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십 합
‘감히……!’
주천랑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무시할 줄이야!
아니, 이건 어떤 의미로 월희계 무인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니지. 무시는 강한 자가 하는 것!’
터무니없는 객기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빙백독광사 내단을 복용했다고 치자.
그렇다고 사람이 갑자기 초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몸이 버텨내질 못할 테니까.
어디까지나 그 신체가 버텨낼 수 있는 만큼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한데 아직 사십 년도 살지 않은 투혈권왕이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해졌겠나?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주천랑의 생각이 전혀 틀렸지만, 그로서는 적비연의 정체를 모르니 당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흥! 좋소!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요!”
“물론.”
“만약 우리를 이기지 못하면 그 발언 자체로 굉장히 결례를 저지른 것이니, 권왕께서도 뭔가 하나는 걸어야 하지 않겠소?”
말을 뱉은 주천랑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상대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객기를 부리면서 격장지계로 나온다면, 이쪽에서는 받고 더 하면 되는 거다.
“뭔가 하나를 걸라는 건?”
적비연이 묻자 주천랑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권왕께서 지면 월희계로 들어오시오. 이 공녀님을 차기 련주로 지지해 달란 말이오.”
“흐음.”
침음을 흘리던 적비연이 씨익 웃었다.
“장사 좀 할 줄 아시네. 그럽시다.”
적비연의 대답이 떨어지자 인근의 무인들은 재빨리 네 사람이 비무할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연회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아니겠는가?
술렁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호기심을 품은 눈길로 그 과정을 지켜보며 즐겼다.
이만하면 내기를 하는 사람도 생길 법하지만, 누구도 이 비무를 두고 내기를 하진 않았다.
결과가 너무나 뻔하기에.
어느 한 사람도 투혈권왕이 이길 거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적비연의 호신위들만큼은 그들 생각과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연회장 가운데가 텅 비게 되자 적비연과 세 명의 무인이 마주 섰다.
네 사람이 동시에 포권을 취한 후 곧바로 비무에 들어갔다.
서서히 걸음을 옮기는 세 사람은 자연히 적비연을 가운데에 두고는 포위하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천신군이 옆에 앉은 교패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이거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혹, 기분이 언짢으신 건 아니신지요?”
교패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은 파천신군이 베푼 연회가 아닌가?
한데 월희계와 권왕계가 때아닌 세력 다툼을 하고 있으니, 파천신군으로서는 눈살이 찌푸려질 만도 했다.
하지만 파천신군은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들개들이 뭉쳐 다닌다고 범이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흥미로운 볼거리입니다.”
“과연 그렇군요. 만약 이 자리에 오 공자가 계셨어도 왠지 흥미로워했을 것 같군요.”
“…….”
일순 파천신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나 그 표정은 아주 찰나에 지나지 않았기에 주변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파천신군이 껄껄 웃었다.
“막내는 유흥을 즐기는 녀석이니까요.”
말을 마친 파천신군이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날카롭게 여며진 시선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아직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서 부유하던 극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도와줘?
‘아니. 이 정도는 충분해.’
-빙백독광사 내단이 꽤 효능이 좋은가 보군.
‘뭐, 그것도 그렇지만 네 기운은 너무 강해. 지켜보는 눈도 있고.
적비연이 뒤쪽에 앉은 교패와 파천신군을 의식했다.
그때!
파바밧!
좌측에서 귀검단주가 갈지(之)자를 그리면서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쉬쉬쉬쉬쉭!
날카로운 검로가 허공에 그려진다.
마치 그물 같다.
그의 독자무공인 주사귀검(蛛絲鬼劍)이다.
거미줄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검기가 넓게 펼쳐져서 덮쳐온다.
타다닷!
적비연이 재빠르게 보법을 밟으면서 물러났다.
주사귀검은 눈에 보이는 검기만 신경 쓰다간 진검에 당하기 일쑤다.
잔상으로 남은 듯한 검기는 잔상이 아니다.
실제로 닿으면 살이 베이고 만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들 진검도 신경 써야 한다.
과연 흑천련의 삼대 무력단체의 수장인 귀검단주다운 실력이다.
파바밧!
적비연이 몸을 옆으로 눕히면서 훌쩍 물러나는 순간,
“흐아압!”
쌍수를 뻗으며 달려드는 괴독부당주 문쾌!
그의 양손이 진녹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주변에 녹빛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든다.
하지만 연회장의 다른 무인들에게까지 영향이 가진 않는다.
녹빛 안개는 철저하게 문쾌를 중심으로 반경 일 장에도 미치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적비연을 공격하는 나머지 두 사람은 문쾌의 독공에 대비가 되어 있을 터다.
피독주를 미리 복용했다든지.
어쨌거나 독기를 철저하게 좁은 범위에 가둬둔다는 것은 얼마나 독공이 심후한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파바바밧!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던 적비연은 순간 옆구리로 베어 들어오는 귀검단주의 검신을 확인하고는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
쒸아아아악!
아랫배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가는 검기!
탓!
적비연이 바닥을 찍어 차며 물러나는데, 마침 배후에서 주천랑이 정수리를 그대로 찍어 버릴 듯 검을 부려왔다.
쒸이이잇!
적비연이 그대로 흑천투권공을 일으키면서 주먹을 들어 올렸다.
쩌엉!
주먹과 검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후우우웅!
기파가 퍼져 나가자, 연회장에 마련된 그릇들이 다르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일 합!
다음 순간 적비연의 신형이 귀신처럼 문쾌와 주천랑 사이를 빠져나가더니 곧장 귀검단주를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쒸이이익!
눈 깜빡할 사이에 나타난 적비연을 보며 귀검단주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헛!”
뭐가 이리 빠른……!
그가 재빨리 검을 거꾸로 쥐고는 수직으로 세워 적비연의 주먹을 막아냈다.
꽈앙!
촤아아아앗!
“크읏!”
일권에 실린 힘을 이기지 못한 귀검단주가 연회장 바닥에 발자국을 길게 남기며 한참이나 미끄러졌다.
이 합!
적비연이 돌아서는 순간, 문쾌가 빠르게 품을 파고들었다.
“흐아압!”
툭!
적비연이 바닥을 찍어 차고는 가볍게 물러났다.
한데 조공을 펼치는 문쾌의 소매에서 시커먼 암기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암기다!
‘나도 알아.’
재빨리 대답한 적비연이 몸을 팽이처럼 회전했다.
휘리리릭!
곧이어 그가 발등으로 날아드는 암기를 걷어찼다.
파앙!
순간 방향을 틀어 버린 암기가 바로 옆에서 바짝 따라붙던 주천랑에게 날아갔다.
“엇!”
느닷없는 공격에 주천랑이 얼른 검을 앞세웠다.
따아앙!
“큿!”
발차기에 강기를 실은 탓일까?
암기를 막아낸 주천랑이 비명을 삼키면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삼 합!
적비연이 얼른 손을 뻗어 날아오른 검을 낚아채고는 다시 뒤에서 달려드는 귀검단주를 향해 초식을 펼쳤다.
파바밧!
순간 달이 그려진다.
오른쪽으로 휘어져 올라가는 초승달!
까앙!
사 합!
이어서 왼쪽으로 휘어져 떨어져 내리는 그믐달!
따아앙!
오 합!
중심에서 휘돌아 나아가면서 내지르는 만월!
쩌어엉!
육 합!
마지막 만월은 왼손으로 검신을 받쳐 들면서 겨우 막아냈다.
귀검단주는 알았을까?
만약 적비연이 손속에 사정을 조금도 두지 않았다면, 만월이 자신의 가슴에 상흔으로 새겨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서호검법 삼담인월 초식이다.
하지만 반철룡일 때 부리던 것과는 다소 검세가 다르다.
아니, 완전히 다른 검식처럼 느껴진다.
서호검법 중에서도 성취별로 그 차이가 가장 큰 초식이 바로 삼담인월이다.
상흔 역시 초승달 모양에서 보름달로 변하니 검로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초식을 펼친 것이다.
귀검단주는 삼담인월을 완전히 막아내진 못했다.
찰나가 지나자,
퍼퍼퍼펑!
전신에서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상의가 조각조각 찢어져 나갔다.
탄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난 귀검단주는 전신으로 훅 끼쳐오는 한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크읍!”
울컥 한 모금의 핏물을 머금은 그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여기까지가 단 육 합!
지켜보는 모든 무인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교패와 파천신군 역시 두 눈에 힘을 잔뜩 주고는 적비연을 지켜보기만 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엔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게…… 정말 투혈권왕인가?’
하지만 귀검단주를 꺾으면서 방심한 탓일까?
쒸이이잇, 푸욱!
“생각보다는 훌륭했소! 하하하!”
적비연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박아 넣은 문쾌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칠 합.
“하나 끝날 때까지 방심을…… 음?”
말을 잇던 그는 순간 움찔거리고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평소라면 손가락까지 깊게 파묻혀야 했다.
한데 손톱만 겨우 피부를 파고든 수준이 아닌가?
게다가…….
‘손, 손이……!’
조공을 펼친 오른손이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시커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적비연이 씨익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그렇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지.”
말을 마친 그가 문쾌의 뒷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바닥에 꽂아 버렸다.
꽈앙!
팔 합!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합성!
“이여업!”
적비연이 그대로 돌아서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날렸다.
쒸에에엥!
한기를 품은 검신이 화살처럼 날아가더니 주천랑의 뺨을 얇게 스쳤다.
피츗!
팍! 부르르르!
공교롭게도 날아간 검신은 삼 공자 종권악의 얼굴 바로 옆의 기둥에 박혔다.
털썩!
간발의 차로 화를 모면한 종권악이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런!’
지켜보던 파천신군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편 뺨에 가느다란 선혈이 생긴 주천랑은 퀭한 눈으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왜 그러고 서 있소? 아직 일 합이 남은 것 같은데.”
“일…… 일 합?”
설마…… 일부러 딱 십 합을 맞춘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천랑은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다음 순간 그가 무릎을 팍 꿇고는 포권하며 소리쳤다.
“월희계는 투혈권왕을 차기 련주로 지지할 것을 공식 선언합니다!”
그러자 월희계 무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하늘을 떨쳐 울릴 듯 외쳤다.
“차기 련주로 지지할 것을 공식 선언합니다!”
믿기 힘든 일이 눈앞에 펼쳐지자 장내 무인들은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짝! 짝! 짝!
문득 들려온 박수 소리에 무인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마침 정문을 통해서 한 청년이 해맑은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순수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 같은 얼굴.
청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와. 정말 대단하네요. 제가 기가 막힌 순간에 도착한 거군요. 사형, 축하드려요!”
그를 본 파천신군과 교패의 표정이 흠칫거렸다.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기는데, 청년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적비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한동안 뵙지 못한 사이에 엄청 강해지셨나 봐요!”
마침 옆에서 팔짱을 끼고 보던 극마가 눈살을 구기며 물었다.
-뭐냐? 이 순진무구한 녀석은?
적비연이 담담한 시선으로 청년의 맑은 얼굴을 보았다.
‘이 녀석이 오 공자 만리혈사, 연리하(延浬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