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92화 (193/301)

192. 일어탁수(一魚濁水)

지하는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혈조야귀는 기감을 펼쳐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챌 수 있었다.

침상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내.

“히이익.”

혈조야귀를 의식한 것인지, 놀란 소리를 내며 몸을 잔뜩 웅크린 남자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거침없이 다가간 혈조야귀가 손을 뻗자, 손톱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길게 자라듯 나왔다.

“네놈…… 정체가 뭐냐?”

“으으……!”

부들부들 떨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혈조야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그러는 넌 정체가 뭐냐?”

고개를 든 사내가 히죽 웃으며 묻는다.

“네놈은…… 분명 여추백?”

“미천한 이름까지 기억해 줘서 영광이네. 너는? 진짜 혈조야귀가 맞냐?”

놀랍게도 웅크리고 있던 사내는 다름 아닌 여추백이었다.

혈조야귀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네놈이 왜 여기에……?”

“그건 내가 물을 소리 같은데. 왜 우리 대주님 집에 네가 있는 걸까?”

혈조야귀의 뺨이 떨렸다.

감히 건방지게.

교패의 오른팔인 혈조야귀는 련 내에서 정확한 직책을 맡고 있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단주급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여추백이 하대할 정도의 신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데 이놈은 마치 자신보다 아랫사람을 대하듯 말하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이글거리는 눈빛은 적을 대하는 듯하다.

“주인 잃은 강아지가 되더니 미쳐서 돌았나 보구나. 정녕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냐?”

다음 순간 혈조야귀의 전신에서 숨 막힐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이런, 미꾸라지가 이런 곳에서 놀고 있네.”

혈조야귀가 스윽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엽강호와 한사.

두 사람이 냉소를 지은 채 혈조야귀를 빤히 응시했다.

혈조야귀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뭐냐? 너희들.”

엽강호가 대부를 어깨 위에 척 걸치고는 말했다.

“우리 주군께서 그러시더라고.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에 흘러들어왔으니 잘 지켜보라고. 그런데 마침 이렇게 딱 덫에 걸려들지 뭐야?”

“크크크!”

혈조야귀가 탁한 웃음을 흘리자, 엽강호와 한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웃긴가? 이 상황이.”

“우습지. 보아하니 오늘 여기서 결판을 지을 생각인가 본데. 네놈들은 겨우 머릿수를 믿고 본좌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엽강호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무렴 감당하기 어렵겠지. 무림맹의 포위망을 상처 하나 없이 뚫고 귀환하신 분인데. 그래서 우리 셋만 온 건 아니야.”

“뭣이?”

혈조야귀가 미간을 구겼다.

다음 순간, 그는 지하 구석 철문에서 모종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끼이이익……!

계단과 다른 방향의 철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무인이 우르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 모두 투혈권왕의 호신위였다.

“이러면 어떨까?”

엽강호의 말에 혈조야귀가 여전히 냉소를 지우지 않았다.

“송사리 떼가 모인다고 상어가 두려워하겠느냐?”

그때,

“누가 상어라는 거야?”

낭랑하게 울려오는 목소리.

이번만큼은 혈조야귀도 굳은 표정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침내 계단을 따라 내려와 지하로 들어선 한 여인.

어두컴컴한 지하임에도 그녀의 미모만큼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당, 당신이……?”

사뿐사뿐 걸어오는 여인은 바로 월희마녀 사예린이었다.

그녀가 한쪽 입매를 비틀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구경하려고 온 거야. 네가 무림맹의 경계를 어떻게 상처 하나 없이 뚫고 온 것인지. 그 실력 좀 보고 배우려고.”

“끄음.”

혈조야귀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우우우웅.

그의 양손에 집중된 기운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날카롭게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엽강호가 대부로 바닥을 쿵 찧고는 읊조리듯 말했다.

“뭣들 하느냐? 조져.”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호신위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살수를 뻗어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 * *

천상원주 은하란.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나타나서 자신에게 이름 모를 약물을 복용시키고 육신도 없는 귀신처럼 떠돌게 만든 여인.

그녀는 적인가, 아닌가?

적비연은 창가에 앉아서 늦가을의 햇살을 만끽하는 은하란을 물끄러미 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햇살과 소통하는 듯 보이는 그녀는 적비연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여자.

아니, 원래 모르지만 더 모르겠는 여자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그녀가 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다.

뭐라고 딱 잘라 설명할 수 없지만 적비연의 머릿속에 저장된 숱한 경험이 주는 직감이랄까?

‘내가 직감을 운운하게 될 줄이야.’

확실히 사예린의 직감에 시달린 걸 생각하면 우스운 변화다.

그러고 보면 여자들은 남자들과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더 많은 감각을 익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육감에 가까운 직감은 공감대에서 파생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벅저벅.

은하란에게 다가간 적비연이 탁자를 마주 두고 앉았다.

“용케도 빠져나왔군. 완전 봉쇄를 당했다고 들었는데.”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눈을 스르르 뜨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별로 놀라진 않으시네요.”

“이미 홍이 나타났을 때, 놀랄 만큼 놀랐소.”

“그래도 반응을 보니 가문이 봉쇄당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군요.”

“교패에게 들었소. 어떻게 된 거요?”

“가장에서 반철룡의 인피면구가 벗겨지면서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라고 봐야죠.”

“본 가가 사파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은 건가?”

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의심받을 만한 상황이니까요.”

“그게 말이 되오? 본 가는 분명 이번 일로 인해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소. 사절단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동안에도 무림맹은 뒷짐이나 지고 있다가 뒷북쳤지. 그런데 뭐가 어째?”

“원래 강호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벗도 없다잖아요? 그 많은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고도 남으셨을 텐데.”

또로로로롱.

말을 꺼내는 은하란이 적비연의 빈 잔에 찻물을 채웠다.

용정차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적비연이 채워지는 찻물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는 진작 파악했다.

그녀의 말대로 인간의 본질은 겪으면 겪을수록 추악하기 짝이 없다.

수많은 인생을 겪었지만 삶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인간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은 비극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희망.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환각 같은 웃음 때문이리라.

이쯤 되면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여겨질 만도 하건만, 욕망이 뭔지 아직은 모든 걸 내려놓고 싶진 않다.

적어도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하긴. 인간만큼 모순적인 존재도 없겠지. 진리보다 욕망에 사로잡혀서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니.”

“정답. 그러니 욕망이 들끓는 이 강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들 이상할 게 있을까요?”

“그래서 무림맹이 그 욕망 때문에 벽력적가를 옭아매고 있다?”

“어디 옭아매는 수준일까요? 아예 숨통을 조이려고 하겠지요. 이 기회에.”

“멸문까지 감안한다는 건가?”

적비연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은하란이 대답했다.

“욕망으로 들끓는 강호예요. 못할 건 뭘까요?”

“결국 사냥이 끝나면 삶아먹겠다는 거군.”

“아직은 가주님의 행방이 묘연하니 물만 끓이는 중이고요.”

“하.”

적비연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적아가 구분되지 않는다.

경계하고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던 흑천련은 오히려 우군으로 삼아야 하고, 의지하고 기대했던 무림맹은 완전한 적으로 돌아섰다.

그래, 이런 게 강호다.

필요하면 이용하고, 필요 없으면 화근이 되기 전에 도려내고.

‘그렇다면 거기에 어울려 줄 수밖에!’

적비연이 싸늘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흑천련을 집어삼킬 이유가 좀 더 분명해진 셈이군.”

“계획은 세우셨나요?”

“일단은 혈조야귀를 이용해 볼 생각이오.”

“혈조야귀라면 무림맹에 볼모로 잡혔던?”

“그렇소. 그가 귀환할 때부터 그 과정이 석연치 않아서. 귀문회로부터 들은 정보도 있고.”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장사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오?”

“당분간은요. 거기보단 여기가 오히려 안전하니까요.”

하긴.

철저한 감시 속에 놓여 있느니 차라리 이곳에 있는 게 적비연에게도 더 나으리라.

“자금이 필요하오.”

“얼마나요?”

“귀문회로부터 고급 정보를 사야 하오.”

“그럼 꽤 필요하겠군요. 알겠어요. 준비하죠. 그동안 축적된 자금이 제법 되니까요.”

“시간이 된다면 직접 정보도 알아봐 주면 좋고.”

“어떤 정보가 필요한 거죠?”

적비연이 잠시 침음을 흘리다가 얼마 전 현무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들은 은하란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괴력을 지닌 광인을 만든다는 거죠?”

“그렇게 보였소. 아상 어르신의 기억을 가지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소. 사람을 어찌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그렇겠죠. 의술만 가지고 만들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어떤 사술이나 사이한 대법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고. 아상 어르신은 어디까지나 사람을 살리는 의술에만 득도하신 분이었죠. 광인을 만드는 방법 따위를 아는 게 더 이상할지도.”

“교패가 날 의심하는 것 같소.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는 물어볼 수도 없소.”

“교패를 제외하면 광인에 대해 알만 한 사람이 세 명뿐이군요.”

적비연이 이맛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물었다.

“혹시…… 천하사대지자를 말하는 거요?”

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후와 요당, 그리고 만통지.”

“가후에게는 물어볼 수 없고, 요당도 섣불리 접근하기 어려우니…….”

“만통지를 찾아봐야겠네요. 그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는 강호를 떠나 은거한 것으로 아는데.”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싱긋 웃었다.

“그래서 의뢰하는 거잖아요? 귀문회에.”

“아…….”

하긴. 귀문회라면 만통지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소. 그럼 부탁 좀 하겠소.”

“부탁이라뇨? 아직도 절 진정한 천상원주로 받아주시지 않는 건가요?”

“뭐, 그건 아니오.”

“그럼 명령으로 충분합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좋소. 그럼 믿고 맡기겠소.”

“명 받들겠습니다.”

은하란이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비연이 걸음을 옮기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멈칫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하란을 보면서 적비연이 가볍게 바늘을 쏘았다.

푹! 푸푸푹!

“아!”

은하란이 따끔한 감각을 느꼈을 때쯤엔 이미 바늘이 다시 뽑혀 적비연의 손으로 돌아간 후였다.

은하란이 뜻밖이라는 듯 바라보았다.

“방금 그건……?”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활침을 완전히 풀었소.”

“이젠 절 완전히 믿으시는 건가요?”

“글쎄. 그냥 직감이랄까? 뭐, 무엇보다 한 달마다 사활침을 풀어주는 것도 귀찮고.”

무뚝뚝한 목소리에 은하란이 싱긋 웃었다.

“뵙지 못한 사이에 많이 변하셨군요.”

“변할 수밖에. 당신에겐 며칠이겠지만, 나에겐 수십 년이니까.”

“방금 그 말씀. 가주님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꽤 설레는 내용이네요.”

적비연이 쓴웃음을 짓고는 걸음을 옮기려는데 예홍이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얇은 장갑. 귀수갑이었다.

“반철룡이 끼고 있던 귀수갑을 회수해서 제가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돌려 드리겠습니다.”

“됐어. 난 이제 필요 없으니까. 네가 사용하도록 해. 꽤 유용하게 쓰던데?”

적비연의 단도를 맨손으로 움켜쥐고 공격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예홍이 얼굴이 발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의 은혜, 목숨으로 갚겠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과해.”

한편, 그 시각 흑천련의 내원에서는 교패가 혈조야귀의 처소를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혈조와 얘기를 해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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