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연못 속 미꾸라지
다음 날 흑천궁에 다섯 사람이 모였다.
흑천련주 태청강과 천뇌선 요당, 장로회주 유형백과 혈지침 교패, 그리고 내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는 흑랑당주(黑浪堂主) 곡불한(曲不恨)이었다.
곡불한은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흑천궁에 모인 자는 그렇게 모두 다섯 사람에 불과했지만 장내 분위기가 무거운 공기에 짓눌린 듯 삼엄했다.
“내원에 염탐꾼이 잠입을 하다니…… 허참…….”
유형백이 허연 수염을 쓸며 혀를 찼다.
천뇌선 요당 역시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많고 많은 장소 중에서도 하필이면 현무장에 잠입했습니다. 본 련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아니, 꽤나 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혹 무림맹이 사람을 보낸 것이라면…….”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무림맹은 현재 장강 참사로 인해서 전력 보강에 힘쓰는 중입니다. 그 와중에 본 련에 잠입까지 시도한다는 것은 다소 무모한 면이 있지요.”
“그럼 대체 어떤 간 큰 놈이 본 련에 잠입했다는 거요?”
흑랑당주 곡불한의 말에 유형백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다.
“커험. 그런 건 누구보다 자네가 알고 있어야 할 일이 아닌가? 흑천사왕이라는 명성이 아깝네.”
“회주님의 질책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나, 교 선생조차 그자와 직접 대면하고도 놓쳤는데, 내원의 경계를 맡은 자들이 어찌 그놈을 상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은근히 교패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곡불한은 흑천사왕에 속했지만, 흑천사왕 중에서도 무공이 가장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는 교패를 은근히 시기하고 있었다.
요당이 침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무림맹과 엮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한 사람이 있긴 하지요.”
“그게 대체 누구요?”
곡불한이 질문을 던지다가 흠칫거렸다.
“혹시……?”
“예, 벽력적가주입니다. 그자는 현재 본 련의 권역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자를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출귀몰이지요.”
“교 선생은 어찌 생각하는가?”
유형백이 교패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에 곡불한이 짐짓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자신도 있는데 교패에게만 의견을 묻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교패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습니다. 하나…….”
“하나?”
“그 소문에 대한 진위에 다소 의구심이 듭니다.”
“진위에 대한 의구심이라면…… 벽력적가주가 본 련의 권역에 없을 수도 있다는 건가?”
교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신위의 경지에 올랐다지만 그 어떤 이의 눈에도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한데 벽력적가주가 지금 그 불가능을 행하고 있지요. 이전까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그가.”
“그럼 무림맹이 뜬소문을 일부러 흘렸다는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무림맹에 머물렀던 혈조야귀조차 벽력적가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벽력적가주가 사망했다는 정보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곡불한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교패가 미간을 모으고는 답했다.
“가능성은 있되 확신은 하지 말자는 것일 뿐이오. 그리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마음에 걸리는 건?”
“너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나도 이 정도로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하면…… 교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요당이 말끝을 흐리자 교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자의 소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곡불한이 무릎을 탁 쳤다.
그렇잖아도 내원의 경계가 허술했다는 질책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적이 내부자로 밝혀지니 어느 정도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과연! 그래서 내벽을 지킨 무인들이 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군! 하긴, 안 그랬으면 필시 내벽 경계에서 걸려들었을 테니!”
이에 유형백이 다소 언짢은 투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내원에서 일어난 일일세. 내원의 누군가 본 련을 배신했거나 규율을 어긴 거라면…… 자네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지.”
“끄음…….”
곡불한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니 반박할 말이 없다.
요당이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래도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정체불명의 괴한이 잠입했다지만 본 련 입장에서는 크게 잃은 것도 없는 셈이니까요.”
“만약 내부자의 소행이라면 내가 한 번 찾아보겠소.”
교패의 말에 곡불한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교 선생께서 그자와 손을 섞었으니 분명 찾아내실 거라 믿소.”
자연스럽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교패가 잔잔한 미소로 응답했다.
그제야 련주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린아는 어찌 되었나?”
“다행히 응급처치로 치명상은 피했습니다. 워낙 회복력이 좋아 정상 생활도 가능하십니다.”
“다행이군. 반드시 찾아내도록 하게.”
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련주가 교패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교패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짜악!
뺨을 후려친 소리가 후원에 짜랑짜랑 울렸다.
근처에 있던 시종들이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눈치를 살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엽강호와 한사가 얼른 다가오려고 하자, 적비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적비연은 그대로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사저의 손은 맵소.”
“흥!”
사예린이 콧방귀를 뀌고는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후원에 머물고 있던 시종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갔다.
사예린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홍예교 복판에 서서 헤엄치는 비단잉어를 내려다보았다.
“팔을 잃을 뻔했는데 그깟 뺨 한 대가 대수야?”
“그만하길 천만 다행이오.”
“너……!”
사예린이 다시 발끈해서 돌아섰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자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서며 적비연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그깟 팔 하나 때문에……!”
버럭 소리치던 사예린이 주위를 의식한 것인지 깊은 숨을 내쉬고는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이깟 팔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정말 몰라서 그래?”
안다.
왜 모르겠나?
평생을 함께 붙어 다녔던 사예린이다.
그녀가 기를 쓰고 흑천련주가 되려고 한 이유도 자신을 대공자로부터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녀 말대로 그깟 팔 하나쯤은 대수가 아니다.
모르긴 해도 사예린은 투혈권왕을 위해서라면 팔이 아니라 목숨마저 던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팔을 깊게 벴다.
그 정도는 해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 같기에.
교패가 련주의 제자가 다친 걸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도 한몫했지만.
사예린이 주변을 의식하고는 전음으로 윽박을 질렀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거긴 대체 왜 간 거야! 그것도 벽력적가주가 시킨 거야?]
[맞소.]
[하! 벽력적가주가 죽으라면 목숨도 내던질 기세네!]
[물론이오.]
[너…… 진심이야?]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나는 그를 위해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도대체 그 작자가 뭔데 이렇게 변한 거야? 난 도대체 널 이해를 못 하겠어!]
적비연이 쓴웃음을 그렸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아마도 사예린은 투혈권왕이 벽력적가주를 어느 정도 이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를 이용해서 흑천련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투혈권와 역시 제 갈 길을 찾지 않을까 하고 짐작했으리라.
하지만 투혈권왕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뭔가에 홀렸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가 없소. 나는 이미 그분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사저를 이해시킬 자신도 없소. 다만, 이 방법이 아니면? 사저는 정말 흑천련주가 될 수 있소?]
사예린이 흠칫거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적비연이 시선을 연못으로 던졌다.
[사방이 막혀 있다면 수면 위로 튀어올라야지. 그게 갇힌 연못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 아니겠소?]
[그러다가 맨땅에 떨어져 죽지.]
[갇혀 죽으나, 그리 죽으나. 물고기가 아닌, 인간인 이상 발버둥은 쳐봐야지. 혹시 아오? 내가 물고기가 아니라 승천할 룡일지.]
사예린이 입을 다물고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바라봐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내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적비연이 그런 생각을 갈무리한 채 그녀의 시선을 담담히 받았다.
이윽고 사예린이 씹어뱉듯 말했다.
[대체 얼마나 매력적이기에 우리 사제가 이렇게 빠졌을까? 정말 그 남자 꼭 만나보고 싶네.]
‘이미 만나고 있단다.’
적비연이 속내를 삼키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마 사저도 좋아할 거요.”
“흥! 그건 모를 일이지!”
그때 마침 모퉁이를 돌아서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이거, 제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교패였다.
사예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교 선생께서는 남의 집을 드나들면서 기척도 내지 않으시네요.”
“하하. 공녀께서는 노여움을 푸시지요. 이러나저러나 제 환자이시니 염려되는 마음에 미처 예까지 차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팔은 좀 어떠신지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상처가 깊긴 했지만 내상 같은 게 아니니 회복도 빠른 편이고요.”
“제 덕이라기보단 공녀님이 강하신 덕이지요.”
교패가 홍예교 위로 올라서며 말을 건네자 사예린이 한쪽 입매를 틀어 올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쨌거나 더 이상 찾아오지 않으셔도 되니 오늘 같은 무례는 사절입니다.”
그녀가 휑하니 걸어가고 나자 교패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이런, 단단히 화가 나셨나 봅니다.”
“사저께서 원체 약한 모습 보이는 걸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적비연의 대꾸에 교패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군요. 그게 아니면…… 뭔가 저를 대하기 껄끄러운 게 있다거나?”
“교 선생을 만나면서 껄끄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글쎄요. 이상하게 다들 절 좀 피하는 것 같은 기분이. 권왕께서는 전혀 그런 게 없으신가 봅니다.”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제가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
“별 뜻은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절 기피하는 건 그저 제 성격이 모나서일지도 모르지요.”
“그럴 리가요. 오히려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시지요. 아무나 흑천사왕으로 불리진 않습니다.”
“그 명성이 무색하도록 지난밤에는 쓴 맛을 보았지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들어오는 바람에.”
교패의 시선이 홍예교 아래의 연못으로 향했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며 짐짓 아쉬운 척했다.
“사저가 방심하는 바람에 놈의 인질로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운이 나빴습니다.”
“그러게요. 공녀께서 어지간히 방심하지 않고서야 그리 쉽게 인질로 사로잡히실 리가 없을 텐데 말입니다.”
“교 선생과 손을 섞을 정도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저도 방심하면 당할 수 있는 수준 아니겠습니까?”
교패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해도 인질로 사로잡히는 건 다른 얘기지요. 그 누구도 대등하거나 약간의 격차를 가진 상대를 인질로 잡진 못합니다. 어른과 아이, 혹은 남성과 여성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나거나…….”
교패가 시선을 돌려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뭐, 일부러 잡히거나 하지 않는 이상.”
교패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이었다.
극마가 인상을 팍 구겼다.
-이 새끼, 의심하고 있군!
‘그런 것 같네. 조심해야겠어.’
적비연이 모른 척 말했다.
“그 정도로 실력 차가 컸다니. 이제야 사저가 팔을 다친 게 이해가 되는군요. 사실 저도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격차라면 이해가 되는군요.”
교패가 언급한 일부러 잡힌 경우에 대해서는 생각지도 않는 것처럼 대꾸했다.
괜히 저런 유도 심문에 걸려서 발끈할 필요는 없기에.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건 그뿐만이 아닙니다.”
“또 있습니까?”
“사방이 막힌 연못인데 느닷없이 미꾸라지가 나타났지요. 대체 그 미꾸라지는 어디로 들어온 것일까요?”
“흐음. 글쎄요.”
교패가 연못을 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미꾸라지가 잉어인 척하면서 처음부터 연못에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