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91화 (192/301)

191. 일어탁수(一魚濁水)

바람이 제법 싸늘했다.

적비연은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가을 막바지에 접어들어 제법 추워진 날씨 덕분에 저잣거리는 겨울 준비를 하는 인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포목점에서 두터운 옷을 구입하는 여인들과 장작더미를 가득 쌓아놓고 파는 나무꾼들, 각종 약재를 좌판에 늘어놓고 호객하는 약초꾼이 목청을 높였고, 갓 찐 만두를 들고 철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연신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거냐?

사람들을 구경하던 극마가 불쑥 물었다.

적비연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귀문회에 접선 좀 해야겠어.’

-또? 너무 자주 찾는 것 아냐?

‘어쩔 수 없지. 사실 여부는 확인해야 하니까.’

-사실 여부라니? 뭘 확인하려고?

‘본 가가 봉쇄된 게 확실한지 알아봐야지. 귀문회라면 알고 있을 테니까.’

-흐음. 그럼 교패가 주인을 떠보려고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거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처음에는 떠보는 말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한데 교패와 대화를 나누면서 어쩌면 정말로 벽력적가가 봉쇄 조치를 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후를 얕잡아 봤어. 겉과 속이 꽤 다른 자라는 걸 안 이상 그냥 넘어갈 정보는 아니니까.’

-만약 확인해서 그게 사실이면 어쩌려고? 여기서 주인이 할 수 있는 게 있긴 하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그런데 이렇게 자주 찾아가는 것도 좋진 않을 것 같은데. 혹시나 지켜보는 눈이 있을 지도 모르고.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벌써 그런 눈이 있다.’

-무슨 말이냐?

‘꼬리가 붙었다고.’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극마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육신이 없는 극마로서는 적비연만큼 기감이 예리하진 못했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빠르군. 어쩔 거냐?

‘어쩌긴. 잡아야지.’

생각을 마친 적비연이 순간 객잔을 끼고 골목 사이로 휙 들어갔다.

그렇게 주루와 향료점을 지나서 계속해서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거침없이 이동했다.

어느 순간 인적이 드문 민가로 들어선 적비연이 모퉁이를 끼고 돌자마자 담장 아래의 그림자 속으로 스윽 파묻혔다.

은신술을 펼치니 귀신이라도 된 듯 흔적이 사라졌다.

기감을 최대한 펼치고 있던 적비연이 속으로 숫자를 되뇌었다.

‘셋…… 둘…… 하나…….’

지금!

적비연의 생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죽립을 푹 눌러쓴 무인이 바로 앞을 휙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찰나,

타앗!

적비연이 바닥을 차며 상대의 뒷목을 움켜잡고는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콰앙!

맞은편 담장까지 밀어붙인 적비연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옆구리에 바짝 들이밀었다.

쿡!

“컥……!”

죽립인이 신음을 터뜨리며 호흡을 골랐다.

적비연이 죽립인의 등을 노려보며 나직이 물었다.

“누구냐?”

“크읍……!”

“누구냐고 물었다!”

-주인아, 그렇게 목을 조르는데 말을 어떻게 하겠냐?

그제야 적비연이 목을 쥔 손에 힘을 살짝 풀고는 다그쳤다.

“누가 보낸 거지?”

하지만 죽립을 쓴 무인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오른손을 휙 내리더니 그대로 단도를 움켜쥐었다.

콰악!

‘맨손으로 칼날을?’

다음 순간 적비연의 손에서 단도가 쑥 빠져나갔다.

설마 칼날을 움켜쥘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방심한 탓이다.

동시에 죽립인이 휙 돌아서더니 왼손으로 단도를 옮겨 쥐고는 그대로 내질러왔다.

파밧!

휙!

간발의 차이로 몸을 젖혀 피한 적비연이 상대의 옆구리를 향해 일권을 내질렀다.

쾅!

하지만 이번에도 상대의 일장에 주먹이 막혔다.

적비연이 눈을 부릅떴다.

‘내 일권을 막아? 아무리 기를 제대로 싣지 않았다지만…….’

체구도 별로 크지 않은데 내력이 꽤나 심후한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다른 수단이 있는 건가?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일권을 막아낸 상대가 그대로 왼손에 든 단도를 휘둘러 가슴을 노렸다.

쒸이이이잇!

파바바밧!

얼른 뒷걸음질을 친 적비연이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금나술을 펼쳤다.

순식간에 팔이 꺾인 상대가 그대로 비명을 내지르며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더니 바닥에 쿵 쓰러졌다.

“아악!”

머리에 덮어쓰고 있던 죽립이 벗겨지면서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

뜻밖이란 생각에 적비연이 흠칫하는 사이, 바닥에 쓰러진 여인이 벌떡 일어나면서 이마로 적비연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쾅!

“윽!”

적비연이 주춤 물러나는 사이 여인이 허리춤에서 연검을 뽑아 들고는 빠른 속도로 휘둘러 왔다.

휘리리리링!

물고기가 꼬리 치며 나아가듯 연검이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날아간다.

“헛!”

헛바람을 삼킨 적비연이 얼른 허리를 젖히고는 피하면서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했다.

휘리리리릭!

파바바밧!

예리한 공격과 능숙한 방어.

여인이 든 연검은 은빛 물고기가 되어 적비연의 전신으로 마구 몰려갔다.

투타타타탕!

하지만 적비연이 흑천투권공을 일으켜 손을 뻗으니 은빛 물고기들이 마치 몸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터져 버리는 듯하다.

여인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매섭게 몰아붙이더니 이윽고 검기를 일으켰다.

쉬이이이잉!

갑자기 일어난 검기 때문에 적비연의 앞섶이 잘려 나가면서 상의가 풀어헤쳐졌다.

펄럭!

촤아아아앗!

찢어진 상의 때문에 적비연의 탄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미끄러지듯 멈춰 선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피식.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건가? 누구기에 감히 이 구역에서 본좌를 공격한단 말인가?”

푸쉬이이이……!

적비연의 양팔을 따라서 핏줄이 불거지더니 두 주먹이 더욱 크고 검게 변했다.

한편 여인은 봉목을 부릅뜨고는 적비연의 가슴만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이 서서히 기수식을 취했다.

“왜? 본좌의 근육에 반하기라도 한 거냐?”

“…….”

적비연이 고개를 우드득 꺾었다.

“말을 할 줄 모르면 가르쳐 줘야겠군. 뭐, 그땐 울면서 말하게 되겠지만!”

적비연이 바닥을 차고 달려가는 순간,

쿵!

느닷없이 여인이 바닥에 넙죽 엎드리더니 이마를 찧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세차게 날아가던 주먹은 애꿎은 허공만 때렸다.

“응?”

적비연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바짝 엎드린 여인을 보았다.

옆에 선 극마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는 떠들어댔다.

-헉, 뭐야? 정말 그딴 근육을 보고 반한 거냐? 이게 통한다고? 정말?

‘조용히 좀 해봐!’

적비연의 윽박에 그제야 극마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바짝 엎드린 여인에게서 울음에 젖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천대주 예홍…… 가주님을 뵙습니다!”

“홍?”

적비연이 흠칫거리고 되묻자, 여인이 고개를 들더니 다시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기 시작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주님을 공격한 죄, 벌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쿵! 쿵! 쿵!

“어어, 잠깐만! 너 정말 예홍이냐?”

물어보면서도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은 했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을 테니.

예홍이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손으로 목 부근의 피부를 잡아 뜯었다.

찌이이익!

그제야 예홍의 맑은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홍……! 너 진짜 홍이구나.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가주님을 찾아서 왔습니다. 가슴의 점을 보지 않으면 확신할 수 없었기에…….”

예홍이 다시 이마를 박으려고 하자, 적비연이 얼른 달래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해한다. 그렇다고 먼저 정체를 밝힐 수도 없었을 테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어쨌든 잘 왔다.”

적비연이 예홍의 어깨를 잡고는 힘을 주자, 그녀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렇잖아도 지금 본 가의 정보를 얻으려고 귀문회를 찾아가려던 참이었어. 본 가가 봉쇄됐다는 게 사실이냐?”

예홍의 표정에 그늘이 졌다.

“사실입니다. 무림맹이 현재 본 가를 봉쇄하고 장사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저와 천상원주님만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용케 두 사람은 나왔군. 그나저나 천상원주라면…… 은 원주가 여기에 왔단 말이야?”

“네. 지금 객잔에서 가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무림맹이 지금쯤 너희들의 부재를 알고 있는 건가?”

“아마 모를 겁니다. 인피면구를 이용해서 대리인을 내세워 두었습니다.”

“고생했다. 일단 은 원주부터 만나야겠군. 안내해.”

“네, 가주님!”

예홍이 얼른 몸을 일으키고는 앞장섰다.

적비연이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멀찍한 곳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저년은…… 분명 벽력적가 예홍 대주가 아니었나?’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긴 남자.

바로 혈조야귀였다.

* * *

끼이이익……!

낡은 문이 열리면서 혈조야귀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반철룡의 집.

혈조야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천천히 탁자로 걸어간 그가 손으로 소복하게 쌓인 먼지를 훑었다.

‘반철룡…… 벽력적가주…… 그리고 투혈권왕이라…….’

분명 뭔가 있다.

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이 세 사람의 연결 고리를 찾아야 하는데.

어째서 벽력적가에서 온 그 여자가 투혈권왕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는 거지?

그 정도면 거의 가주를 대하는 듯한 모습이 아니던가?

적비연과 그 여자를 계속 미행했지만 한순간 눈앞에서 사라져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놓친 단서라도 찾을 생각으로 반철룡의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런 의문들을 한 줄에 꿸 수 있는 가설이 없진 않다.

그 한 줄이란…….

‘세 사람이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것. 그런데 그건 말이 안 되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투혈권왕과 벽력적가주 사이에 뭐가 있는 것일까?

가만, 혹시 무림맹이 이 일을 주도하는 것이라면?

‘무림맹 이것들이 나를…….’

찰나,

“크으읍!”

혈조야귀가 양손으로 머리를 쥐고는 신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진 그가 어금니를 깨질 듯 꽉 물고는 으르렁거렸다.

“제길! 그만! 좀 그만……!”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관자놀이의 핏줄이 차츰 가라앉을 때쯤 그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털썩 주저앉았다.

“헉, 헉, 헉……!”

어금니를 꽉 깨문 그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쾅 내리쳤다.

‘빌어먹을 두통!’

겨우 숨을 고른 그가 비척거리면서 일어날 때였다.

탕!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

흠칫거린 혈조야귀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기감을 활짝 펼쳤다.

주변 사물을 격기를 통해 세밀하게 더듬어갔다.

없다.

한데 분명 소리는 들렸다.

두통 때문에 잠깐 환청이 들린 걸까?

그럴 리가.

그러기엔 너무나 생생한 소리였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방을 한 차례 훑은 그가 벽 가까이에 놓인 침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건……?’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침상 아래쪽에 유난히 반들반들한 부분이 있었다.

저벅저벅!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긴 혈조야귀가 침대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한쪽으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콰장!

혈조야귀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침상이 놓여 있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그가 예기를 일으키고는 그대로 손가락을 내려찍었다.

콰자자작!

다섯 개의 손가락이 나무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곧이어,

콰자앙!

바닥판이 통째로 뜯겨 나가면서 그 아래로 이어진 계단이 훤히 드러났다.

그때 다시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히익!”

순간 혈조야귀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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