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살소공자(殺笑公子)
멀찍이 떨어진 배를 천리경으로 관찰하던 가후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투혈권왕이 저토록 강한 자였던가?
계획에 문제는 없었다.
변수도 어느 정도는 감안했다.
금목원의 정보를 신뢰하지만 십 할을 다 믿는 것은 아니다.
금목원 역시 사람이 만든 조직이고, 사람이 활동하는 곳이다.
물론 중원 최고의 정보 정확도를 자랑하지만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정보 누락은 언제나 발생한다.
그런데 이 정도로 크게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는 없었다.
금목원의 정보에 의하면 투혈권왕은 흑천련에서 실권도 장악하지 못했고, 무공 수위도 초절정 사 단에서 오 단 사이로 봤다.
그중에서도 사 단에 더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가후는 언제나처럼 변수를 고려했다.
그 변수가 투혈권왕이 초절정 오 단 끝자락이라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면 이례적으로 많은 범위의 변수를 둔 것이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사로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데…….
‘살소공자와 비등비등하다니.’
최소 초절정 육 단 이상이란 말이다.
금목원의 정보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 이건 빗나갔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완벽하게 틀렸다.
초절정 영역에서는 한 단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하물며 초절정 오 단을 넘어서면 각 단도 열 단계로 쪼개야 할 실정이다.
그런데 초절정 오 단의 벽을 깨고 육 단이라니!
‘설마…… 빙백독광사 내단을 흡수한 건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지금 투혈권왕은 자신이 예측한 무공 수위를 십 년 이상 건너뛰었다.
도대체 어떻게?
빙백독광사 내단은 무림맹주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흡수하지 못한다.
영물의 내단을 꿀꺽 삼킨다고 다 소화될 것 같으면, 중원 천지에 영물은 씨가 말랐으리라.
그만큼 흡수하는 방법이 까다롭다.
특히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빙백독광사라면 더더욱.
신의 아상이 옆에서 조목조목 조언해가며 떠먹여 주지 않는 이상에야.
하지만 신의는 죽었다.
무림맹의 보배였던 아상이 이젠 세상 어디에도 없다.
돌이켜보면 이 작은 변화가 무림 전체의 변화로 번져간 기분이다.
아상이 죽으면서 너무 많은 것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벽력적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갑자기 천상원을 설립하면서 무림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지금은 흑천련의 후계자와 싸우는 상황까지 오지 않았나?
물론 천상원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벽력적가가 엮인 걸 보면 뭔가 석연치만은 않다.
‘그날 아상 어르신을 보내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하지만 아상의 뜻이 너무나 완고했다.
어쨌거나.
저 정도의 무공이라면 투혈권왕에게 모종의 변화가 생긴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역시 빙백독광사 내단밖에 없다.
하늘이 도운 것이겠지.
약간의 차질이 생겼지만 크게 상관없다.
어차피 놈들은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화시(火矢).”
가후의 입이 열리자 옆에 서 있던 무인이 손을 번쩍 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화시!”
그러자 배에서 북 두드리는 소리가 둥둥 울렸다.
다음 순간 장강의 배 수십 척에서 열화(熱花)가 피었다.
불을 머금은 야조가 날아들 곳은 단 한 곳.
‘기다린다. 둘이 거리를 둘 때까지.’
가후가 천리경을 들어 관찰하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 * *
씨이잉! 씨잉!
흑월아가 연신 허공을 가른다.
조심해야 할 것은 흑월아 뿐만이 아니다.
흑월아에 연결된 은잠사는 그 자체로 날카로운 칼날이나 다름없다.
흑월아가 어지럽게 날아들수록 은잠사는 더욱 복잡하게 꼬이며 그물을 만든다.
따당! 땅!
콰콰콰콰콰콰!
튕겨나간 흑월아는 선실 벽을 부수고 난간을 가차 없이 베어냈다.
살소공자가 이미 경고했지만, 그럼에도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은잠사에 목이 베여 죽은 검영대원도 있었다.
대다수의 검영대원들은 일찌감치 강물에 뛰어들어 혹시 닥칠지 모를 화를 피했고, 몇몇 대주와 대원들만 남아서 두 사람의 무용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파파파파파파!
파공성이 정신없이 울리고 적비연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며 솟구쳐 오른다.
그 뒤를 흑월아가 은잠사를 이끌며 용오름처럼 솟아오른다.
허공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 적비연은 몸을 거꾸로 세우고는 중력에 힘을 실어 일권을 내질렀다.
슈우욱, 꽈앙!
시커먼 주먹과 부딪친 흑월아가 그대로 혜성처럼 떨어지면서 선실을 박살 내버렸다.
콰콰콰아앙!
바짝 얼어 버린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삐리리리링!
은잠사가 장강의 물결처럼 너울 친다.
파편들이 은잠사의 예기에 조각조각 잘려나가면서 가루로 흩날린다.
쉬아아아아아!
안개처럼 흩어진 파편 가루.
적비연이 안개 속으로 떨어지자 선실을 박살 냈던 흑월아가 매서운 비명을 지르며 날아든다.
쒸에에에엑!
적비연이 그대로 돌아서며 주먹을 후렸다.
따다앙!
주먹과 흑월아가 부딪쳐 금속성이 울린다.
콰콰아앙!
다시 바닥에 내리꽂힌 흑월아.
범선 바닥을 뚫을 기세다.
아니, 실제로 바닥을 뚫었다.
게다가 은잠사가 갑판을 길게 갈라 버렸다.
꾸구구우웅……!
범선이 앓는 소리를 내며 기우뚱 기운다.
“어엇!”
“침, 침몰하겠어!”
지켜보던 무인들이 난간을 잡고 경사진 갑판에서 버티고 섰다.
타앗!
적비연이 바닥을 차고 선미에 선 살소공자를 향해 치달렸다.
파밧!
순식간에 살소공자 앞에 나타난 적비연이 주먹을 뻗는다.
살소공자의 눈길이 적비연의 주먹을 정확히 노려본다.
파아앙!
살소공자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주먹.
씨익.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살소공자의 왼쪽 입매가 치켜 올라가는 순간,
쒸쒸쒸이이잉!
그의 소매에서 세 자루의 흑월아가 튀어나온다.
하지만 적비연의 시선에는 그 과정이 느릿하게 보인다.
흑월아가 소매 끝에 얼핏 드러났을 때부터 위기를 느꼈고, 그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코앞에서 꺼내 든 흑월아를 이제 와서 막기에는 늦은 상황.
그렇다면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수밖에!
순간 호신강기를 일으키자, 흑월아도 강기를 품었다.
쩌어엉!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는가 싶더니 흑월아가 틈을 비집고 들어오며 옆구리를 찌른다.
어쩔 수 없다.
몸을 둘러 보호하는 호신강기보다 공격할 때 집중되는 강기가 더 강한 게 당연하다.
푹! 푸욱!
왼쪽 옆구리에 한 개, 오른쪽 옆구리에 두 개의 흑월아가 각각 박힌다.
살소공자의 왼쪽 입꼬리가 더욱 치켜 올라간다.
“흑월아는 원래 다섯 자루인지라.”
“크읏!”
적비연이 콧잔등을 팍 찡그리면서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후려쳤다.
턱!
“……!”
그제야 살소공자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옆구리를 찔리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거나 상처를 돌아보게 되는 법.
한데 적비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럴 각오였다는 듯 빗나간 주먹을 펼쳐서 자신의 목덜미를 낚아챈 것이다.
적비연이 그대로 힘을 주며 살소공자의 머리를 바닥에 내다꽂았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고!”
꽈자아앙!
갑판이 튀어 오르고 다시금 파편이 사방으로 튄다.
“단주님!”
경악한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들보다 빨리 흑월아 두 자루가 적비연의 등을 향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쒸쒸에에엑!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틀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흐아압!”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일권이 날아가자 쇄도하던 흑월아 두 자루가 속절없이 튕겨나갔다.
콰콰아앙!
강기까지 머금었던 흑월아였기에 배는 순식간에 양단될 듯 쩌억 금이 갔다.
이윽고,
우지끈!
쿠그그그긍……!
급기야 배가 절반으로 갈라졌다.
한참이나 기울던 배가 널을 뛰듯 철썩 떨어진다.
콸콸콸콸!
배 한쪽 갑판 위로 강물이 치솟기 시작했다.
적비연이 성큼 도약해서 건너편 갑판으로 올라섰다.
몸에 박힌 흑월아 세 자루를 뽑아내고 갑판에 박혔던 두 자루도 재빨리 회수했다.
다음 순간,
화아아아아!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불을 품은 야조들이 한가득 날아드는 게 아닌가?
‘화시!’
적비연이 호신강기로 몸을 두르고는 갑판을 차고 솟구쳐 올랐다.
파파파파팡!
사방으로 흑월아를 휘둘러대자 날아들던 불화살이 별똥별처럼 주변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현란한 모습이 얼핏 보기에는 아름다울 지경.
한편 적비연을 스쳐간 화살은 그대로 배 갑판에 내리꽂히면서 장강 한 가운데에 거대한 꽃을 피웠다.
화르르르륵!
화살대에 묻은 기름 때문에 배는 강물에 잠겨들면서도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그러는 사이 건너편 갑판에 있던 살소공자도 몸을 추스르고는 꼿꼿하게 섰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선혈.
“쿨럭!”
기침을 하자 검붉은 탁혈이 토해진다.
서늘한 감각에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살소공자.
그는 볼 수 없었지만 그의 목덜미는 시커먼 손자국이 나 있었다.
살소공자가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독이군요. 예상대로 빙백독광사 내단을 취하신 듯.”
적비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살소공자를 노려보다가 흑월아 다섯 자루를 들어 보였다.
“이건 회수한다.”
“아…… 돌려 드리지요. 그렇잖아도 저랑 조금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투둑.
살소공자의 소매에서 쇠사슬보다도 질긴 은잠사가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적비연이 당기자 은잠사는 그대로 딸려왔다.
적비연이 흑월아를 품에 챙기는 동안 반쪽짜리 배는 이제 거의 침몰하기 직전이었다.
그나마 물이 차지 않은 곳은 화마가 집어삼켰다.
적비연이 얼른 진각을 밟았다.
콰장!
그나마도 남아 있던 갑판이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적비연이 얇은 판자 위로 몸을 날렸다.
육중한 덩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가벼운 깃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물에 뜬 얇은 판자 위에 꼿꼿하게 섰다.
그러는 사이 살소공자는 본인이 원래 사용하던 무기를 소매에 장착했다.
비영추(飛影錐).
어지간한 대못을 연상시키는 비영추는 딱 두 자루다.
한 번 손을 떠나면 그림자도 찾기 힘들 정도로 빠르다.
살소공자가 살갑게 웃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요?”
콰장!
그가 진각을 밟자 딛고 있던 선채가 산산이 부서졌다.
파파팟!
다음 순간 살소공자는 수리가 되었다.
그의 신형이 부서져나가는 선채의 파편을 디디며 가볍게 날아올랐다.
삐이이이익!
비영추가 긴 울음을 터뜨리며 허공을 갈랐다.
매섭게 떨어져 내리는 수리가 범의 정수리를 쪼는 듯하다.
‘빠르다!’
동체시력이 비영추를 쫓기가 어려울 정도다.
눈에 잡히질 않으니 사고 속도가 빨라도 소용이 없다.
본능에 내맡기는 수밖에.
파팡!
범이 된 적비연이 허리를 젖히고 쌍권을 내질렀다.
하지만 비영추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면서 그대로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치잇!”
온힘을 다해 몸을 비틀자,
따다앙!
품에 넣어둔 흑월아와 부딪치면서 비영추가 튕겨나갔다.
흑월아가 아니었다면 심장에 구멍이 뚫렸으리라.
‘틈을 주면 안 되겠어!’
파파파팟!
적비연이 수상비를 펼치며 곧장 살소공자에게 날아갔다.
비호가 수리의 발톱을 물어뜯으려는 순간,
촤촤아아아!
물에 잠겼던 비영추가 솟구치며 적비연의 등을 노려온다.
“그럴 줄 알았지!”
적비연이 휙 돌아서더니 두 손을 뻗었다.
파파앙!
강기와 강기가 다시 한번 부딪쳤다.
비영추는 고집스럽게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적비연은 악착같이 비영추를 낚아채고자 했다.
내공 대결이다.
살소공자가 적비연 등 뒤에 있었지만 따로 손을 쓸 수는 없다.
지금은 은잠사를 이용해서 비영추에 모든 힘을 실었기에.
살소공자가 입매를 치켜 올렸다.
“그만 포기하시는 게 어떨지. 옆구리 부상이 커질 터. 지금이라도…… 헛!”
순간 살소공자가 헛바람을 삼키면서 비틀거렸다.
아차 하는 순간 그의 한쪽 발이 균형을 잃고서 강물에 잠겨들 뻔했다.
적비연이 히죽 웃었다.
“너야말로 포기하는 게 어때? 지금쯤 중독 상태가 더 심해졌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