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금역(禁域)
사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기룡? 그게 누군데?”
“사저와 장난치고 싶은 마음은 없소.”
“장난 아닌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하기룡이 누구야? 혹시 그 사람도 벽력적가주와 관련된 자야? 본 련에 갇혀 있는 거야?”
엉뚱하게도 사예린은 오히려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옆에 선 극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모르는 것 같다. 역시 이 여자와는 그저 이불 덮고 붕가붕가…….
“정말 모르시오?”
적비연이 극마의 말을 무시하며 재차 물었다.
사예린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니까.”
“천하용봉대회에서 실종된 하기룡 말이오.”
“천하용봉대회면 무림맹에서 주관했던 그 대회 말이지? 거기서 하기룡이라는 자가 실종됐어? 왜?”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사예린의 반응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
‘뭐지? 흑천련에서 납치했던 게 아닌가? 아니면, 사예린도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된 작전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적비연에게 사예린이 질문을 이었다.
“그런데 그게 왜 궁금한 거야? 그것도 벽력적가주의 지시? 도대체 그 벽력적가주가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 궁금하네. 바위 같은 우리 사제를 이렇게까지 홀려 버렸다니. 나도 그 남자 소개 시켜주면 안 돼?”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사예린을 놓아주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러겠소.”
“대체 나도 모르게 벽력적가주는 언제 만나고 다닌 거야?”
“뭐,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못 만나겠소?”
적비연이 대충 대답하고는 걸어가자 사예린이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어쨌든 약속한 거다? 그 남자 소개시켜 주기로!”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고, 극마가 옆에서 연신 키들거렸다.
-다 된 밥이다. 주인아. 아니, 밥은 이쪽인가? 클클클.
‘시끄럽다.’
* * *
구름이 잔뜩 낀 밤.
나뭇가지를 밟고 선 적비연은 높게 쌓인 담장 너머로 보이는 전각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현무장(玄武場).
흑천련에서도 극히 일부 허가된 자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금역(禁域).
련주의 다섯 제자들도 현무장에는 들어갈 수 없다.
-저기냐? 그 백발광인을 데리고 실험하던 곳이?
‘아마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하긴. 다른 곳은 비급서를 모아놓은 곳이고, 다른 한 곳은 각종 신병이기를 모아놓은 비고라고 하니 남은 건 저곳뿐인가?
총군사 요당이나 교패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만 그들을 만나서 이것저것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일.
-그런데 주인은 왜 그 백발광인에게 집착하는 거냐?
‘당연히 내가 먹을 조직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냐? 나아가 강호일통을 하려면 더욱 알아야 하고. 만약 백발광인 같은 괴물을 흑천련이 실험으로 만들고 있는 거라면…….’
-강호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겠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 정점에 서겠다고 다짐한 순간 세상의 모든 현상이 그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그 두 사람을 만나서 물어볼 수 없으니 직접 정면승부를 보겠다는 거군?
‘그래, 잠입해서 내 두 눈으로 확인해볼 수밖에.’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복면을 덮어썼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그가 은신술을 펼치자 신형이 허공에서 지워지듯 사라져 갔다.
팟!
순간 바람이 된 적비연이 현무장의 담장을 넘어 장내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검술을 펼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호흡이다.
들숨과 날숨은 모든 무공의 기본이다.
권각술도 마찬가지.
은신술 또한 그렇다.
한 호흡에 한 번의 은신이 펼쳐진다.
은신술을 깊이 알지 못하는 자는 내내 몸을 감쪽같이 숨기는 것이라 착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들숨과 날숨이 교차하는 그 찰나가 허점이 된다.
그러니 한 호흡에 최대한 많은 움직임을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
발자국도 남지 않도록 바람처럼 움직이기 위해서는 단연 막대한 내공이 필요하다.
스스스슷.
적비연은 때론 바람처럼, 때론 그림자가 되어 장내로 스며들었다.
한 호흡에 전각 하나씩 이동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무장의 경계는 별로 삼엄하지 않다는 점이랄까?
사실 현무장 자체가 흑천련 내원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외부인이 현무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흑천련 외원을 뚫고, 높이가 까마득한 내원의 담장을 넘어서 현무장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 자체만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굳이 현무장의 경계를 철저히 할 필요는 없으리라.
굳이 위험요소를 꼽으라면 지금처럼 내원에서 지내는 내부자들인데, 그 어떤 문파도 문도들의 배신까지 감안해서 내부 경계를 삼엄하게 하진 않는다.
-그래서 믿는 도끼에게 발등 찍힌다는 거지. 킬킬.
적비연은 극마의 이죽거림을 들으며 빠르게 달렸다.
쉬싯! 쉬이이잇.
오랜만에 펼치는 은신술이었지만, 운귀의 몸으로 지낸 덕분에 거짓말 조금 보태면 숨결마저 지울 수 있을 정도.
그렇게 담장에서 가까운 순으로 전각을 모두 돌아보았지만 특별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곳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흑회각(黑回閣).
-저기에도 아무것도 없다면 허탕 치는 거군.
‘뭐라도 찾길 바라야지.’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다시 숨을 들이마신 후 바닥을 차고 쏘아갔다.
쉬이이잇.
바람은 부드럽게 전각의 그림자로 스며들더니 이내 창문을 통해서 실내까지 흘러들어 갔다.
착!
바닥에 착지한 적비연은 몸을 잔뜩 낮추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흐음. 어째 느낌에 별론데?
극마의 말대로 실내에는 이렇다 할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빽빽하게 나열된 집무 책상에는 온갖 장부와 문서가 가득 쌓여 있을 뿐.
-여기가 정말 그 무시무시한 장소가 맞긴 한 거냐? 겉보기엔 그저 회계 장부나 정리하는 곳 같은데?
‘겉만 보니까 그렇겠지. 오히려 이런 단출한 사무 공간이라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흠,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군.
적비연이 숨을 죽인 채 천천히 움직였다.
‘이상한 점은 또 있어.’
-뭐냐?
‘아까부터 여긴 가장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야. 그런데 너무 조용해. 사람은커녕 개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잖아?’
-듣고 보니 그렇군. 그나저나 주인은 사파 녀석들 몸뚱이에 영혼이 깃들면서 입이 꽤 거칠어졌군.
‘일단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적비연이 잰걸음으로 실내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역시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드르르륵!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 일부가 갑자기 회전하는 게 아닌가?
-숨어라!
적비연이 얼른 천장으로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완전히 묻혔다.
-과연! 저기에서 사람이 나오는군!
극마가 눈을 빛냈다.
그의 말대로 절반쯤 돌아간 책장 안쪽에서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피 냄새!’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의 전신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호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때마침 책장이 다시 회전하려는 순간, 적비연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사사삭!
드르륵, 철컥!
“음?”
책장 안쪽에서 나온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방금 뭔가 뒤에서 움직인 것 같은데.”
“그야 기관이 작동한 거겠지.”
다른 한 명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자, 곧 그도 수긍하는 눈치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책장 안쪽으로 들어선 적비연은 양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좁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극마가 혀를 내둘렀다.
-뭐야? 여기 엄청 좁잖아? 아니, 이 좁은 곳에서 남자 둘이 뭘 하다가 나온 거야? 이 더러운 것들이 남색을……!
‘그게 아냐. 승강기일 거다.’
-승강기라니?
‘기관 장치다. 본 가에도 승강기가 있었지.’
-아, 그거 말이군. 하여튼 세상 좋아졌다니까. 나 때는 말이야. 이렇게 통째로 움직이는 기관 장치는…….
덜컹! 우우우웅!
극마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두 사람이 탄 공간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비연의 말대로 좁은 공간은 승강기였다.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간 승강기가 마침내 멈춰 섰을 때, ‘땡’ 하는 종소리와 함께 눈앞의 벽이 회전했다.
드르르륵!
무심히 걸음을 내디디려던 적비연이 순간 우뚝 멈췄다.
하필이면 바로 앞에 조금 전처럼 백의(白衣)를 입은 세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이 적비연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엇? 웬, 웬 놈……!”
쉬이이잇!
찰나지간 적비연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갔다.
탁탁탁!
눈 깜빡할 사이에 세 사람의 혈도를 점한 적비연이 쓰러지는 그들을 부축하고는 벽에 기대어 두었다.
‘이자들, 무인이 아냐.’
현재 적비연의 무공 수위가 상당한 수준이긴 하지만, 만약 이들이 무인이었다면 세 사람을 이처럼 가볍게 제압할 순 없었으리라.
실제로 체내에서 내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닌 게 다행이지. 어쨌거나 제대로 찾아온 모양인데. 이런 은밀한 장소라면 말이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의인 한 명이 들고 있던 야명주를 뺏어 들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어둑한 통로는 세 방향으로 갈라져 있었다.
-자고로 남자는 직진이지.
적비연이 극마의 말에 따라 정면으로 걸어갔다.
딱히 극마의 말에 동의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으므로.
그 후로도 적비연은 갈림길이 나타나면 망설임 없이 직진을 선택했다.
‘어차피 돌아갈 때를 생각하면 제일 빠르고 간단한 길이 좋으니까.’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저만치 앞에서 스며드는 빛이 보였다.
적비연이 속도를 높이려는데,
“끄아아아악!”
느닷없는 비명 소리가 통로를 따라 들려왔다.
흠칫거린 적비연이 천천히 통로 끝의 난간으로 다가갔다.
통로 끝은 커다란 공동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난간 아래로 공동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건……!’
공동 한가운데에 사지가 벌려진 채로 구속되어 있는 백발의 사내.
순간 적비연은 그가 백발광인 설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치렁치렁 늘어진 흰색 머리카락만 비슷할 뿐 설규가 아니었다.
-주인이 진급 심사할 때 상대했던 녀석 중 한 명인 것 같다. 기운이 비슷하군.
적비연도 대충 기억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모두 가면을 쓰고 있긴 했지만 어쩐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운만으로 상대를 식별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괴인들이 풍긴 기운과 백발광인, 그리고 지금 저 괴인의 기운은 그만큼 이질적이고 독특한 면이 있었다.
“크아아아악!”
몸부림치듯 고개를 흔들면서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괴인.
적비연은 내공으로 안력을 높이고는 괴인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가만히 살폈다.
괴인을 둘러싼 네 사람은 승강기에서 만났던 자들과 같이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옷차림새나 행동거지를 보아서는 무인이라기보단 서생이나 의원으로 보였다.
‘저들이 뭘 하는 거지?’
-무슨 실험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극마의 말대로 백의인들은 괴인을 상대로 모종의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괴인의 전신에는 종류를 다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많은 침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신의 아상의 기억을 가진 적비연조차도 처음 보는 종류의 침이었다.
“이 개놈들아! 뽑으란 말이다앗! 으아아악!”
괴인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와중에도 백의인들은 연신 침을 꽂았다가 뽑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 뒤에 책상에 앉은 백의인들이 연신 붓을 들고 종이에 뭔가를 적어갔다.
공동 벽면에는 여섯 명의 무인이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흑의를 차려입었고 무공 수위는 절정 이상으로 보였다.
‘겨우 저들 수준으로 저 괴인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괴인을 구속한 건 역시 공진철인가 보군.’
-공진철에 구속당하고도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을 뿜어낸다니. 도대체 저 괴물은 어떻게 만들어진 거야?
‘흑천련이 비밀리에 진행하는 음모일지도’
-흐음. 정파 무인들을 납치해서 살아 있는 강시라도 만든다면…… 기가 막힌 수법이긴 하네.
표현이 우습지만 적비연은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이지를 잃은 자가 오로지 강맹함만 지니고 살아 움직인다면 강시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나?
그러는 사이 괴인이 또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아아! 날 내버려 둬! 이 개자식들아! 끄아아아악!”
고함을 내지르는 괴인의 머리카락이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백발로 되돌아갔다.
곧이어 그의 동공이 온통 검게 물들면서 눈자위의 핏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끄아아아아! 다 죽여 버리겠어! 이 천벌을 내릴 놈들! 다 죽여 버린다아아악!”
덜컹! 철컹철컹!
괴인이 고함을 내지르며 사납게 몸부림치자 공진철마저도 금방 끊어져 버릴 듯했다.
그의 팔다리를 고정한 열십자(十) 모양의 금속이 부러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질렀다.
타앙! 철커엉!
“놔! 내 몸에서 침을 빼란 말이다! 이 개새끼들! 죽여 버릴거다앗!”
덜컹! 철컹철컹!
극마가 눈살을 구기고는 중얼거렸다.
-저거…… 위험하다. 저러다가 정말 야단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