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귀환
강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뱃머리에 선 사예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몸은 상당히 회복됐다.
놀랍게도 투혈권왕이 건네준 영단을 복용한 덕분이다.
물론 그 영단은 엽강호와 한사가 천상원에서 들고 온 것이다.
사예린은 물비린내를 맡으면서 체내의 공력을 일주천시켜 보았다.
경맥을 따라 흐르는 내기가 막힘없이 술술 달린다.
보통 때였다면 사흘은 요양을 하면서 몸을 회복해야 이 정도 수준이 됐을 것이다.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니, 죽진 않더라도 무림맹 뇌옥으로 끌려가 온갖 치욕을 견뎌야 하리라 생각했다.
한데 지금은 여유롭게 강바람이나 즐기고 있다니.
갑판 곳곳에서 웃고 떠드는 무인들은 걱정이라곤 없는 것 같다.
배를 타고 오는 내내 느꼈다.
그들이 투혈권왕을 믿고 따른다는 것을.
분명 벽력적가로 향할 때보다도 더욱 신의가 돈독해진 모습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잠깐 안 본 사이에 투혈권왕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투혈권왕은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각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낯설다.
아무리 사람이 달라져도 능력의 한계라는 게 있다.
한데 추혼단주를 죽이고 살소공자와 대등한 싸움을 펼치다니?
투혈권왕이 자신을 구하겠다고 나타났을 때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투혈권왕은 기적을 만들었다.
무너진 하늘에서 솟아난 구멍을 뚫은 것도 모자라서, 천지를 뒤집어 버렸다.
장강에서 무림맹이 단숨에 패망한 사건은 앞으로 강호에서 한참 동안 안주거리가 되리라.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투혈권왕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다.
사예린을 힐끔 본 적비연이 물었다.
“몸은 좀 어떻소?”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 같은데?”
사예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적비연이 시커먼 강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공진철에 구속된 건 내가 아니라 사저였으니까.”
“살소공자와 싸운 건 너지. 보란 듯이 미끼를 물고 낚싯줄을 끊고, 아니, 낚시꾼마저 아예 수장을 시켜 버리고 이렇게 달아난 것도 너지.”
“…….”
“어디 그뿐이야? 추혼단주를 죽였다지?”
“운이 좋았소.”
“운? 그래, 운이 좋아서 사람을 죽일 순 있어. 하지만…….”
사예린이 고개를 돌리고 적비연의 옆모습을 보았다.
“추혼단주는 사람이 아냐. 그는 영혼마저 쫓는다는 괴물이야. 운이 좋아서 영물을 죽일 수도 있지. 하지만 빙백독광사는 보통 영물이 아냐. 괜히 전설의 신물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빙백독광사는 내가 죽인 게…….”
“뭐가 됐든. 아무리 좋아도 서른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추혼단의 천라지망을 벗어날 수는 없어. 한마디로 운으로는 안 된단 뜻이지. 게다가 살소공자는 나도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자. 그런데 넌 그 살소공자와 대등한 무위를 보였어.”
적비연이 사예린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젠 내 차례요?”
“뭐가?”
“그 직감으로 의심하는 것. 내 호법장을 그리도 의심하더니. 이번에는 내 차례가 되었나 싶어서 묻는 거요.”
타닷!
순간 사예린이 바닥을 차더니 적비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녀가 섬섬옥수를 뻗어 적비연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잡고는 당겼다.
“말해봐. 내 두 눈을 똑똑히 보고. 대체 나한테 뭘 숨기는 거야?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건데?”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역시나 눈이 아름답소.”
“시답잖은 소리 그만하고! 네 호법장은 내 직감대로 간자였어! 이래도 내 직감을 비아냥거릴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참이나 격렬하게 얽혀들었다.
마침내 적비연이 부드럽게 숨을 내쉬고는 사예린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안심하시오. 내가 사저를 구하지 않았소? 이만하면 날 좀 믿어도 되지 않겠소?”
“넌……!”
적비연이 몸을 돌리고 걸어 갔다.
그의 등을 바라보던 사예린이 불쑥 소리쳤다.
“믿으면!”
걸음을 멈춘 적비연 뒤로 사예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믿으면…… 그다음은? 너 지금 이렇게 금의환향하면 사람들이 너에게 열광할 거라고 생각해? 그것들이 박수친다고 그게 다 진심이라고 생각해?”
적비연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 적비연을 노려보는 사예린은 입술을 꽉 깨문 표정이다.
맞바람 때문일까?
눈가에 묻은 물기가 반짝 빛을 품는다.
사예린이 불어오는 바람에 목소리를 실어 보냈다.
“왜…… 갑자기 나서는 거야.”
“…….”
“갑자기 없던 권력욕이라도 생긴 거야? 그냥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찌그러져서 지낼 것이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만.”
“뭐?”
“그만큼 했으면 됐소.”
“무슨 소리야?”
“모를 줄 알았소?”
적비연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두 눈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적비연이 말을 이었다.
“한동안은 몰랐다고 칩시다. 나는 감정이 무딘 편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안 되겠소.”
“그러니까 뭘 안다는…….”
순간 적비연이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사예린의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혼자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
“너……!”
사예린이 움찔 떨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심연까지 들여다볼 것 같은 맑은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박수든, 독수든. 그 가시밭길 속에서 혼자 해쳐나가려고 아등바등거리지 말라고. 네가 닦아놓은 길로 마냥 편하게 걸어가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나?”
탁!
사예린이 적비연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몸을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그저 련주가 되기 위해서…….”
“그렇겠지. 그러지 않으면 결국 내가 대사형 손에 죽게 될 테니까. 대사형을 막을 수 있는 건 너뿐이라고 생각했을 테지.”
“너……!”
“나도 바보는 아냐. 그래, 지금까지 네가 해쳐 나온 길. 그 덕분에 편하게 걸어왔어. 그런데 이제부터는 아냐. 나한테 맡겨. 이제 다시 내가 널 업고 달릴 때니까. 오래전 그날처럼. 나한테 그냥 기대고 있어.”
적비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다.
그랬다.
지금은 그 역시 타아에 젖은 상태.
투혈권왕이 가졌을 그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기에 연기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반쯤은 그의 진심이 묻어 있다고 해야 하리라.
사예린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강바람이 유독 차게 느껴진다.
피식.
그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너 그래도 제법 이성적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정말 바보구나. 대사형이…… 그 파천신군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같아?”
“대사형? 그런 인간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뭐라고?”
“내 목표는 흑천련주가 되는 게 아냐. 강호일통을 이루고 무림의 중심에 서는 게 목표지.”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거니?”
“내 호법장을 의심했었지? 확실히 예전부터 넌 직감이 좋았지. 네 말대로 반 호법장은 간자였어. 하지만 너 역시 사부님에게 진심으로 충성하는 건 아닐 텐데.”
“목소리를 낮춰.”
사예린이 엄중한 표정으로 주변을 의식했다.
하지만 적비연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상관없어. 여기 있는 녀석들은 련주가 아닌, 날 믿고 따르니까.”
“그래서 할 말이 뭐야? 왜 갑자기 충성심을 운운하는 거지?”
“내가 돕는 분이 따로 있어. 반 호법장이 모셨던 분이지. 그리고 그분이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내셨어.”
“그게 누군…… 설마 그 사람이……?”
사예린은 확실히 눈치가 빨랐다.
적비연은 그녀가 누굴 떠올리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래, 그분이다. 벽력적가주.”
“도대체 벽력적가주가 누구기에 전부 그 사람을 거들먹이는 거야? 사이비 교주라도 되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 분명한 건 내가 그분을 강호의 진리라고 믿는다는 거니까. 반 호법장이 벽력적가주의 인피면구를 쓴 것도 내 지시에 따른 거야. 어때? 날 막을 생각인가?”
사예린은 심장이 뛰었다.
놀란 마음이 가장 컸고, 그 다음으로 흥분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이렇게 공공연하게 반역을 얘기하다니!
적비연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리고서 미련 없이 걸어갔다.
그의 등에 사예린의 목소리가 닿았다.
“자신은 있는 거야?”
“글쎄. 내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은 분명히 해낼 거라고 믿어.”
“너, 그러다가 후회할지도 몰라.”
“아니. 절대 안 해. 그러니까 너도…… 그 오래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든.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믿자. 그러니까 우리 자책하지도 아쉬워하지도 말자.”
말을 마친 적비연이 선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갑판에 서 있던 사예린이 고개를 들었다.
잔뜩 낮아진 하늘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기분이…… 축축하네.”
그녀의 혼잣말에 화답이라도 한 것일까?
투둑, 툭!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비가 다시금 그녀의 기억을 끌어냈다.
* * *
촤아아앗!
떨어지는 물방울이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쏴아아아아.
비가 고요히 내린다.
워낙 부드러워서 안개처럼 느껴지는 비다.
하지만 경장을 입은 그녀의 전신은 이미 땀과 빗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훌륭하구나.”
문득 들린 목소리.
초식을 펼치면서 너무 집중한 탓일까?
바로 뒤로 일 공자 파천신군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대, 대사형. 언제부터 지켜보셨어요?”
당황한 사예린이 묻자, 파천신군이 부드럽게 웃으며 사예린의 흑월아를 손으로 쓸었다.
“처음부터 지켜보았다. 너의 동세 하나하나, 너의 숨결 하나까지.”
그의 손길이 미끄러지듯 오르면서 팔꿈치를 지나 어깨를 거쳐 목 언저리에 닿았다.
사예린이 움찔 물러나려고 하자, 파천신군의 전신에서 사이한 기운이 물결처럼 덮쳐왔다.
‘움직일 수가…… 없어!’
파천신군의 손길은 이제 목을 지나 귓불에 닿았다.
“너의 모든 것을 느끼고 있었지. 제법 훌륭했다.”
“대사형 전 이만…….”
“꽤 좋았다. 아주 좋았어. 하지만…….”
다시 미끄러지듯 흘러내린 파천신군의 손길이 사예린의 가슴께로 향했다.
“이 초식에 이르러서는 공력을 발출할 때 좀 더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어야 한다.”
스팟!
순간 칼날 같은 예기가 파천신군의 손끝에서 발출되면서 옷깃이 잘라냈다.
축축하게 젖은 경장이 풀어헤쳐지면서 축 늘어졌다.
파천신군의 손은 이제 사예린의 가슴 언저리에 머물렀다.
“흑월아를 쥔 손은 더욱 부드럽게 아이 달래듯 해야 한다.”
“대사형…….”
“가엾게도. 떨고 있구나.”
“저는 이제 그만…….”
“쉿. 긴장을 한다는 건 좋은 신호다. 긴장감이 너의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다듬어 줄 테니. 그리고 그 모든 상황에서 기민하게 대처하도록 만들 테니.”
“헛!”
순간 파천신군의 손길이 사예린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찰나지간 사예린은 보았다.
투혈권왕의 어깨 너머로 누군가 전각 뒤에 숨어 지켜본다는 것을.
그 누군가가 다름 아닌 진천이라는 것까지.
진천은 두 눈에 불을 켜고는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래전 그날 맹수가 되어 승냥이를 물어죽일 때처럼.
사예린이 못 본 척 물었다.
“대사형, 제가 부탁드린 건…….”
“그 주먹만 쓰는 무식한 녀석 말이더냐?”
“…….”
“왜 그리 그 녀석을 신경 쓰는 거냐?”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서 피붙이나 다름없는 친구예요. 재능이 있어요.”
“염려 말아라. 내가 사부님께 잘 말씀드려놓을 테니. 그렇잖아도 지금 네 번째 제자를 고민 중이시니.”
“고마워요, 대사형.”
사예린이 부드럽게 파천신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어깨 너머로 보이는 진천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그 순간 파천신군이 입매를 뒤틀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누가 보기라도 하느냐?”
“아, 아니에요…….”
“하긴. 감히 누가 목숨을 걸고 날 지켜보겠느냐?”
파천신군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서서히 빗속으로 잠겨들었다.
* * *
심복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렸다.
“주군, 그들이 돌아왔습니다.”
정좌를 한 채 운기하던 파천신군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이왕 죽었으면 편했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