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화령의 은공
또로로롱.
용정차가 찻잔을 채운다.
맑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적비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줄기 바람이 향긋한 차 내음을 묻혀 코끝에 머물다가 스러진다.
창밖에 펼쳐진 서호의 풍경은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도록 아름답다.
부드러운 바람결이 버들가지를 어루만지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바람결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적비연의 귓가에 닿았다.
“이렇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적비연이 절경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돌아보았다.
기루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게 차려입은 여인.
화령이었다.
그녀 역시 적비연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대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바라보던 그 애틋한 눈빛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완전한 타인으로서 무감하게 바라보는 표정.
“그사이 귀문회주가 되셨구려.”
적비연이 찻잔을 들며 말하자, 화령이 빙그레 웃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
귀문회주가 된 그녀는 좀 전에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때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꽃봉오리 같았다면, 지금은 화사하게 피어서 여유가 넘치는 꽃이다.
“우리가 전에 뵌 적이 있던가요?”
“아니오. 초면이오.”
“한데 그걸 어찌?”
“반 호법장으로부터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순간 화령이 움찔거렸다.
그녀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려왔다.
“그분이…… 제 이야기를 하셨던가요?”
“자주 했소.”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찻잔으로 가져가는 화령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저토록 가슴에 품고 있었던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미안하긴. 어차피 그 녀석은 주인의 영혼이 깃들지 않았더라면 죽을 목숨이었다.
‘차라리 그때 그가 떠났더라면 그녀는 더 차분하게 이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흥. 세상에 차분한 이별은 없는 거야. 특히나 사람이 죽을 경우에는.
적비연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는 사이 화령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렸다.
“여쭤 봐도 될까요? 그분이 저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좋은 이야기들이었소.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소. 자신이 유일하게 마음의 위안을 삼는 사람이라고도 했고. 그 오래전 당신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자신은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당신의 존재는 마음의 안식이자, 삶의 지표라고.”
“아……!”
화령이 탄성을 터뜨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내 담담하겠노라고 마음먹었지만 역시 허사였다.
반철룡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반철룡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도 울진 않았건만.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도록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참고 참았건만.
한참이나 소리 없이 흐느낀 화령이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거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탁.
적비연이 탁자 위에 뭔가를 올려두었다.
그것을 본 화령의 눈동자가 커졌다.
탁자에 놓인 것은 그녀가 직접 엮은 수실이었다.
검 손잡이에 달고 다니라며 건넨 선물이었다.
“이건…….”
“반 호법장의 유품이오. 내게 이걸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소. 오늘 당신을 찾아온 이유요.”
화령이 떨리는 손으로 수실을 집어 들었다.
“늘 가지고 다녔소. 더럽히기 싫다면서 항상 품 안에 지니고 다녔소.”
화령이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가슴을 쥐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 적비연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날아들었다.
“미안하오. 그를 지켜주지 못해서.”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반철룡이 그렇게 죽게 된 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니까.
이내 눈물을 흘린 화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분이 공자님을 지켜야 했지요. 그분은 아마 지금쯤 만족하고 계실 겁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했으니까요.”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부디 그러길 바라겠소.”
어려운 대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어색해지는 시간.
침묵이 삼켜 버린 그 시간을 적비연과 화령은 담담하게 버텨냈다.
한참 동안.
버들가지 끝에 걸린 해가 서호를 노을로 붉게 물들일 때까지.
차가 다 식었음에도 적비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가슴 한편에 맺힌 응어리가 노을에 어느 정도 녹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적비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보겠소.”
“감사합니다. 망자를 함께 기억해줄 이가 있다는 건 또 하나의 행운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내가 고맙소. 이왕 발걸음을 내디뎠으니 귀문회에 한 가지 정보를 주려고 하오.”
“정보라 하시면……?”
화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보라면 그 어느 곳보다 귀문회가 더 많지 않은가?
한데 그런 귀문회에 정보를 얻는 게 아니라 제공을 하겠다니.
하지만 적비연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마 어디에서도 입수하지 못한 정보일 거요.”
“무엇인지요?”
“사실 나는 반 호법장과 같은 분을 섬기고 있소.”
“그야…….”
“흑천련주가 아니오. 그분은 바로 벽력적가주요.”
“……!”
말을 마친 적비연이 몸을 돌렸다.
마침 화령이 얼른 그를 부르며 발길을 붙들었다.
“어째서!”
“……?”
“어째서 그렇게 위험한 정보를 제게 알려주시는 건지요?”
분명 대단히 중요한 정보지만, 발설하면 위험한 정보이기도 했다.
정보의 가치로 따지자면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다.
물론, 이 정보를 남에게 팔아먹을 생각은 없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정보다.
적비연이 웃었다.
“당신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마음에 품었던 이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무엇을 하다가 왜 죽었는지조차 모른다면…… 너무 슬픈 일이 아니겠소?”
사실 말을 하면서도 왠지 비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정말 반철룡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자신의 이기심은 아닌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기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신념이 곧 반철룡의 신념이었다고.
어쨌거나 그 인생의 연장선에서 한참을 달렸으니까.
화령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감사합니다. 그 정보도. 이 수실에 대한 이야기도.”
“그건 그저 유언을…….”
“알고 있었어요. 그가 이 수실을 단 한 번도 차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물론, 품에 지니지도 않았다는 것을. 제가 반 호법장님을 모를까요? 그분의 성품상 제가 드린 수실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애물단지였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버리지 않고 보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입니다. 애써 위로해 주시지 않아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답니다. 진심으로.”
적비연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쩐지 그녀의 마음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저토록 숭고한 사랑은 그 사람의 품격을 높일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화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 귀문회는 결코 신세 진 것을 잊지 않습니다. 특히 저는 더욱 그렇지요.”
“……?”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저도 공자님께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적비연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며 물었다.
“어떤……?”
“일전에 백발광인에 대해서 반 호법장님이 물어보셨다고 하더군요. 혹시 그 또한 벽력적가주님의 뜻이었습니까?”
“그렇소. 덕분에 나도 백발광인의 정체에 대해 자세히 알았소.”
이 또한 사실이다.
투혈권왕은 백발광인의 정체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기에.
“그것과 관련한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최근 백발광인에 대해 묻는 자가 또 한 명 있었습니다. 백발광인의 행방과 흑천련이 그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등에 대해서 물어봤지요. 왠지 이 일에 대해 공자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게 누구요?”
화령이 가만히 적비연을 보며 답했다.
다음 순간 화령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혈조야귀입니다.”
“혈조야귀? 교 선생의 심복 말이오?”
“그렇습니다.”
화령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참, 그놈은 교패와 한패가 아니었냐?
‘그렇지.’
-그럼 백발광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설마 교패도 백발광인에 대해서 모른다는 거냐?
‘그건 아니겠지. 교패는 흑천련에서도 최고수뇌부니까. 단지 그 정보를 혈조야귀와 공유하지 않은 거야.’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련주의 제자인 자신조차도 백발광인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더욱 문제잖아? 제 주인이 공유하지 않은 정보인데 귀문회를 통해서 몰래 캐내고 있다니. 뭔가 이상한데?
극마의 말대로다.
교패는 대체 왜 백발광인의 정보를 파헤치려고 할까?
적비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자 화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요한 정보를 하나 더 드리지요.”
“그래도 되겠소?”
“아까는 절 믿고 알려주신 정보에 대한 답례라면, 이번에 드리는 정보는 이 수실에 대한 답례라고 하지요.”
“…….”
“본 회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혈조야귀가 무사 귀환한 상황에 이상한 점이 많았습니다. 또한 무림맹을 탈출한 부분에서도.”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설마 그가 무림맹과 내통한다는 거요?”
“거기까지는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석연찮은 부분이 있긴 합니다.”
“고맙소. 도움이 되는 정보였소.”
적비연이 포권을 하자, 화령이 수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조금은…… 만약 그분이 이 정보를 들었다면 조금은 기뻐하셨을까요?”
“분명 그랬을 거요.”
“다행입니다.”
화령이 젖은 눈으로 활짝 웃었다.
-주인은 거짓말쟁이군.
‘모두를 위해서 때론 거짓이 정답일 때도 있는 거지.’
-주인을 위해서가 아니고?
‘물론 나를 위한 거짓말이긴 하지.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도 거짓을 말하는 편이 나아.’
적비연은 미소 짓는 화령을 보며 분명 그렇다고 생각했다.
적비연이 입을 열었다.
“이왕 도와주는 김에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소?”
“화령의 은공을 사용하시는 건지요?”
“그렇소.”
* * *
권왕전 후원으로 사예린이 들어섰다.
“정말 많이 컸네, 우리 권왕.”
“갑자기 왜 또 시비요?”
적비연이 사예린을 돌아보며 묻자, 그녀가 싱긋 웃더니 느닷없이 바닥을 차고 날아왔다.
팟!
쒸이이잉!
흑월아가 달빛을 품은 채 곧장 적비연의 목을 노렸다.
일순 흑천투권공을 일으킨 적비연이 맨손으로 흑월아를 맞잡았다.
콰악!
“진심으로?”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사예린이 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진심이지. 영 괘씸해서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 만나자고 얘기를 했는데, 아침부터 뭐가 그리 바쁘신지 이제야 시간을 내주다니.”
“일이 있었소.”
“아, 그러셔? 그나저나 정말 강해졌네? 빙백독광사 덕분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너무 다른걸? 백발광인과 싸울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혹시 백발광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소?”
“그게 궁금해서 이번엔 날 먼저 찾은 거야?”
“아니,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고.”
“그게 무엇이든 그 성장한 실력으로 날 먼저 누를 수 있다면 답해주지!”
파앙!
사예린이 내공을 증폭시키는 것과 동시에 훌쩍 물러났다.
곧이어 그녀가 재빨리 흑월아 다섯 자루를 연이어 던졌다.
쒸쒸쒸쒸쒸이잉!
허공을 베며 날카롭게 파고드는 흑월아!
그 기세만으로도 섬뜩할 정도인데 적비연은 그대로 일권을 내질렀다.
‘뭐, 저리 무식한……!’
사예린이 깜짝 놀라는 사이, 적비연의 주먹은 날아드는 흑월아 다섯 자루를 모두 쳐냈다
따다다다다앙!
콰콰콰콰콰앙!
놀랍게도 흑월아 다섯 자루가 모두 후원 한 곳의 바위로 날아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들었다.
마치 자로 잰 듯한 간격.
하지만 사예린은 놀랄 겨를조차 없었다.
팟!
그대로 몸을 날린 적비연이 어느새 사예린에게 다가와 목을 움켜쥐더니 전각 벽까지 거칠게 밀어붙였다.
콰당!
“크윽!”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그럼 이제 말해주겠소?”
“하아, 난 네가 이렇게 맹수처럼 거칠게 변할 때가 제일 좋더라.”
-하악! 주인아, 잘해봐라. 이 여자 가능성이 있다!
극마의 호들갑에 적비연이 싸늘하게 답했다.
“닥쳐.”
“어머? 정말 거치네?”
“사저보고 한 말이 아니오.”
“그럼?”
“신경 쓸 것 없소. 그보다 이제 질문에 답해줄 거요?”
사예린이 피식 웃었다.
“좋아. 정말 궁금하다는 질문이 뭔데? 내가 아는 거라면 숨기지 않고 답해줄게.”
적비연이 사예린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혹시 하기룡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 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