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81화 (182/301)

181. 십 합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웃으며 술을 따르던 자들도 석상처럼 굳어 버렸고, 거친 욕설과 함께 수다를 떨던 자들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무림맹을 향해 온갖 저주를 퍼붓던 자들은 그저 멍한 표정이 된 채 사예린과 세 명의 월희계 무인들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이 공녀를 공식적으로 지지한 삼 공자 종권악도 있었다.

그는 금붕어라도 된 것처럼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것 같았다.

그만큼 사예린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발언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세 사람.

귀검단주(鬼劍團主) 평태운(平太運), 흑혈당주(黑血堂主) 주천랑(主天浪), 괴독부당주 문쾌(文快)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사예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은 월희계에서도 특히 사예린을 향한 충심이 남다른 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사예린을 향한 원망을 감추지 못했다.

세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지긋한 흑혈당주 주천랑이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공녀님. 어찌 그리 중대한 일을 저희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귀검단주가 힘주어 말하자, 연회장에 있던 월희계 무인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는 동안에도 사예린은 그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장내를 훑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특유의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한 번 뱉은 말을 거둔다고 해서 거두어지겠어요? 설마 남자와 달리 여자는 두말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짐짓 언짢은 목소리로 말하자 흑혈당주 주천랑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저희들 누구도 공녀님을 그런 불경한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저희들에게 공녀님은 그저 믿고 따라야 할 월희전주님이실 뿐입니다!”

“정말 그렇게 날 믿고 따른다면 이번에는 내 결정을 거역하지 말아요.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찌 사 공자님을 지지하신다는 것인지…….”

주천랑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장내에 모인 무인들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하필이면 가장 세력도 약한 권왕을 지지할 이유가 뭔가?

물론 개중에는 월희마녀와 투혈권왕의 관계가 과거에서부터 특별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다.

주천랑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그런 중차대한 결정을 가벼이 내릴 수는 없지 않나.

월희마녀만큼은 절대 그럴 일이 없으리라 여겼거늘!

사예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들은 날 믿고 따른다면서, 왜 내가 믿고 따르겠다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거죠?”

“그, 그건…….”

주천랑이 은근한 원망의 눈길로 적비연을 보았다.

사실 적비연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전혀 짐작도 못했다.

느닷없이 지지 선언을 들을 줄이야.

마침 옆에서 부유하고 있던 극마가 턱짓을 하며 물었다.

-쟤, 갑자기 왜 저러냐?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뭐, 급작스럽긴 하지만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그래서 어쩌려고?

‘글쎄. 모든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오는 법.’

극마가 말을 마친 적비연의 시선을 따라서 눈길을 옮겼다.

적비연의 눈길이 상석에 앉은 파천신군에게 향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위험을 의식해서 이 기회를 흘려보낼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기회를 한 번 노려볼지.’

확실히 지금은 뜻하지 않게 굴러들어온 기회다.

잘 대처한다면 오늘을 계기로 월희계의 무인들을 통째로 흡수할 수도 있으리라.

다만 파천신군의 견제는 더 심해질 터.

극마가 불쑥 말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지.

‘뭔데?’

-이 세상에 완벽한 기회란 없다. 네가 바라보는 곳이 높은 곳에 있다면 높을수록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거다. 결국 너는 위험을 피할까 말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더 오를지 말지를 결정하면 될 문제다.

‘호오. 지금은 인생 선배 같은 말이었다.’

-흥! 내 존재가 주인보다 오래된 건 명백한 사실이다!

적비연이 씨익 웃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마침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적비연에게 향했다.

적비연이 포권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사저께서 이렇게 공식적으로 절 지지 선언해 주실 줄은 짐작도 못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치 월희계를 흡수하는 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말하자, 주천랑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직 확실히 정해진 바가 없소!”

“흐음. 믿고 따르는 분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충정은 아닐 텐데?”

“우리가 모시는 분이 자칫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는 진심을 다하여 재고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요! 사 공자께서 따지실 일이 아니오.”

“아무래도 제가 미덥지 못한가 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속에서 치민 그 생각을 꿀꺽 삼킨 주천랑이 말을 이어갔다.

“이번 임무는 공녀님께서 스스로 미끼가 되시는 바람에 운 좋게 사 공자께서 빛을 보게 된 것이오. 만약 공녀님의 그런 안배가 없었다면…….”

“그렇게 믿고 싶으시면 지금이라도 사저의 뜻을 따르셔야 할 겁니다. 그 믿음을 진실로 만들고 싶다면 말입니다.”

“허! 사 공자께서는 지금 공녀님의 공적을 가로채고 모함하려는 것이오? 사 공자께서 이 공녀님보다 무공 수위가 낮다는 건 만천하가 아는 사실인데.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이유로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줄 착각하시는 건 아니오?”

구우우우우……!

순간 적비연의 전신에서 공력이 소용돌이치듯 솟구쳐 올랐다.

무척 노골적으로 드러낸 기도였기에 주변 사람들이 그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기도를 드러낸 적비연이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당주가 보기에 내가 그렇게 약한 것 같소?”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

소천랑이 흠칫거리고는 옆에 선 귀검단주 평태운과 괴독부당주 문쾌를 돌아보았다.

괴독부당주 문쾌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는 현재 혈조야귀와 함께 귀환했던 괴독자가 중상을 입은 상태였기에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하면 이렇게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말해보시오.”

적비연의 말에 문쾌가 답했다.

“우리 세 사람은 비록 개개인의 무공이 공녀님께 미치지 못하나, 협공을 하면 이 공녀님과 꽤 오랜 시간 대련이 가능합니다. 하나 공자께선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지? 물론 차기 련주 자리가 무공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지만, 정사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정세에서 무공 수위는 무시할 수 없는 덕목이지요.”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던 귀검단주가 벌떡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세 사람이 공자를 협공해 볼 테니, 백 합을 견뎌낼 수 있다면 지지 선언을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소.”

이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교패랑 파천신군도 재미있다는 듯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흑혈당주와 귀검단주, 그리고 괴독부당주는 각각 초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고수였다.

사예린이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이건 말도 안 되잖아!’

백 합을 버티라니?

자신도 아직 백 합을 견딘 적이 없다.

정말 기운이 좋은 날, 팔십 합 정도까지 버텨봤을 뿐이다.

그것도 아마 세 사람이 손속에 어느 정도 사정을 두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 세 사람은 지금 적비연에게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백 합은커녕 오십 합도 넘기기 어려우리라.

‘아무리 권왕이 강해도 이건 안 돼!’

이들은 이 자리에서 아예 권왕계를 깔아뭉갤 작정이다.

두 번 다시는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지 않도록 하겠다는 심산이다.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자 사예린이 얼른 나섰다.

“그건 지나친……!”

“공녀님! 이건 단순한 내기가 아닙니다. 공녀님을 믿고 따르는 월희계 무인들 모두의 운명을 건 일입니다. 수많은 무인들을 이끌 재목이라면 이 정도 무위는 지녀야 합니다.”

주천랑이 단호한 표정으로 막아섰다.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그런데 이번에는 적비연이 사예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적비연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연회장 복판으로 걸어 나왔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적비연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좋소.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순간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술렁거렸다.

평소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 투혈권왕이 맞던가?

투혈권왕은 별호와 달리 시종 조용하고 온순한 성격이었다.

저렇게 도발적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흑천련에서도 별호가 제일 어울리지 않는 무인으로 손꼽히곤 했다.

다만 흑천련주의 제자인 만큼 노골적으로 그런 생각을 입에 올리지 못했을 뿐.

한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적비연이 입을 열었다.

“단!”

그럼 그렇지.

무슨 조건을 달겠지.

말이 백 합이지.

초절정고수 세 사람을 상대로 백 합을 견디겠다니?

주천랑은 물론,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적비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십 합.”

“십 합……?”

“그렇소. 십 합 안에 내가 당신들을 꺾게 된다면, 그땐 긍정적인 고려가 아니라 이 자리에서 바로 인정하시오. 나를 차기 련주로 지지하겠다고.”

“……!”

주천랑이 입을 척 벌렸다.

지켜보던 교패의 눈에 이채가 서렸고, 파천신군은 가만히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권왕 사제가 저런 객기를 부리는 성격이었나?’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았던 장내가 이내 봇물 터지듯 떠들썩해졌다.

“뭐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거야?”

“방금 십 합이라고 했지? 십 합?”

“허! 사 공자가 죽을 고비를 넘기다니 정신이 이상해진 거 아냐?”

“아냐. 어쩌면 빙백독광사 내단을 정말로 흡수한 건지도 모르지!”

“어허, 이 사람아! 그게 말이 돼? 빙백독광사 내단이 무슨 텃밭에서 캐먹는 감자라도 되는 줄 알아?”

무인들이 술렁거리는 와중에 주천랑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로서는 충분히 모멸감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

뭐? 십 합?

게다가 버티는 것도 아니고 꺾겠다고 했나?

주천랑이 잔뜩 억눌린 음성을 씹어뱉듯 말했다.

“지금…… 무슨 장난을 하시는 거요?”

“장난으로 보이시오?”

“하면 우리를 무시하는 거요?”

“그럴 리가. 만약 내가 정말 무시한다면 열 초식이 아니라 단 일 합이라고 얘기했겠지.”

이쯤 되자 괴독부당주인 문쾌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 듯했다.

“저…… 저……!”

적비연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왜? 생각 좀 해보셔야겠소? 혹시 자신 없으면 지금 내 밑으로 들어와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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