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83화 (184/301)

183. 만리혈사

“오랜만이다.”

적비연의 대꾸에 오 공자 연리하가 생긋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그럭저럭.”

“소식은 들었어요. 이번 임무를 아주 멋지게 수행하셨다고.”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

“역시 사형은 묵묵히 할 일을 하신다니까.”

연리하가 주변의 반응을 슬쩍 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시군요. 제가 딱 좋을 때 돌아온 것 같은데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이자, 연리하가 적비연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하여튼 재미없게 말씀하시는 것도 재주라니까. 이 정도면 그냥 저한테는 당당하게 말씀하셔도 되잖아요? 내가 좀 강해졌다! 하고.”

“하하. 그래, 내가 좀 강해졌다.”

적비연이 짐짓 웃으며 대꾸하자 연리하가 싱긋 웃더니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확실히 많이 바뀌셨네요.”

“내가?”

“네.”

“어디가?”

“그냥, 이것저것. 아주 많이.”

“좋은 뜻이길 바라마.”

“그럼요. 아주 좋은 뜻이죠.”

다시 한번 싱긋 웃은 연리하가 시선을 돌리더니 사예린에게 다가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사저, 보고 싶었어요!”

“거기서 말해.”

사예린이 얼른 물러나며 말하자, 연리하가 짐짓 울상을 지었다.

“에이, 오랜만에 예쁜 사저를 꼭 안고 싶었는데.”

“죽지 않고 돌아왔다니 다행이네.”

“아아! 그런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어딘지 보듬어주는 듯한 저 눈빛! 사저는 정말 매력덩어리예요!”

“그 입은 좀 다물어.”

“이봐! 이봐! 이런 말들이 날 너무 흥분하게 만든다고요!”

이쯤 되자 사예린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지켜보던 극마가 입을 척 벌렸다.

-저 여자가 감당 못 할 애도 다 있군.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좀 있긴 하지.’

-너하고는 잘 맞고? 그러니까 투혈권왕과.

‘글쎄, 딱히 악감정은 없지만 호의도 없달까? 사예린의 말대로 저 녀석은 그 속을 모를 놈이니까. 네가 보기엔 어때?’

-흐음. 솔직히 냄새가 난다.

‘냄새?’

-그래. 우리와 비슷한 부류.

‘사마외도의 향기인가?’

-그런 셈이지.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저 녀석에게서는 혈향이 난다.

적비연이 깊어진 눈으로 연리하를 물끄러미 보았다.

극마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역시 연리하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뭔가가 있으리라.

그 뭔가는 무공 실력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음흉함일 수도 있으리라.

‘일단은 조심해야겠군.’

-나쁠 건 없지.

한편 사예린과 한참이나 수다를 떤 연리하는 한쪽에 앉아 있는 삼 공자 종권악에게도 향했다.

“셋째 사형, 오랜만이에요!”

“흥, 이제야 집이 그리워졌나 보구나.”

“에구, 역시 셋째 사형은 절 미워하신다니까.”

“예뻐해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종권악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원래 종권악은 속내를 감추는 것에 서툰 자였다.

그는 늘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막내를 탐탁찮게 여겼다.

그럼에도 연리하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종권악의 속을 헤집는 말만 골라서 했다.

“아무래도 넷째 사형 밑으로 들어가는 게 영 불만이신가 봐요.”

“너……!”

“뭐 사저는 뜻이 그렇다고 쳐도 셋째 사형은 대사형 아래로 들어가도 되지 않아요?”

“지금 나보고 신의를 저버리라는 것이냐?”

“아, 죄송합니다. 전 사형이 그런 건 신경 안 쓰실 줄 알고. 헤헤.”

“뭐, 뭐야? 너 이놈……!”

“이크! 그럼 전 이만 대사형께 인사를 드리러 갑니다요!”

그렇게 연리하가 돌아서서 달려가자 지켜보던 자들 몇몇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종권악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 나서야 눈길을 먼 산으로 돌렸다.

상석으로 걸어간 연리하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깍듯한 자세로 포권했다.

“막내가 대사형을 뵙습니다.”

“순서가 틀린 것 같구나.”

“아, 죄송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저도 모르게 그만.”

“됐다. 사부님께는 인사드렸느냐?”

“예, 지금 막 뵙고 오는 길입니다.”

“잘했다. 그럼 먼 길 왔으니 그만 가서 쉬어라.”

“감사합니다, 대사형.”

예를 마친 연리하가 돌아서서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바람처럼 스며들었던 연리하는 다시 바람처럼 연회장을 벗어났다.

모두의 시선을 이끈 채.

* * *

딸깍.

흰색 바둑알이 바둑판에 놓였다.

바둑알을 내려둔 사람은 유형백이었다.

그가 마주 앉은 이자권을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수세에 몰렸군.”

바둑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자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방심했군요.”

“하나 자네라면 복안이 있겠지?”

“글쎄요. 어떨지. 이래서야 계가를 할 때까지 모르겠군요.”

딸깍.

이자권이 흑돌을 내려두자 유형백이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집중력이 중요하네. 바둑도, 우리 인생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보통 그럴 때 조심해야 하지.”

딸깍.

유형백이 백돌을 내려두었다.

이자권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고 나서부터는 유형백에게 단 한 차례도 진 적이 없었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몇 수를 채 두지 않았을 때부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방심인가? 아니면 집중력을 잃은 탓일까?

‘아니야. 그 녀석들을 두고 방심하거나 집중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어. 어쩌면 녀석들에게 운이 따라주었는지도 모르지.’

어느새 생각은 투혈권왕과 월희마녀에게 옮겨갔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얼굴이 자박자박 걸어왔다.

그를 확인한 이자권의 얼굴이 굳어졌고, 유형백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회주님.”

해맑게 인사하는 연리하.

유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강호 유랑은 즐거웠나?”

“네, 정말 드넓은 세상을 보고 왔지요. 이야, 그나저나 백돌이 회주님이시죠? 완전 유리한 형국이시군요?”

“허허, 그걸 벌써 알아챈 건가?”

“하하. 원래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더 잘 보인다잖아요?”

유형백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연리하는 우스갯소리로 답했지만, 유형백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한 번 슬쩍 본 것만으로도 대번 형세를 파악하다니.

사실 바둑에 식견이 없다면 그리 빨리 파악할 수 있는 형세는 아니었다.

“어디 보자. 흑돌 차례군요?”

“그렇다만?”

“제가 대사형을 대신해서 놔도 될까요?”

그러자 이자권이 이맛살을 팍 일그러뜨리고는 근엄하게 일렀다.

“버릇없구나. 어찌 회주님이 계시는 자리에서…….”

“허허, 아닐세. 오 공자가 오랜만에 련으로 돌아와서 신이 난 모양이군. 자네가 괜찮다면 난 상관없네.”

“저, 저야 회주님이 괜찮으시다면 막내에게 이번 수를 양보해도 괜찮습니다만.”

“그렇다면 어디 훈수꾼의 실력을 한 번 볼까?”

“아싸! 감사합니다, 회주님!”

천진한 표정으로 인사를 한 연리하가 흑돌을 집어 들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둑판에 놓았다.

딸깍.

“……!”

순간 유형백은 물론 이자권도 흠칫거리고는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끄음.”

유형백이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과연 묘수로다.

한참을 고민한 유형백이 다음 수를 두었다.

그리고 연리하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다음 수를.

그렇게 몇 번 오가지도 않았을 때, 유형백은 마침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완패일세. 자네가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또 몰랐군.”

“하하하! 과찬이세요. 세상 구경을 하다 보니 안목이 넓어졌나 봐요.”

“허허, 겸손하긴. 그럼 늙은이는 이만 일어나 보지. 모처럼 사형제지간에 나눌 대화가 많은 것 같으니.”

“그러지 않으셔도…….”

이자권이 말하려는데, 연리하가 활짝 웃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회주님!”

유형백이 자리를 벗어나자 방글방글 웃던 연리하의 표정이 대번 싸늘하게 변했다.

만약 연리하를 아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자권에게 일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말이냐?”

이자권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대꾸하자, 연리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몰라서 묻습니까? 어째서 사저가 사 사형에게 붙었냐고 묻는 겁니다. 대체 그동안 뭘 하신 겁니까?”

명백히 질책하는 말투.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막내 공자가 대공자에게 하극상에 가까운 광경이라니!

“어떻게 떠먹여 주는 밥도 먹질 못합니까?”

이제 연리하의 표정에는 아예 멸시가 담겨 있었다.

이자권의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때 연리하의 손이 이자권의 어깨에 살포시 얹어졌다.

“적아를 잘 구분하세요. 제가 언제까지 오늘처럼 훈수를 둘 수는 없는 겁니다.”

꽉 말아 쥔 주먹에서 스르르 힘이 풀렸다.

이자권이 쥐어짜듯 대답했다.

“명심하지.”

* * *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햇빛이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오랫동안 비워졌던 집은 곳곳에 소복한 먼지를 품고 있었다.

적비연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탁자와 선반을 천천히 손으로 쓸어 만졌다.

집이라는 공간은 참 이상하다.

한동안 비워졌던 곳이라지만, 그 주인이 이제 세상에 없으니 왠지 모를 적막과 쓸쓸함을 품고 있다.

마치 이 공간이 감정을 가진 것처럼.

뚜벅. 뚜벅.

적비연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자연히 시선에 닿는 물건들마다 관련된 추억이 떠올랐다.

처음 집을 장만하고 선반을 달던 날, 여추백은 못질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사다리 아래로 떨어졌었다.

선반 아래쪽 모퉁이가 깨진 것은 그때의 사고 때문이다.

여추백이 다시 사 주겠다고 한 걸 기어코 거절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 관계라는 것도 신기하다.

그 일 이후로 여추백은 심심찮게 반철룡의 집을 찾아왔고, 그때마다 반철룡은 동파육을 삶아서 대접해 주었다.

두 사람이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동파육과 술을 한잔할 때면 세상 모든 근심이 절로 지워지는 것만 같았다.

피식.

탁자를 손으로 쓸던 적비연이 웃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라도 그리운가보군.

‘뭐, 어쨌든 지금은 내가 가진 기억이니까. 복잡한 마음이지.’

게다가 반철룡은 적비연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서호검법을 창안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여러 고정관념을 깨는 데도 일조했다.

어쨌든 적비연으로서는 반철룡의 기억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런 추모 과정을 거치는 거냐?

‘글쎄, 추모라기보단 내가 그러고 싶어서. 한 번쯤 지나온 삶을 되짚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우리 주인은 꽤나 감상적이셨군.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지. 무인이란, 자고로 감상적이어야 한다고. 감정이 메마르고 칼처럼 차가운 자는 결국 그 칼에 영혼을 먹히고 만다고.’

-흥! 시답잖은 소리. 무인은 그저 강하면 땡이다.

‘그러니 지금 그 꼴로 육신도 없이 떠도는 귀신이 된 거야.’

-뭐, 뭣이! 으익! 아무리 주인이라도 못 참겠다!

극마가 연신 적비연을 향해 팔을 휘둘렀지만 번번이 몸을 뚫고 지나칠 뿐이었다.

적비연이 그런 극마를 내버려 두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정좌를 한 채로 운기를 하곤 했던 침상이 보였고, 그 옆으로는 검을 종류별로 꽂아둔 받침대가 보였다.

확실히 반철룡은 검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 기억 덕분에 서호검법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집안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반철룡이 얼마나 검소하고 소박한 인생을 살았던 것인지 알 수 있다.

어쨌거나 그렇게 주인을 잃은 것들에게 하나하나 눈길을 주고 있을 때, 마침 벽에 걸린 수실이 보였다.

붉은색과 황금색을 엮어서 만든 수실.

‘화령.’

오래전 그녀가 반철룡에게 건네준 수실.

반철룡은 단 한 번도 그 수실을 검파나 검집에 매고 다닌 적이 없었다.

괜한 상념으로 검술에 집중할 수 없게 될까 봐 꺼렸던 것이다.

-매정하군. 누가 말하길 무인은 감정적이어야 한다고 했는데 말이지.

극마가 꼬투리를 잡자 적비연이 말없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런 면에서 반철룡은 매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적비연이 수실을 손에 쥐고는 돌아서는데, 마침 문이 열리면서 한 사내가 들어서다가 우뚝 멈췄다.

적비연과 시선이 마주친 사내는 다름 아닌 여추백.

여추백이 적비연을 보고는 잠깐 당황해하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예를 갖췄다.

“주, 주군. 어떻게 여길……?”

적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로서는 벌써 여추백을 세 명의 신분으로 대하는 중이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여추백은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대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도 든다.

-확실히 저 녀석은 꽤 괜찮은 놈이니까.

적비연도 이번만큼은 극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여추백은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었다.

적비연이 집안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답했다.

“반 호법장이 그래도 나한테는 고마운 사람이 아닌가.”

여추백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얼핏 보니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적비연이 여추백을 스쳐 지나가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천천히 머물다 가시게.”

“감사합니다, 주군.”

“음?”

“이렇게…… 추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빌어먹을. 눈물 흘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찮아. 때론 그 감정이 무인의 무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오늘 같은 날은 눈물 좀 흘려도 어떤가?”

“주군…….”

“그래도 반 호법장은 인생을 훌륭하게 살았군. 자네 같은 수하가 있는 걸 보면.”

말을 마친 적비연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방을 빠져나가고 나서도 여추백은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채 포권 자세를 유지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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