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일어탁수(一魚濁水)
혈조야귀가 종적을 감췄다.
정말이지 감쪽같이 사라졌다.
벌써 보름이 흘렀다.
팔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조사를 지시했지만 아직까지 혈조야귀의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혈조야귀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현무장의 사건 역시 지지부진해지면서 수뇌부의 압박은 거세지고 있었다.
교패는 창가에 서서 흑천련 내원의 전경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건가? 혈조.”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정녕 자네가 꾸민 일이라는 건가?’
그럴 리가.
혈조야귀는 교패가 유일하게 믿는 수하였다.
철저하게 믿었기에 그를 자신으로 분장해서 무림맹으로 보낸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혈조가 배신을 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지만, 혈조야귀는 자신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하면 뭔가?
혈조야귀는 왜 사라졌단 말인가?
제 발로 사라진 게 아니라면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다.
‘납치.’
생각을 품으면서도 피식 냉소가 흘러나왔다.
납치라니.
세상 누가 혈조야귀를 감히 납치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초절정 경지에 오른 혈조야귀다.
그런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한다고?
그랬다간 어디서든 큰 소란이 일어났으리라.
심증은 혈조야귀를 믿지만, 모든 정황이 혈조야귀를 의심하라고 소리치고 있다.
거기에 투혈권왕의 일침도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하긴.
그 배후가 가후라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재주가 있는 가후다.
만약 혈조가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가후가 무슨 짓을 한 것이라면?
암시를 걸었을 수도 있고, 몸에 고독을 심었을 수도 있지.
실수다.
혈조야귀가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그의 몸부터 살폈어야 했다.
하나 도의상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심복이라지만, 진맥을 한다는 것은 강호의 예법으로 따졌을 때 무척 민감한 부분이기에 그냥 넘겼다.
한데 그 결정이 이리 찝찝함을 안겨줄 줄이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를 가장 만나기 어렵게 되니 보통 답답한 게 아니다.
그때였다.
“나리, 장로회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울렸다.
장로회주가?
슬쩍 이맛살을 구기던 교패가 곧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일렀다.
“모셔라.”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장로회주 유형백이 들어섰다.
교패가 포권을 하며 예를 차렸다.
“어서 오십시오.”
“갑자기 이리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차 한 잔 드시겠습니까?”
“좋지. 담소나 나눌까 해서 왔으니.”
“잠시 기다리시지요.”
자리를 안내한 교패가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시종이 차를 내어왔다.
교패는 손수 유형백의 찻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드시지요.”
“고맙네.”
고개를 끄덕인 유형백이 찻잔을 들고 차향을 음미했다.
그가 미간을 좁히고는 차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건…… 용정차가 아니로군.”
“예, 이제는 다른 차도 맛보고 싶어서요. 용정차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닐세. 자네 말대로 이젠 다른 차 맛도 음미해야지.”
“그렇습니다. 오래 마셨지요.”
유형백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빙그레 웃었다.
“향과 맛을 보니 군산은침(君山銀針)이로군.”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이거 참 흔치 않은 차인데. 귀한 대접을 받았네.”
교패가 희미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흔한 차가 되어야지요.”
그의 말속에는 뼈가 있었다.
군산은침은 무림맹 권역인 동정호 군산이라는 섬에서 생산되는 황차(黃茶)였다.
즉, 군산은침이 흔한 차가 되기 위해서는 흑천련의 권역이 무림맹까지 삼킬 만큼 넓어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유형백도 그 말뜻을 알아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창밖을 보았다.
“날이 제법 쌀쌀해졌네. 긴장해야 할 시기가 온 게지. 해서 말인데…….”
유형백이 깊어진 눈으로 교패를 돌아보았다.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감지한 교패가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시지요.”
“본 회는 후계 구도를 어느 정도 정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네.”
“아직 련주님께서 건재하신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 지금 본 련은 후계 구도가 정립되지 않아서 필요이상으로 다툼이 이어지고 있네. 각 파벌이 화합하지 않으면 군산은침은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귀한 차가 될 걸세. 해서 이제는 후계자를 정하고 분란을 가라앉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걸세.”
교패가 눈을 살짝 찌푸리고는 유형백을 보았다.
“그 말씀은 장로회가……?”
유형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본 회는 조만간 지원할 후계자를 정할 걸세.”
교패가 흠칫거렸다.
이건 꽤 큰 사건이 될 수 있다.
장로회의 지원을 얻는다면 누가 됐든 막강한 차기 련주로 급부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유형백의 말대로 후계자가 확정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유형백이 교패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떤가? 아직까지 저울질 중인가?”
“저야 누가 되든 차기 련주님께 충성을 다할 뿐이지요.”
“역시 자네는 속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군.”
유형백이 툴툴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교패가 쓴웃음을 짓고는 물었다.
“하면 어떤 방법으로 선정할지 정하셨습니까?”
“정했네.”
“…….”
“이번 현무장 사건으로 수뇌부에서 근심이 많은 듯하네. 하여 본 회는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전주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일세.”
교패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사건을 빨리 해결하지 못해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아닐세. 아무리 자네라도 실수는 할 수 있지. 그 실수가 반복되지만 않는다면야 아직은 실수일 뿐이지 않은가?”
“명심하겠습니다.”
“후계가 명확해지면 이 군산은침을 흔히 볼 날도 머지않을 걸세.”
유형백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 * *
권왕전 취조실.
어둡고 음침한 공간.
그 한쪽 벽에 혈조야귀가 공진철 사슬에 묶여 있었다.
사지가 활짝 펼쳐진 채로 매달린 그는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간 사람처럼 축 늘어진 상태였다.
“끄으으……!”
금방이라도 꺼질 듯 신음을 흘리는 혈조야귀.
그의 전신에는 침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적비연이 침을 하나씩 뽑아내며 물었다.
“아프냐?”
“너 이 새끼…… 정체가 뭐냐?”
혈조야귀가 으르렁거리면서 씹어 삼킬 듯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혈조야귀의 몸에서 침을 제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 정체도 모르는 걸 보니 분명 무림맹의 끄나풀이구나.”
“뭐라?”
“본좌는 투혈권왕이다. 그것도 모르냐?”
“개소리! 투혈권왕이 어째서 벽력적가 무인을 만나는가!”
“그런 적 없다.”
적비연이 딱 잡아떼자 혈조야귀가 눈을 부릅떴다.
“저, 저 거짓부렁하는 혓바닥을 뽑아 버릴까 보다! 내 두 눈으로 네놈이…….”
“시끄럽다.”
짜악!
적비연의 손찌검에 혈조야귀의 뺨이 휙 돌아갔다.
공진철로 공력이 억눌려진 상태였기에 맞은 뺨이 화끈거렸다.
마침 혈조야귀의 몸에서 모든 침을 뽑아내자 엽강호가 다가와서 물었다.
“알아내신 게 있으십니까? 주군.”
적비연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혈조야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적비연은 전음으로 다른 말을 꺼냈다.
[당연히 알아냈지. 놈은 흑뇌고(黑腦蠱)에 당한 상태야.]
엽강호가 전음으로 되물었다.
[흑뇌고라면……?]
[보통의 고독과 달리 뇌에 달라붙어 작용하는 악성 고독이지.]
[하면…… 세뇌 같은 겁니까?]
[비슷하지만 좀 달라. 오히려 협박에 가까운 수단이랄까? 보통 금제어를 걸어두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된다. 가령, 배후를 밝히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흑뇌고가 발작을 일으켜 머리가 터져 죽는다든지.]
[으윽. 살벌하군요.]
[그래서 이놈은 절대로 배후를 밝히지 않을 거야. 밝히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두통에 시달릴걸? 아마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한마디로 자신들의 뜻에 반하는 생각을 아예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군요.]
[그렇지.]
[명색이 정파란 놈들이 매우 치졸하군요!]
[욕망이 들끓는 곳에 정사가 어디 있겠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
[아마도 가후와 의술에 해박한 취선관주가 함께하지 않았을까 싶군. 확실히 교패가 사람을 제대로 본 거야. 가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
[그럼 흑뇌고는 제거하실 수 있습니까?]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흑뇌고는 보통 고와 달리 콧구멍 속으로 넣어서 뇌 쪽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사흘이 지나면 뇌혈관 속에 스며들어 기생하지. 한마디로 뇌수술로 흑뇌고를 억지로 파내면, 그 인간은 자아를 잃고 미쳐 버린다는 뜻이야.]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요. 그렇게 들으니 이 녀석도 불쌍하네요.]
엽강호가 측은지심이 담긴 시선으로 혈조야귀를 보았다.
한편 혈조야귀는 자신을 두고 두 사람이 심각하게 전음을 나누는 것을 보고는 지레짐작했다.
‘흥! 네놈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몸에 기생하는 흑뇌고의 존재는 신의 정도 되는 수준이 아니면 절대로 눈치챌 수 없다고 들었다.
하지만 신의 아상은 죽었다.
그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지닌 사람은 교패밖에 없다.
즉, 투혈권왕 따위가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날 풀어라! 아니면 내게 말 못할 꿍꿍이라도 있는 것이냐!”
“맞아. 있어. 그런 꿍꿍이.”
“뭐?”
혈조야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비연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
“난 사실 너희들이 모르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흑천련은 나로 인해 망하게 될 거다. 그리고 내가 이 무림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알겠느냐?”
“뭐……?”
“가자, 강호!”
“예, 주군.”
엽강호가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더니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돌렸다.
그렇게 홀로 남은 혈조야귀가 눈을 끔뻑이다가 중얼거렸다.
“저 미친놈은…… 도대체 뭐야? 뭐가 되겠다고? 무림을 지배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
혈조야귀는 뒤늦게 자신이 벽에 매달린 채 묶여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 미친 것들아! 날 여기서 풀어달란 말이다! 어서 날 풀어!”
묶인 채로 외쳐대니 기억하기 싫은 그날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 * *
“당장 날 풀어줘! 이 개새끼들아!”
혈조야귀가 소리치자 어둠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자박자박 울렸다.
마침내 어둠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림맹 총군사 가후였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모를 줄 아셨습니까? 당신이 교패가 아니라는 것을.”
가후가 가까이 다가가더니 혈조야귀의 턱을 손가락을 받쳐 들었다.
“당신이 그의 심복인 혈조야귀라는 건 진작 눈치챘습니다.”
“크윽……! 뭐 하자는 거냐? 그럼 날 죽여라!”
“하하하! 그런 살벌한 말씀을. 본맹은 인명을 중시합니다. 목숨을 그리 가벼이 여기지 않지요.”
“어쩔 속셈이냐?”
가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렇게 잘 벼린 칼날인데 제대로 써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버리긴 아깝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