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77화 (178/301)

177. 낚을 시간

뿌우우우우우!

뿔 나팔 소리에 천지가 격동한다.

둥! 둥! 둥! 두웅!

북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다.

체내의 기운이 장강의 물결만큼이나 요동을 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평범한 북소리가 아니다.

공명을 일으켜 내공을 뒤흔드는 음공(音功)의 일종이다.

자칫하다간 내력이 제멋대로 폭주해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아마 북을 두드리는 자의 내공도 만만치 않으리라.

살소공자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무림맹의 깃발을 단 범선들 사이로 시커먼 배들이 다가오는 게 보인다.

흑선들은 하나같이 수로십팔채를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 있다.

펄럭펄럭!

강바람에 사납게 펄럭이는 깃발.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우리 편이 나타난 것 같은데.”

“우리 편……?”

살소공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로십팔채를 두고 우리 편이라고?

그럴 리가.

수로십팔채가 사파에 속한다지만 흑천련과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다.

금목원에서 파악한 정보니까 신뢰도는 구 할 이상이다.

이런 정보는 오차범위라는 게 없다.

무공 수위야 오차범위라는 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건 둘 중 하나다.

교류가 있다면 있다, 없으면 없다.

금목원은 이런 정보에 대해서만큼은 어긋난 적이 거의 없다.

한데 수로십팔채가 호북 지역에 나타나?

금목원의 정보망도 피해서 흑천련이 수로채와 교류하고 있었단 말인가?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왜 이곳에 수로채가 나타난단 말인가?

그것도 저 거선은 총채주가 타고 있다는 은황선(銀皇船)이 아닌가?

수황이 나설 정도면 꽤나 깊은 교감이 있었다는 뜻일 텐데.

그게 아니라면 이번만 특별히 움직였다는?

어떻게?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데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어때? 과연 낚시꾼이 장강의 교룡(蛟龍)까지 낚을 수 있을까?”

“글쎄요. 그래 봐야 결국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일 뿐.”

“그 이무기가 한때 장강의 주인이었지. 그리고 호시탐탐 다시 기회를 노리고 있을 테고.”

“…….”

살소공자는 지그시 미소 지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살수를 쓰고 싶다.

하지만 하필 여긴 강 복판이다.

자신의 출수 여하에 따라 수황이 어떻게 나올지가 알 수 없다.

때마침 무림맹 범선들을 반원으로 에워싸듯 넓게 펼쳐진 흑선에서 천둥 같은 굉음이 울렸다.

터터터터터터어엉!

철컹! 철컹철컹철컹!

흑선의 중간 부분이 일렬로 반짝 빛을 뿜는다.

포다.

대포가 향한 방향은 명백히 무림맹 범선.

이에 무림맹 범선에서도 일제히 불화살을 시위에 재웠다.

적비연이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승천하지 못한 교룡이라는 말에 화난 모양인데.”

“…….”

살소공자가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적비연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빙백독광사 내단으로 무공 수위가 많이 올랐지만 아직 무림오절을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과 비등하게 싸우는 살소공자가 있지 않은가?

살소공자는 과연 무림맹 삼대 조직의 수장다웠다.

하긴 그 정도 되니 흑천련과 무림맹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수로채가 조금 늦었더라면 난감한 상황이 될 뻔했다.

조금 전 축일공이 쏘아낸 강궁에 적잖은 내상을 입은 터였다.

계속 싸움이 진행됐더라면 꼼짝없이 사로잡혔을 터.

다행히 그 전에 수로채가 나타난 것이다.

이래서 적비연은 안가에서 사용한 십만 냥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배를 대여해 주고 은밀하게 수로채에 서신까지 전해주었다.

물론 서신 말미에는 암어를 적어놓았다.

흑룡의 은덕

일전에 흑룡대에 사로잡혔던 동소유와 미계수를 풀어주면서 약속했던 암어였다.

당시 적비연은 수로채 전 인력을 한 번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약조받은 바 있었다.

물론 투혈권왕의 신분이 아니라 반철룡의 신분이었지만, 암어를 걸어놓았기에 상관없었다.

‘생각보다 빨리 사용했지만, 묵혀서 똥 되는 것보다야 낫겠지.’

적비연이 히죽 웃으며 어둠 속에서도 화려하게 빛나는 은황선을 바라보았다.

* * *

“어찌 말도 안 되는 일이!”

가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은황선을 중심에 두고 넓게 펼쳐진 흑선들은 분명 무림맹을 향해 포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의 짙은 살기가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싸늘하도록 전해진다.

“어떻게 된 건가?”

부맹주 축일공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총군사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질문에 답을 못하는 상황이 생길 줄이야!

투혈권왕은 자신의 예측을 계속 빗나가게 만들긴 했다.

추혼단주를 보냈으니 당연히 사로잡힐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 추혼단주를 죽였고, 흡수하지 못할 것 같던 빙백독광사 내단도 흡수했다.

도대체 저 인간은 뭔가?

그래, 다 양보해서 여기까지도 놀랄 정도는 아니다.

그래서 신궁 축일공을 부른 것이다.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수로십팔채라니!

“보아하니 자네 예상 밖인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가후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속내는 불에 지진 듯 뜨거웠다.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도 있는 법 아니겠나?”

“…….”

위로한다고 꺼낸 말이었지만, 그 위로는 가후에게 최대의 치욕을 안겼다.

“내가 얘기해 봄세.”

축일공이 무뚝뚝하게 말을 뱉고는 뱃머리에 성큼 올라섰다.

범선이 물결에 따라 연신 일렁이는데도 그는 꼿꼿하게 선 자세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나, 부맹주 축일공이오. 귀하는 수로십팔채 총채주가 아니시오?”

마치 하늘에서 웅혼하고 담담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내공이 얼마나 심후한지 알 수 있었다.

드넓은 장강에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수면 위로 물고기 튀는 소리까지 하나하나 들릴 지경.

마침내 부드럽고도 나른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만나서 반갑소.”

그 역시 축일공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웅혼한 내공이 느껴졌다.

축일공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나이가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굉장한 내력이로군.’

보통 사람들에게는 수황 무자강이 잘 보이지 않겠지만, 축일공은 내공으로 안력을 키워서 제법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신궁으로 명성을 알린 축일공은 그 누구보다도 좋은 시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귀채가 이곳에는 어인 일이오?”

“장강의 물길이 흐르는 곳이 곧 본채가 있을 곳. 무엇이 문제인지?”

무인들이 술렁거렸다.

이는 명백한 도발이 아닌가?

아무리 이곳에 장강이 흐른다지만, 공식적으로 수로십팔채는 강 동쪽으로 밀려난 상황이었다.

한데도 장강을 운운하며 정당성을 내세운다는 것은 다시 진출하겠다고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하지만 총군사 가후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저자의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못 들은 척하십시오.”

축일공도 길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후의 말이 맞다.

괜히 놈의 화술에 말려들면 장강 자체를 분쟁 지역으로 키울 수 있게 된다.

지금으로서는 감정을 내세우기보단 냉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어째서 귀채의 포구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거외다!”

엄중한 경고를 담아 추궁하듯 따졌다.

피식.

수황 무자강이 웃었다.

바람결에 따라 긴 은발이 너울 치며 휘날린다.

마치 달빛에 비친 장강의 물결을 보듯.

“귀맹이야말로 어째서 본채의 손님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오?”

“귀채의 손님?”

“그렇소만.”

“대체 누가 손님이란 말이오? 여기엔…… 설마……?”

축일공이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무자강을 보았다.

무자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늘한 눈길로 적비연을 응시했다.

“투혈권왕은 본 채의 손님이오. 생각보다 늦기에 직접 마중을 나온 차였는데 여기서 발이 묶여 있었군.”

“헛소리! 흑천련과 수로채가 왕래하지 않은 지 오래인 것으로 아는데 갑자기 무슨 수작이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절로 큰 소리가 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감히 무림맹 권역에 와서 저런 뻔뻔 소리를 하다니!

너무 고분고분 대응하는 것도 상대에게 약해 보일 수 있는 법.

하지만 수황 무자강은 시종 차분한 눈빛이었다.

“본 채는 투혈권왕에게 진 빚이 있어 그것을 갚으려는 것뿐이오.”

“빚이라니?”

“그것까지 알려 드려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소만.”

“그럼 그 빚은 추후 청산하실 것을 권해 드리오.”

“그럴 수 없소. 본좌는 당장 저자와 대화를 나눠야겠소. 보아하니 지금 빚을 갚지 않으면 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축일공이 미간을 구겼다.

“감히 본 맹의 일을 방해하고도 뒷감당을 할 수 있겠소?”

“각오라면 이 정도 보여주면 되겠소?”

말을 마친 무자강이 만사 귀찮다는 듯 손을 슬쩍 저었다.

화륵! 화르륵! 화르륵!

순간 수십 척 배의 난간을 따라서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여차하면 포를 발사하겠다는 뜻.

위험하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배의 간격은 더 좁아져 있었다.

게다가 무림맹 범선에는 포가 없다.

당연하다.

고작 서른도 되지 않은 도주자들을 잡기 위해 범선마다 무거운 포까지 실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명백한 무림맹 권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 누가 알았겠나?

축일공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가 가후를 돌아보았다.

가후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답했다.

“이 거리에서 저들이 포를 쏘면 필패입니다.”

“하면?”

“우선 저들이 원하는 대로 도주자들을 넘기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수로채가 투혈권왕에게 진 빚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그 말은 수황이 말한 ‘빚’이라는 것이 어쩌면 좋은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

사실 하나 짚이는 부분이 있다.

금목원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수로채는 동추추라는 초절정 고수를 잃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의 여동생인 동소유는 팔까지 잃었다고 한다.

물론 무림맹 사절단이 저지른 짓이지만, 당시 그 사절단을 적극 보호한 게 흑천련이다.

당연히 흑천련에 좋은 감정이 있을 까닭이 없다.

게다가 당시 사절단을 호위한 반철룡은 투혈권왕의 호법장이 아니었던가?

‘그가 어째서 적 가주 행세를 한 건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지만.’

어쨌거나 입수한 정황만 놓고 보자면 수로채가 흑천련에게 반감을 가질지언정 호감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니 우선은 저들을 넘긴 후 수황과 거래를 시도해 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축일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공을 실어 말했다.

“좋소. 우선은 본 맹이 양보하겠소. 하나 이곳에서 빚을 청산하는 게 어떻소? 그 셈이 끝나면 저들의 신병을 본 맹에 넘겨주길 바라오.”

“흐음. 귀맹이 허튼짓을 하지 않는다면.”

“물론이오.”

축일공이 대답을 하고 나서 손을 휙 저었다.

그러자 얼음 섬에서 대치하고 있던 살소공자가 싱긋 웃으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같은 편은 아닌 듯.”

“그래도 일단 시간은 끌었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그대로 수상비를 펼쳐서 일행이 있는 배로 뛰어올랐다.

촤아아아아.

흑천련 배를 가로막고 있던 범선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수로를 터주었다.

흑천련 무인들의 배가 나아가고, 무림맹 무인들의 배는 조금씩 거리를 좁혀왔다.

여전히 두 세력은 서로에게 포와 활을 겨눈 채였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적비연이 탄 배가 수로채 범선들 사이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이에 축일공이 뱃머리로 나와서 포권하며 말했다.

“귀채의 손님을 배웅했으니, 빚 청산이 끝나면 본 맹과 대화를 나눠주길 바라오!”

“앞서 말했듯이 귀맹이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정도인들은 도통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오.”

수황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다.

팽! 패앵!

쒸에엑! 쒸에에엑!

무림맹 범선 중 한 척에서 두 자루의 불화살이 시위를 떠나 수로채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헛!”

축일공이 헛바람을 삼키는 사이, 수로채에서 곧바로 반응이 왔다.

“으엇! 놈들이 공격한다!”

“역시 믿을 수 없는 것들!”

“포를 쏴라!”

소란이 일어나기가 무섭게 심지에 불꽃이 붙었다.

그러자 무림맹 범선에서 연이어 불화살이 날아드는 게 아닌가?

“놈들이 포에 불을 붙였다!”

“화살을 쏴라!”

처음에는 두세 대였던 불화살이 이윽고 들불처럼 번지면서 하늘을 수놓기 시작했다.

패패패패애앵!

“멈춰라! 누구냐?

축일공이 소리쳤지만 이미 수백 대의 불화살이 적진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곧이어,

콰앙! 쾅쾅 콰앙!

수로채의 범선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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