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탈출
-저자도 참 답답하군. 정체를 밝힐 것 같으면 복면을 썼겠어?
‘내 말이.’
적비연이 피식 웃으면서도 내심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상대는 교패다.
흑천사왕 중 한 명.
그를 상대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교패는 바늘을 사용한다.
그의 바늘은 비수나 마찬가지.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순간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한다.
‘상황이 엿같이 돌아가네.’
적비연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극마와 일체화를 할 수 있다면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만, 이미 괴인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다 채워 버렸으니 방법이 없다.
교패가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아무래도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가 보군.”
극마가 교패를 노려보며 주의를 주었다.
-조심해라, 주인. 저놈은 시간을 끌면서 주인의 기도를 살펴보는 거다.
‘알고 있어.’
어디 기도뿐일까?
호흡과 눈빛,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 특징을 잡아내려는 거다.
만약 한마디라도 말을 꺼낸다면 거기에서도 특색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렸다는 것은 많은 것을 숨길 수 있지만, 한 가지 정황만은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얼굴 자체가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
살아서 돌아갈 의지가 있다는 점.
만약 복면을 쓰지 않았더라면 교패는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 심문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복면을 착용했으니 죽여서라도 얼굴을 확인하려고 할 거다.
후우우웅!
교패의 전신에서 쏘아져 나온 기운이 적비연의 전신을 더듬는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한 행동인 것과 동시에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교패가 눈을 가늘게 떴다.
‘묘한지고.’
일단 눈에 보이는 체격과 풍겨지는 기도만 보면 권사처럼 느껴진다.
한데 격기를 통해 체감한 기운은 다소 이질적인 흐름이 있다.
‘검사?’
아닌가? 권사가 맞나?
게다가 기도를 갈무리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럽다.
족히 수십 년은 내공 수련을 한 자 같다.
처음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살수나 호신위들에게서나 볼 법한 은신의 기운을 느꼈다.
한데 지금은 또 다르다.
마치 저 복면 안에 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들어 있는 듯한 착각.
“묘한 사술을 쓰는구나.”
이 묘한 감각을 사술이라는 표현 말고 달리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웃어?’
교패가 눈살을 슬쩍 구기는 순간,
팡!
적비연이 발바닥의 용천혈에서 기를 폭발시켰다.
그의 신형이 귀신처럼 날아갔다.
쉬이이이잇!
일직선으로 찌르는 검!
탓!
삐잉, 땅!
교패가 뒤로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바늘이 날아가면서 검신을 때렸다.
검이 휘청거리면서 궤도를 이탈하자, 적비연은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재차 교패의 목을 베어갔다.
교패가 목을 꺾자,
쉬이이이잉!
날카로운 검기를 품은 검이 귀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가면서 허공으로 풀썩 날아올랐다.
검신이 스쳐 지나간 탓에 귀에서는 이명이 울린다.
삐이이이.
이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파밧!
교패가 바닥을 차면서 곧장 적비연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삐빙!
두 자루의 바늘이 손을 떠나자,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팽이처럼 회전했다.
휘리리리릭!
따다앙!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란 바늘이었지만 불꽃을 일으키며 튕겨 나간다.
뿐만 아니라 회전하는 적비연의 신형이 서너 장이나 물러났다.
바늘에 강기를 입혔기 때문이다.
“크읏!”
손바닥이 저릿저릿 아려온다.
적비연이 미간을 좁히고는 교패를 노려봤다.
교패가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는 적비연을 쏘아보았다.
“검사였군.”
찰나,
파밧!
적비연이 대답 대신 다시 바닥을 차며 바람처럼 쏘아져 나갔다.
쉿쉿쉿!
검봉이 화살처럼 날아들면서 교패의 전신을 찌른다.
하지만 교패 역시 현란한 보법을 밟으며 적비연의 검봉을 피했다.
무수하게 뻗어나간 검봉은 마치 여러 개의 검처럼 쪼개졌고, 교패는 그림자를 이끌면서 분신술을 쓴 것처럼 여러 명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철저한 살검!’
교패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제법 정석 과정을 거친 검사처럼 보였다.
한데 지금은 오로지 살기만을 담아 퍼부어대는 살검이다.
검사가 아니라 살수였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 예측 밖의 공격이 이어진다.
파앙!
검을 들지 않은 왼쪽 주먹이 그대로 교패의 가슴을 때린 것이다.
“큽!”
신음을 삼킨 교패가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쿨럭!”
울컥 치민 구토에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방심했다.
상대가 검을 후려오기에 검사라고 단정 지은 게 실수였다.
‘권법까지?’
물론 검사가 권법을 쓸 수는 있다.
한데 누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타고난 무골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무공을 주력으로 사용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눈앞의 복면인은 검법도, 권법도 모두 제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나?
게다가 느껴지는 기도도 묘하기 짝이 없다.
시종 사공으로 느껴지는가 하면, 어쩔 때는 그 기운이 지극히 정순하게 느껴진다.
그러다가도 언뜻 마기마저 느껴지는 건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도대체 누구냐!’
교패가 미간을 팍 구기고는 양손을 활짝 펼쳤다.
삐비비비비비잉!
수백 자루의 바늘이 허공으로 흩어지듯 날아오르면서 예기를 가득 품었다.
다음 순간 흩어져 날아오른 바늘이 벌떼처럼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다.
쉬쉬쉬쉬쉬쉬쉭!
파아아앙!
순간 적비연이 호신강기를 펼치자 철판에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투타타타타타탕!
극마가 버럭 소리쳤다.
-주인! 언제까지 놀고 있을 거냐! 이러다가 당한다!
‘제길! 나도 안다고!’
알지만 방법이 없지 않나?
-독을 써라! 그럼 시간을 좀 벌 수 있다!
‘안 돼!’
-왜?
독공을 사용하면 빙백독광사의 독이라는 걸 눈치챌 수가 있다.
그럼 정체가 발각되고 만다.
‘일단 조금씩 벗어날 수밖에!’
벌떼 공격이 끝나자 적비연이 곧장 바닥을 차며 교패의 심장을 노렸다.
“같은 수법에 당할 것 같은가?”
교패가 이번에는 적비연의 검봉을 그대로 흘리면서 왼손에 든 바늘을 뿌렸다.
삐삐이잉!
따다앙!
적비연이 얼른 돌아서면서 검을 들어 올리자 두 자루의 바늘이 적비연을 멀찍이 밀어냈다.
촤아아아앗!
전각 끝까지 밀려간 그가 막 모퉁이를 돌아섰다.
-옳거니! 지금이다!
모퉁이를 돌아선 이상 잠시나마 등을 보일 수 있으리라.
그런데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엇?”
적비연의 걸음이 급하게 멈췄다.
눈앞에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은 자는 다름 아닌 사예린이 아닌가?
현무장 쪽에서 난리가 난 것을 알게 된 사예린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적비연은 그녀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는 사이 벌써 교패가 모퉁이를 돌아서면서 바늘을 뿌렸다.
삐삐이이잉!
가느다란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적비연이 허리를 뒤로 젖히면서 두 자루의 바늘을 피해냈다.
적비연을 지나친 바늘이 그대로 사예린의 흑월아에 부딪쳤다.
따다앙!
촤아아아앗!
사예린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자 교패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이 공녀님!”
찰나지간 적비연이 신형을 날려 사예린의 배후로 돌아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사예린이 적비연의 손에 사로잡혔다.
교패가 흠칫거리고는 사예린과 적비연을 번갈아보았다.
적비연은 말없이 교패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이 말하는 바는 단 하나.
다가오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
교패가 굳은 표정으로 사예린과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적비연이 천천히 물러서기 시작하자, 교패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예린이 소리쳤다.
“교 선생! 난 신경 쓰지 말고 공격하세……! 으윽!”
적비연의 왼손이 사예린의 목을 콱 틀어쥐었다.
그것만으로도 협박성 경고는 충분했다.
교패가 움찔거리고는 더 이상 걸음을 내딛지 못했으니까.
적비연은 사예린을 뒤에서 붙든 채로 경공을 펼쳐 전각 지붕 위까지 올라섰다.
파바밧!
교패도 놓칠세라 얼른 지붕 위로 따라 올라왔다.
바로 그 순간,
촤아악!
“아악!”
적비연이 사예린의 팔을 베면서 거칠게 떠밀었다.
그 바람에 경공을 펼치던 교패는 덮쳐오는 사예린을 얼른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휘리리릭!
몸을 부드럽게 회전한 교패가 사예린을 안아 든 채로 착지했다.
“공녀님!”
“난, 난 괜찮으니…… 저자를…… 쫓아…….”
하지만 교패는 적비연을 쫓을 수 없었다.
사예린의 부상 정도가 꽤나 깊었다.
빨리 응급처치를 하지 않는다면 팔을 영원히 못 쓸 수도 있을 상황.
그가 얼른 바늘을 꺼내 들어 사예린의 혈도에 찔러 넣고 처치를 시작했다.
한편 적비연은 어둠 속을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흑천련 무인들 다수는 내원의 경계와 외원의 경계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때문에 오히려 내원 안쪽은 한산한 편이었다.
-십년감수했군. 그나저나 그 여자 불구 되는 것 아니냐?
‘그 정도는 베어야 의심을 피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팔 하나를 잃으면 그 여자가 빡칠 것 같은데.
‘괜찮아. 교패가 고칠 거야. 눈앞에서 련주의 제자가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만 쫓을 수는 없지.’
-하긴. 나중을 생각한다면 그쪽이 우선이긴 하지.
극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예린이 제때 나타난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전음을 흘리는 건 들키지 않았다.
사예린에게 정체를 밝힌 후 팔을 베겠다고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한 건 그녀가 정체를 알고 나서 적극 협조했다는 거다.
‘뭐, 나중엔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침내 권왕전 인근까지 다다른 적비연은 주변을 한 차례 살피고는 전각 사이로 뛰어내렸다.
일부러 경계를 허술하게 해두었고, 믿을 수 있는 수하들만 최소한으로 남겨둔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문으로 다가가니 엽강호가 얼른 나와서 주위를 살폈다.
“주군, 오셨습니까?”
그는 적비연의 행색을 보고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신에 걸친 옷은 독수에 구멍이 뻥뻥 뚫렸고, 여기저기 피 칠갑까지 되어 있었으니까.
“별일 없었지?”
“예, 지금 련내 대다수 무인들은 외곽 경계지로 파견되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죠.”
엽강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적비연은 제일 먼저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불태워 버렸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적비연이 목욕을 마친 후 겨우 한숨 돌리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큰일 날 뻔했네.”
“가신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엽강호는 구체적인 걸 묻지 않았다.
적비연이 무엇을 하든 따르겠다는 신념으로 가득할 뿐이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잘 해결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네.”
“주군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 귀문회에서 이걸 전해왔습니다. 주군께서 부탁하신 내용이라고.”
뜻밖의 소식에 적비연이 얼른 엽강호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었다.
작게 말린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글귀를 모두 읽은 적비연이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종이를 태워 버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다녀올게. 확인만 하면 되니 금방 올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