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87화 (188/301)

187. 탈출

“혈조, 안에 있는가?”

교패가 문지방을 넘어서며 뱉은 소리에 시종 하나가 얼른 다가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나리, 오셨습니까요?”

“혈조야귀는 안에 있는가?”

“지금은 출타 중입니다.”

“어디로 간 거지?”

“그것은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언제 나간 건가?”

“한 식경이 조금 넘은 것 같습니다.”

“잘 알겠네. 혹시 자네 주인이 돌아오면 내가 찾는다고 일러주게.”

“명심하겠습니다요. 그럼 살펴 가십시오.”

시종이 정문까지 배웅하면서 연신 허리를 굽실거렸다.

교패가 막 정문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백의를 차려입은 사내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교패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무슨 일인가?”

“현, 현무장에 비, 비상이……!”

백의의 사내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을 꺼냈다.

몇 마디 내뱉지 않았지만 교패는 그 말뜻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현무장에 비상이 걸려? 대체 무슨 일로?”

“그것이 폭주했습니다!”

“폭주라니? 어떻게?”

“침을 놓는 과정에서 금제가 풀린 듯합니다.”

“혼몽초를 사용했어야지!”

“혼몽초를 더 준비하려고 했으나, 어째서인지 혼몽초를 가지러 간 자들이 승강기 앞에서 기절해 있는 바람에…….”

“기절? 하면 현무장에 침입자라도 있었단 말인가!”

교패가 노한 음성을 토해내자 백의인은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니? 한심한……!”

백의인을 무섭게 추궁하던 교패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무인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시술만을 집중적으로 배운 의원에 가깝다.

침입자가 생긴 걸 그에게 따질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됐나?”

“승강기를 멈춰두고 안에 있는 자들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럼 거기 갇힌 자들이 위험하지…….”

말을 꺼내던 교패가 곧 입을 다물었다.

비상이 울렸다면 괴인을 구속하던 장치가 모두 파열됐다는 뜻이리라.

하면 그곳에 있던 자들은 벌써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 승강기 작동을 강제로 멈춰 둔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잘했다. 흑령산(黑靈酸) 발포는?”

“지금쯤 발포되었을 겁니다.”

교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령산은 시커먼 빛깔의 액체로, 피부에 닿는 순간 즉시 타들어가면서 혈관은 물론 뼈까지 부식하게 만드는 맹독이었다.

아마 지금쯤 침입자가 누구든 처절한 죽음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리라.

교패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가지.”

* * *

꽈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공동에 쩌렁쩌렁 울렸다.

동시에 포탄처럼 튕겨 나간 괴인이 철문을 일그러뜨리며 쿡 처박혔다.

철문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것을 보면 평범한 재질은 아니리라.

‘만년한철쯤 되나 보군.’

“크르르르……!”

괴인이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을 토해냈다.

쏴아아아……!

아까부터 천장에서는 독수가 뿌려지고 있었다.

치치이익……!

괴인의 피부에 닿은 독수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크읏!”

신음을 흘린 괴인이 내공을 운기하자 전신으로 얇은 기운이 덧씌워졌다.

호신강기.

우두둑!

목을 꺾은 괴인이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는 으르렁거렸다.

“너…… 죽인다.”

“우선 말로 하자고 하면 안 통하겠지요?”

“죽인다!”

파밧!

찰나지간 괴인이 몸을 붕 날려 왔다.

퍽! 퍼퍽! 퍽!

주먹이 쉴 새 없이 뻗어오면서 적비연의 주먹과 손바닥에 부딪쳤다.

일부는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허공만 때렸다.

극마와 일체가 된 적비연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용호상박을 이룰 정도였다.

아니, 극마와 일체가 되었음에도 한동안은 적비연이 조금 밀리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공동 천장에서 독수가 뿌려지면서부터는 상황이 역전됐다.

독수에 노출된 괴인의 피부는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부식되기 시작했고, 지독한 고통으로 몸부림쳐야만 했다.

결국 괴인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호신강기를 일으켜 독액이 피부에 닿기도 전에 기화시켜 버렸다.

문제는 이 독수가 공동이며 통로며 가릴 것 없이 쏟아져 내린다는 점.

그 바람에 괴인은 계속해서 호신강기를 펼치고 있어야 했다.

호신강기 자체가 상승무공에 해당하기에 어마어마한 내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 상태에서 무공 격차가 엇비슷한 적비연을 상대해야 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할 수밖에.

반면 적비연은 빙백독광사 내단을 복용한 덕분에 만독불침지체가 되어 흑령산의 독효가 미미한 수준이었다.

‘뭐, 피부가 조금 따갑긴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괴인이 내지른 발이 적비연의 가슴 정면으로 향했다.

적비연이 얼른 두 팔을 열십자로 교차하면서 막아냈다.

파아앙!

촤아아앗!

뒤로 서너 장이나 미끄러진 적비연이 그대로 바닥을 차면서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한 호흡에 일 권!

꽈앙!

“크읍!”

마찬가지로 두 팔을 교차해서 막아낸 괴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터뜨렸다.

곧이어 다시 왼 주먹이 날아간다.

꽈앙!

이번에는 괴인도 버티지 못하고 두 팔이 활짝 펼쳐졌다.

아직까지도 한 호흡이다.

그리고 마지막 일권으로 호흡은 끝난다.

쉬이이잇!

퍼억!

“크어억!”

날아간 일권이 그대로 괴인의 가슴에 적중했다.

가슴을 숙이면서 충격을 최대한 완화했지만 괴인의 등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간다.

맞은 부위는 가슴인데 시커먼 주먹 자국이 등에 새겨지는 순간,

투아앙!

기가 폭발하는 것만 같은 소리와 함께 괴인이 그대로 날아가면서 벽에 처박혔다.

쿠드득……! 콰당!

무너져 내리는 돌 부스러기와 함께 괴인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치이이이익……!

호신강기가 사라지면서 흑령산에 닿은 피부가 다시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끝났군.’

슈우우우.

-다행이다.

때마침 적비연의 몸에서 빠져나온 극마가 팔짱을 낀 채로 괴인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조금 늦었더라면 적비연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적비연이 괴인에게 다가가서 몸을 돌려 눕히자 허옇게 뒤집힌 눈동자가 드러났다.

-누군지 알겠냐?

‘흐음. 글쎄…… 음?’

괴인의 목에 새겨진 상처가 적비연의 눈에 들어왔다.

꽤 깊어 보이는 상처.

적비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칠보혈도(七步血刀)……?’

-칠보혈도?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어서 잘 몰랐는데, 이 상처는 분명히 칠보혈도 맹사현(孟事賢)이야.’

-뭐 하는 놈이냐? 별호를 보니 도를 쓰는 아이인 것 같은데.

‘맞아.’

칠보혈도 맹사현.

그는 칠 년 전에 사라진 정파 인물로, 사파 무인이라면 이를 간다고 알려진 자였다.

특히 그의 독자무공인 참마도법(斬魔刀法)은 일곱 걸음 안에서 반드시 피를 보게 한다는 뜻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칠 년 전에는 초절정 중단에 이르렀던 고수.

‘이 상처는 내가 치료해 준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아상이 치료해 준 거지만.

-그래서 알아본 거군.

확실히 상처가 아니었다면 몰라볼 뻔했다.

얼굴이 너무 많이 상해 있었기에.

마침 천장에서 부슬부슬 뿌려지던 흑령산이 차츰 잦아들면서 완전히 멈췄다.

-저놈들 이제 들어올 생각인가 본데?

극마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돌아가자.’

극마의 말대로 이곳으로 무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면 늦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좀 더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복면이 흑령산에 녹아 버렸기 때문에 쓰러진 백의인의 옷자락을 대충 찢어서 얼굴에 둘렀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는 통로를 따라 달렸다.

승강기 앞에 다다르자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려오는군.

적비연이 벽면에 등을 바짝 붙이고는 회전벽이 움직이길 기다렸다.

이윽고,

땡!

승강기 소리와 함께 벽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회전했다.

찰나,

파밧!

적비연의 신형이 바람처럼 승강기 안으로 스며들었다.

퍽! 퍼퍽!

비좁은 공간에서 부상 없이 적을 처리하려면 한 호흡에 최소 세 명은 처리해야 한다.

정확히 세 명이 안면과 단전, 뒷덜미를 가격당해서 쓰러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웬 놈……!”

나머지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려고 했지만 적비연의 발길질이 그보다 빨랐다.

퍼억!

“커억!”

쿠웅!

발에 가슴을 얻어맞은 무인이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적비연은 곧바로 쓰러진 자들을 승강기 밖으로 던져 버리고는 기관을 작동시키는 단추를 눌렀다.

드르르륵!

회전벽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기관이 작동하면서 승강기가 위로 올라갔다.

땡!

도착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눈앞의 벽이 회전했다.

드르르륵!

“엇!”

“웬 놈이냐!”

“잡앗!”

순간 승강기 앞에 서 있던 열댓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겨눈 채 달려들었다.

적비연이 얼른 검을 휘두르면서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쉬이잇, 까앙!

섬광이 일어나면서 달려들던 적들이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간다.

초식은 없다.

오로지 최단거리를 이용한 살검을 펼칠 뿐이다.

패도적이면서도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

쉬까앙! 푸욱!

“커억!”

푹푹푹!

“크아악!”

“아악!”

한 줄기 빛이 터지면 어김없이 비명이 차오르고 피가 뿌려진다.

무인들의 눈빛에 당혹감이 드러난다.

초식도 없고, 격식도 없는 칼부림.

지극히 단순한 투검인데 손을 쓰기도 힘들 만큼 빠르고 난해하다.

싸움에 이골이 난 자의 움직임이다.

수십 년 동안 전장에서 구른 군인의 검술과도 닮았다.

하지만 무인 중에 누가 그런 경험을 할까?

흰색 천으로 얼굴을 가렸으니 누군지 알아보기도 어렵다.

쉬이잇! 푹!

“크억!”

일곱 번째 무인의 목에 검이 박혔을 때, 포위를 벗어날 수 있는 틈이 생겼다.

-달려라!

극마가 소리치기도 전에 이미 적비연은 바닥을 차고 날아갔다.

순식간에 창틀을 밟고 날아오른 적비연은 단숨에 현무장 외벽까지 다다랐다.

파바밧!

그야말로 야조처럼 허공으로 솟아오른 적비연이 높은 담장을 발로 차고는 훌쩍 뛰어넘었다.

휘리릭, 탁!

마침내 현무장 담장까지 넘은 적비연.

이걸로 한시름 덜 수 있을까 했지만,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적비연이 미간을 팍 구긴 채 눈앞에 마주친 자를 바라보았다.

-교패!

하필이면 담장을 넘어선 그곳에 교패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현무장의 소란을 보고받고 오는 길이리라.

교패가 미간을 슬쩍 구기며 물었다.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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