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연못 속 미꾸라지
사방이 막힌 연못이란 흑천련 내원을 두고 말한 것이고, 미꾸라지란 복면을 쓴 침입자를 일컫는 말이다.
그 속내를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적비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에이, 아무리 미꾸라지가 잉어인 척해도 대번 보기에도 다른데 누가 속겠습니까? 아마도 미꾸라지가 잉어인 척한다면 물을 흐리기도 전에 쫓아내겠지요.”
교패가 피식 웃었다.
가볍게 웃는 것 같지만 후원의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기만 했다.
“하긴. 미꾸라지 주제에 잉어인 척하긴 어렵겠지요.”
“간밤에 일어난 일로 심려가 크신 듯합니다.”
“이러나저러나 제 불찰로 일어난 일이니 책임감이 무겁지요.”
교패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더니 마침 생각났다는 듯 적비연을 돌아보며 포권했다.
“아, 늦었지만 감축드립니다.”
“무슨……?”
“월희계를 흡수하시지 않았습니까? 후계를 논할 때 꽤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신 셈이지요.”
“하하. 고지라고 하기에는 갈 길이 멉니다.”
“그래도 정말 놀랐습니다. 빅뱅독광사를 흡수하셨다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교 선생께서 미천한 솜씨를 좋게 봐주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누구라도 그리 봤을 겁니다. 특히 그 검술은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대체 검법은 언제 그리 익히셨습니까?”
교패가 감탄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하지만 적비연은 그의 두 눈에 팽배한 의심을 읽을 수 있었다.
‘결국 요지는 이거였나?’
적비연이 대수롭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변화무쌍한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권사라고 해서 어찌 주먹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반 호법장으로부터 검법을 조금 배운 적이 있었지요.”
“아아, 그래서 반 호법장의 숨결이 어렴풋이나마 느껴진 것이로군요.”
“숨결이……?”
“예, 뭐라고 콕 집어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공자님의 검술에서 반 호법장의 숨결 같은 것이 느껴졌달까요?”
이번만큼은 적비연도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교패가 괜히 흑천사왕이 아니로구나.’
보통 사람이라면 반철룡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강호를 주름잡는 교패는 역시 적비연의 검술에서 서호 검법과 비슷한 흐름을 읽어낸 것이다.
-역시 그 자리에서 검술을 사용한 건 좀 위험했다.
극마의 충고를 인정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어쩔 수 없었어. 십 합에 압도적으로 굴복시키려면 권법만으로는 어려웠으니까.’
적비연의 눈치를 가만히 살피던 교패가 넌지시 물었다.
“혹 기분이 언짢으신 건지요? 그럼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하하. 기분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닮은 기분을 느끼셨다니 제가 잘 배웠다는 생각에 오히려 뿌듯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교패가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적비연은 슬슬 자리가 불편해졌다.
아까부터 교패는 이야기 흐름을 의심과 확인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대화기 길어져서 좋을 건 없으리라.
그가 슬쩍 걸음을 돌리려는데, 교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뜻에서 하신 말씀이신지?”
“반 호법장이 죽다 살아나더니, 이번에는 공자께서 죽다 살아나셨다지요. 두 사람이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
“……!”
“원래 사람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 호법장과 공자님을 보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운이 좋은가 봅니다.”
“여기서 뜬금없는 질문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교 선생이 내게 질문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저보다 모든 분야에서 박학다식하신 분이.”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을 수 있지요. 더구나 공자님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해 보신 분이시니.”
“커흠. 무슨 질문입니까?”
“사람이 한순간에 다른 사람처럼 바뀌는 방법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말고도 있을까요?”
담담하게 던진 질문이지만 교패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다.
적비연이 그 눈을 받아내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왜 그런 질문을 내게 하시는지?”
교패가 입매를 살짝 비틀고는 홍예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미꾸라지도 잉어로 둔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요. 조언을 구해보았습니다.”
-흥! 조언은 무슨! 이젠 대놓고 의심하는 꼴이군!
극마의 말대로 이쯤 되면 교패가 의심을 다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여기서 쉽게 흥분하면 안 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철저하게 타아인 투혈권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한 치 의심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둘 중 하나다.
의심받는 줄도 모르거나.
의심을 받는다고 해도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대응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 않겠나?
지금 흥분해서 반박하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 되리라.
교패가 연못에서 노니는 잉어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가능성?”
“아, 가능성이라기에는 상상력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마교의 이혼대법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마교의 악랄한 대법 중에 상대방과 몸에 깃든 영혼을 바꿔치기 하는 사술이지요.”
적비연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되물었다.
“그게…… 실제로 가능합니까?”
“모르지요. 저도. 그저 상상입니다.”
“확실히 교 선생은 상상력이 대단하시군요. 그런 상상력 덕분에 교 선생의 무공이 발전하나 봅니다.”
“그럼 이왕 상상력을 더 발휘해 볼까요?”
“어떤……?”
“소문은 무성하나 실체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벽력적가주.”
교패의 시선이 적비연의 두 눈으로 날아든다.
마치 눈빛만으로 찍어내는 듯하다.
적비연이 동요하지 않고 말했다.
“계속해 보십시오.”
“그가 만약 이혼대법을 사용했다면 어떨까요?”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그는 명문정파의 가주이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더군요.”
적비연이 눈썹을 슬쩍 구겼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 모르셨습니까? 무림맹이 벽력적가를 봉쇄 조치 했다는 것을.”
“……!”
이번엔 좀 놀랐다. 아니, 많이 놀랐다.
극마 역시 눈썹을 성큼 치켜올리고는 물었다.
-어엉? 저게 무슨 말이야? 무림맹이 왜 주인 가문을 봉쇄해?
‘나도 궁금하니까 나한테 묻지 마.’
다행히 극마의 호들갑에 적비연은 상대적으로 차분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패는 지금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호흡은 흐트러지지 않는지, 눈동자는 방황하지 않는지 등등을 살펴보는 것이리라.
확실히 교패는 영악하다.
그의 의심은 무턱대고 찍어내는 사예린과 결이 다르다.
치밀하면서도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범위를 좁혀온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동요하면 교패는 더욱 깊은 의심으로 빠져들 것이다.
적비연이 최대한 침착하게 대꾸했다.
“몰랐습니다. 무림맹이 벽력적가를 봉쇄 조치하다니. 그들이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습니까?”
“사실 저도 최근 입수한 정보입니다. 모르실 만도 하지요.”
“대체 무림맹이 왜 벽력적가를 봉쇄한 겁니까?”
“글쎄요. 정확한 사유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반철룡 호법장이 왜 배신을 했는지 미궁에 빠져 있는 것처럼, 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어쩌면 벽력적가가 반 호법장과 내통한 것이 기분 나빴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무리 그래도 정확한 사유를 알아보지 않고 봉쇄하다니. 그럼 지금 벽력적가주도 장사에 묶여 있는 겁니까?”
일부러 벽력적가주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교패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벽력적가주는 현재 본 련의 권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예외겠지요. 하지만 벽력적가 소속 무인들은 장사를 벗어날 수 없게 됐지요.”
“흐음. 세상일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벽력적가주가 마교의 이혼대법을 익힌 것이라면 그만한 사유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소문도 슬슬 들려와서요.”
‘내가 이혼대법을 익혀? 그런 말도 안 되는 마공을?’
순간 욱했지만 적비연은 다시 눌러 참았다.
심장이 뛰었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고 있었다.
수백 년 축적된 경험치 덕분이다.
그 경험치로 인해 적비연은 웬만한 일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이 노회함이랄까?
교패가 연못의 잉어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왠지 저는 벽력적가주가 그 마공을 이용해서 잉어처럼 꾸미고 이 서호에 스며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미꾸라지는 잉어가 될 수 없지만, 인간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연 놀라운 상상력이십니다. 하나 너무 지나친 게 아니신지.”
“역시 그럴까요?”
교패가 빙그레 웃어 보이자 적비연이 걸음을 돌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저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가 너무 오래 머물렀군요.”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시간을 빼앗았군요. 그럼 살펴 가시길.”
“그럼.”
적비연이 걸어서 후원을 가로지를 때였다.
“아 참, 간밤에는 소식이 늦었나 봅니다. 공녀님을 찾아온 시각이 꽤 늦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혹시 바쁜 용무가 있으셨던 건지?”
적비연이 멈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적비연이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기도 했다.
‘이제 반격의 기회인가?’
적비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아, 그 시간에는 제가 혈조야귀를 찾아갔었습니다.”
“혈조를……?”
뜻밖의 대답에 교패가 미간을 찡그렸다.
적비연이 말을 이었다.
“예, 무림맹의 추격으로 죽다 살아난 우리와 달리 혈조야귀는 거의 다치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진정한 영웅이지요. 해서 그 비법이나 물어보고 싶어서 찾아갔었습니다.”
“겸손하시군요. 권왕께서는 혈조를 능가하는 실력을 겸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배울 점이 있겠지요. 무림맹의 추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쳤으니까요.”
“흐음. 해서 비법은 들으셨는지요?”
만약 적비연이 혈조야귀와 만났다면 부재증명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권왕은 어제 일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일 터. 역시 과한 생각이었나?’
하지만 적비연은 그런 교패의 생각을 가볍게 뭉개 버렸다.
“아뇨. 그가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부재중?”
“예, 대체 어딜 간 것인지…… 한참을 기다리다가 발길을 돌렸습니다.”
적비연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혈조야귀가 그 시간에 어딜 갔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저녁 귀문회로부터 받은 쪽지에 적혀 있었으니까.
혈조야귀가 백발광인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을 들은 후, 적비연은 귀문회에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바로 혈조야귀의 움직임에 대해서 지켜봐 달라는 것.
반철룡의 죽음을 이용한 것은 미안하지만, 그 덕분에 귀문회주인 화령은 적비연에게 충분히 협조적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바로 어젯밤, 혈조야귀가 반철룡의 집을 찾아갔다는 것을 보고받은 것이다.
교패는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혈조야귀가 부재중이라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마침 그를 만나러 갔다가 현무장의 일을 보고받았으니까.
‘하면…… 정말 투혈권왕은 아닌 건가?’
이렇게 되면 오히려 혈조야귀가 의심스러워진다.
그 시간에 혈조야귀는 어딜 간 것일까?
적비연은 교패의 반응을 살피면서 이걸 잘 엮으면 꽤 그럴듯한 그림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교패를 두고 적비연이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난 듯 돌아보았다.
“아! 혹시 그 미꾸라지가 어쩌면 원래 잉어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교패가 미간을 찡그렸다.
“잉어였던 녀석이 연못을 벗어나 미꾸라지와 어울려 놀다가 와서 자기가 미꾸라지라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요. 아니면 뭐, 피치 못한 사정으로 미꾸라지들에게 협박받은 잉어라거나.”
혈조야귀를 두고 한 말이다.
본 련을 벗어나서 정파에서 놀다 온 인물.
한마디로 혈조야귀가 이중첩자일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뜻.
바보가 아닌 이상 교패는 언중유골(言中有骨)을 눈치챌 거다.
-하긴. 세뇌나 고독을 이용해서 강제로 복종시킨다는 게 적어도 이혼대법보다는 현실성이 있을 테니.
극마도 고개를 끄덕였다.
먹힌 걸까?
과연 교패의 얼굴이 전보다 심각하게 굳었다.
‘일단은 물었어.’
이젠 잉어를 탈탈 털어서 묻은 진흙이 나오는지 알아봐야 할 차례다.
물론 교패가 그리 간단히 넘어갈 것 같지도 않지만.
‘이 시점에서는 혈조야귀도 영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단 말이지.’
마침내 교패가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많은 참고가 됐습니다. 고민해 볼 문제군요.”
적비연이 히죽 웃었다.
“부디 미꾸라지를 찾아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