소공자(殺笑公子)

-저 말투가 재수 없는 새끼는 뭐지?

극마가 으르렁거렸다.

‘살소공자.’

-살소공자? 웃으면서 사람 죽인다는 뜻이냐?

‘그런 셈이지. 늘 웃는 얼굴이지만, 저자가 정말로 웃을 땐 반드시 피를 본다는 말이 있지.’

-허! 명색이 정파라는 놈들이 별호 꼬락서니 하고는. 하긴 원래 정파 놈들이 뒤로 호박씨 까면서 사람 죽이고 다니는 것들이었으니.

극마가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막말을 뱉었지만 적비연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대번 반박했을 거다.

인정이라곤 없이 사람 죽이는 걸 밥 먹듯 하는 게 너희 사마외도가 아니냐고.

무공을 심신수양의 일환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강함에만 집착해 약자를 찍어 누르는 것이 너희들이라고.

하지만 이젠 모르겠다.

정파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느꼈던 은근한 부조리와 위화감들.

거기에 사파로 지낸 시간들이 합쳐지니 정답은 더욱 모호해져 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불의인가?

진짜와 가짜가 섞여서 무엇이 진실인지도 모를 상황.

-뭘 복잡하게 머리 굴리고 있어? 단순하게 가라. 단순하게.

혼자만 속으로 되뇐다는 것이 극마에게도 전해졌나 보다.

적비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지금은 단순하게 생각한다.

복잡한 것은 최대한 단순하게.

지금 눈앞의 살소공자는 정사를 떠나서 당장 자신을 해치려는 적이다.

그것만 생각하는 거다.

일단 싸워서 이겨야 할 적.

-저놈 얼마나 강하냐?

‘글쎄.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최소 초절정 중단 이상이야.’

-호오, 그럼 주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상대군.

‘뭐 일단은 그런 셈이지.’

-그런데 저놈은 주인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것 같은데?

‘내가 빙백독광사 내단을 복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지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빙백독광사 내단을 복용하고 완전히 소화해냈다.

공력은 또 늘었다.

게다가 벽을 깨고 초절정 육 단으로 올라섰다.

이건 의미가 크다.

초절정 오 단부터는 단계 하나를 올리는데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윙. 윙. 윙……!

살소공자가 두 팔을 벌리고 손바닥을 펼치자 흑월아 두 자루가 손바닥 아래에서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은잠사로 연결되어 있는 흑월아는 마치 허공에 뜬 채로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처럼 보였다.

적비연은 착 가라앉은 눈길로 주변을 훑었다.

주변으로 시체가 쌓여 있고 병장기도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팍!

마침 발아래에 떨어져 있는 창끝을 발로 밟자 장창이 붕 떠올랐다.

타악!

적비연이 창을 뒤로 쳐내자 빠르게 날아간 창이 그대로 돛대를 베어냈다.

수캉!

구속되어 있던 사예린이 쓰러지는 돛대와 함께 천천히 기울었다.

절그럭!

그녀의 몸을 속박하던 흑진철도 잘려나간 돛대에 미끄러지면서 떨어졌다.

파밧!

엽강호와 한사가 얼른 몸을 날려 사예린을 부축해주었다.

몸이 축 처진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흘려냈다.

“권왕…… 넌 저자를 이길 수…… 없어. 너라도…….”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대꾸했다.

“쓸데없는 소리. 내가 너한테 등을 보일 때는 언제나 내 앞에 적을 두고 있을 때라는 걸 잊었어?”

“너……!”

사예린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흑천련에 들어오고 나서는 늘 자신에게 깍듯하게 존대했던 투혈권왕이었다.

저런 말투는 정말 오래전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그날도 너는 같은 소리를 했었지.

배수 짓을 하다가 하오문도의 눈에 띄어 입문한 지 일 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문도들은 일주년 기념이라며 모처럼 배부르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사예린과 진천도 그날만큼은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그날이었다.

사예린의 직감이 처음으로 빗나갔던 날.

비슷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하오문도들만큼은 진심으로 자신을 환영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웃고 떠들면서 그들과 함께라면 평생 가족처럼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마신 술은 축배가 아닌 독배였다.

늘 칼날처럼 예리하던 직감도 그날만큼은 녹슨 철처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술에 취한 두 사람은 곧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먼저 깬 사람은 사예린이었다.

그녀가 가까스로 의식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 명의 남자를 상대하고 난 뒤였다.

그들의 비열함에 온몸이 찢어져 나갈듯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약에 취한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술에 무언가를 탄 것인지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까딱할 수 없는 상황.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여섯 번째 남자를 받아들이고 있을 때, 당장 세상이 무너져 버리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이젠 정말 지쳐 버려서 모든 걸 끝내고 싶단 생각이 들 때, 기적처럼 진천이 깨어났다.

휘청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진천은 사예린을 둘러싸고 있던 열두 명의 남자들에게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쏟아냈다.

하오문도들도 그가 어떻게 벌써 깰 수 있었던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진천은 그날 왠지 억지로라도 잠에서 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스스로도 왜 그날 깨버렸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사예린의 간절함이 통하기라도 했던 걸까?

어쨌든 진천은 그날 다시 맹수가 되었다.

순박한 동물적 본능으로 살아가던 그가 비열한 세상의 상위포식자로 변해 버리는 순간이었다.

오래전 그날처럼 승냥이 떼가 달려들었고, 맹수는 가차 없이 승냥이들을 물어 죽였다.

분노가 실린 주먹은 역시나 가차 없었다.

일 권에 일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맹수의 포효와 함께 천둥소리가 울렸고, 승냥이들의 비명이 차올랐다.

두개골이 함몰되거나 늑골이 부러지고, 척추가 절단 났다.

그렇게 순식간에 일곱을 죽였을 때, 상처 입은 다섯 마리 승냥이는 꽁무니를 빼며 도망쳤다.

그날, 사예린은 승냥이를 쫓으려는 맹수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서 소리쳤다.

쫓지 말라고.

지금 저들을 쫓으면 결국 네가 죽게 될 거라고.

이제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어떻게든 뒷수습은 해주겠다고.

맹수는 등진 채로 씨근거렸다.

거칠게 어깨를 들먹였는데, 그 숨소리에서 울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몸을 떤 그가 묵직한 목소리를 꺼냈다.

“내가 너한테 등을 보일 때는 우리 앞에 적이 있을 때뿐이야.”

말을 마친 진천이 휙 돌아서더니 사예린을 안아 들었다.

그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가자. 어디든 가서 쉬자.”

여전히 진천은 비틀거렸지만 절대로 사예린을 놓지 않았다.

‘그날로 우린 한참 동안 도망자 신세가 됐었지.’

엽강호에게 몸을 의탁한 사예린이 기억을 더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청승맞게.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다니.

흑진철 때문에 기력이 약해진 탓이리라.

내공을 운기해서 조금이라도 기운을 차리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오래전 그날 약에 취했을 때처럼.

적비연이 살소공자를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엽강호, 한사.”

“옛, 주군!”

“이 공녀를 모시고 돌아가라.”

“주군께선…….”

“뒤따라가마.”

“……알겠습니다!”

엽강호와 한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몸조심하라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믿는다.

적비연이 무사할 것을.

두 사람이 사예린을 부축해서 난간으로 달려가니 선실에 있던 무인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어딜 도망가느냐!”

하지만 뜻밖에도 그들을 막은 사람은 살소공자였다.

“그만. 가게 둬.”

“하지만……!”

“내 말이 어려운가?”

살소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둘러보자 그제야 무인들이 흠칫거리고는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살소공자가 손을 저었다.

“됐고. 너희들도 살고 싶으면 내리도록.”

“예?”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방해되면 목숨은 내놔야 할 것.”

무인들이 어쩔 줄을 몰라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엽강호와 한사는 갑판 한쪽에 마련된 소선을 강물에 띄워놓고는 뛰어내렸다.

한편 살소공자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기를 서서히 끌어올렸다.

“그럼 경고는 충분히 했으니.”

찰나,

파앙!

압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울리더니 살소공자의 신형이 눈 깜빡할 사이에 적비연 앞에 나타났다.

정말이지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만 같았다.

손에 잡힌 두 자루의 흑월아가 곧장 적비연의 목을 치듯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적비연에게는 느릿하게 보였다.

물론 그만큼 적비연의 행동도 느려졌다.

하나 사고의 속도는 그대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반대다.

사고 속도가 증폭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보인다.

시활안이다.

어떻게 시활안이 가능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극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대충 짐작만 해봤을 뿐이다.

인간의 수명을 훨씬 초월한 경험 축적.

그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낄 때마다 사고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쨌거나 시활안이 발현되자 ‘어느 정도의 빠름’은 사실 적비연에게 난관이라고 할 수 없었다.

스팟!

흑월아 두 자루가 적비연의 목을 깔끔하게 벤다.

하지만 손끝에 걸린 감각이 없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지켜보는 무인들 모두가 적비연의 목이 잘렸다고 생각했다.

‘빠져나가……?’

오로지 살소공자만이 적비연을 놓쳤다는 걸 알았다.

흑월아가 벤 것은 적비연의 잔상이다.

팟!

어느새 적비연은 살소공자가 달려온 거리만큼이나 물러나 있다.

히죽.

살소공자의 왼쪽 입매가 치켜 올라간다.

즐겁다. 피가 끓는다.

지금까지 이토록 흥분되는 싸움을 몇 번이나 해봤던가?

한 손에 다 꼽지도 못한다.

이러니 흥분되지 않을 수가!

‘재미있군. 재미있어.’

쒸쒸이이이잉!

살소공자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양손을 활짝 펼친다.

손에서 흑월아 두 자루가 각각 허공을 찢으며 날아간다.

적비연은 몸을 숙이고 두 자루의 흑월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적비연이 귀신이라도 된 듯 흑월아 두 자루를 뚫어 버리고 내달리는 것 같다.

적비연의 흑권이 살소공자의 미소를 뭉개 버릴 듯 날아든다.

스팟!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살소공자의 안면이 스쳐 지나간다.

부우욱!

살소공자의 옷자락 일부를 찢어내면서 그대로 갑판에 내리꽂히는 주먹!

꽈과아앙!

천둥벽력이 울린다.

동시에 살소공자가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콰차차차앙!

적비연을 스쳐간 흑월아도 갑판을 부쉈다.

흑월아는 배를 완전히 부서뜨릴 기세로 갑판을 길게 가르면서 살소공자에게 끌려왔다.

쿠콰콰콰콰!

“크억!”

“으아악!”

비수로 변해 버린 파편은 완벽한 살상무기가 됐다.

팔뚝만 한 굵은 파편부터, 바늘처럼 작은 파편까지 하나하나가 비수다.

애꿎은 검영대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집어갔다.

마침내 벌떼처럼 일어난 파편을 이끌며 적비연의 등을 덮치는 흑월아 두 자루!

순간,

파아앙!

적비연의 전신에서 강기가 폭발했다.

간신히 몸을 피해 지켜보던 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저건…… 호신강기!”

콰콰콰콰콰앙!

흑월아가 튕겨나가고, 무지막지하게 날아든 파편들이 가루가 되도록 터져 나가면서 한기에 꽁꽁 얼어붙는다.

잘게 부서져 얼어 버린 파편은 이제 다시 적비연의 무기로 변해 주변 무인들과 살소공자를 덮쳐갔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살소공자는 재빨리 흑월아를 휘둘러 날아드는 파편을 쳐냈다.

파파파파앙!

하지만 바늘처럼 곱게 갈린 파편들이었기에 완전히 막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침 한 개의 파편이 그의 옥면(玉面)을 스치고 날아갔다.

피츗!

선혈이 흘렀다.

이번만큼은 살소공자도 놀랐는지 눈자위가 살짝 떨렸다.

“호오. 호신강기를……? 하면 초절정 육 단에는 이르렀다는 뜻? 이거 놀랍군요.”

살소공자가 혀를 내밀어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맛보더니 히죽 웃었다.

이를 본 극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어, 저놈은 아무리 봐도 우리 과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