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94화 (195/301)

194. 일어탁수(一魚濁水)

혈조야귀가 가후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주인이 있는 칼날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게 아니지. 그러다가 네놈들이 베일 수 있다는 걸 알아라.”

가후가 피식 웃었다.

“모르시는군요. 주인 있는 칼날이 남을 베기 전에 가장 많이 베는 건 바로 주인이랍니다. 인간은 완벽해 보여도 의외로 실수투성이거든요. 당신 같은 칼을 다루는 주인 역시 마찬가지죠. 이렇게 잘 벼린 칼날이라면 더욱 신중히 다뤘어야 하는 건데. 뭐, 그 덕에 제가 사용할 수 있게 됐지만요.”

“개소리도 작작……!”

“가져오세요.”

혈조야귀의 말이 채 끝맺기도 전에 가후의 입이 열렸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취선관주가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작은 목함을 내밀었다.

취선관주가 목함의 덮개를 열자 그 안에서 꾸물거리는 작은 벌레가 보였다.

새끼손가락 한마디 정도 되는 길이의 검은 애벌레.

혈조야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뭐, 뭐냐?”

“혹시 흑뇌고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흑뇌고…… 라니?”

“앞으로 이 녀석이 당신과 함께 여기서 살아가게 될 겁니다.”

가후가 손가락으로 묶여 있는 혈조야귀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혈조야귀가 몸부림치듯 팔을 휘둘렀지만 사지가 구속된 상황이라 더 이상 어쩌질 못했다.

철컹! 철컹!

“이 개 같은 것들이 내게 무슨 짓을 하려고! 날 풀어라!”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묶지도 않았겠지요.”

가후가 목함과 집게를 들고 돌아섰다.

그러는 사이 취선관주가 다가가 혈조야귀의 마혈을 점했다.

탁탁탁!

“크읏! 날 당장 풀지 못해!”

하지만 가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듯 싸늘한 미소를 지은 채 가느다란 집게로 흑뇌고를 붙들었다.

꾸물거리는 흑뇌고가 점차 다가오자 혈조야귀가 더욱 소리를 질렀다.

“그만! 멈추란 말이다!”

하지만 마혈까지 당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침내 그의 인중에 애벌레처럼 작은 흑뇌고가 놓이자, 꾸물거리면서 콧구멍으로 기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안 돼! 제기랄! 죽, 죽여 버린다아앗!”

혈조야귀가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내질렀지만 흑뇌고는 우습다는 듯 콧구멍 안으로 쑤욱 들어갔다.

잠시 후 그의 미간이 불룩 솟구치는가 싶더니 이마를 따라서 불룩불룩 피부가 부풀어 올랐다.

흑뇌고가 이동하는 경로가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크윽! 끄으으으윽!”

고통에 겨운지 혈조야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마침내 그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더니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것일까?

혈조야귀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겨우 눈을 떴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눈앞에 가후가 서 있었다.

가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깨어나셨군요.”

“이 개새끼들! 나한테 무슨 짓을……! 크으윽!”

고함을 내지르던 혈조야귀는 곧 관자놀이가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쉬이이. 조심하세요. 흑뇌고에 이미 금제를 걸어두었습니다. 앞으로 본 맹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배후를 밝히려고 할 경우에는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불손한 생각을 하지 마시길.”

“크윽!”

“당신은 꽤 완벽하게 흉내 냈습니다. 하지만 그 손톱이 문제였지요.”

“손톱……?”

“교 선생은 바늘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톱이 길면 여러모로 불편하지요. 해서 침술을 이용해서 아예 손톱이 자라지 않도록 조치한 걸로 압니다. 물론, 당신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매일같이 손톱을 다듬어서 결코 길지 않았지요. 다만 애초에 자라지 않는 손톱과 매일같이 갈아서 다듬은 손톱은 차이가 있지요.”

“……!”

“조공을 쓰시는 만큼 손톱이 자라지 않는 시술을 할 수 없었을 테니 고육지책이었겠지요. 하지만 날 속이려면 좀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혈조야귀가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그 정도로 세밀하게 자신을 관찰했을 줄은 몰랐다.

이따금씩 함께 차를 마신 것은 결국 자신을 관찰하기 위함이었던가?

가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당신은 흑천련으로 돌아가서 본 맹의 첩자 노릇을 하면 됩니다.”

혈조야귀가 주먹을 콱 쥐고는 가후를 노려보았다.

가후가 빙그레 웃었다.

“아시겠습니까? 좋은 칼은 이렇게 다루는 겁니다. 가서 미꾸라지가 되십시오.”

* * *

천하사대지자.

하늘 아래 네 명의 지혜로운 인간.

정확히 언제부터 천하사대지자라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십여 년 전부터 천하사대지자라는 단어가 어디선가 파생되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 첫 번째는 누군가?

많은 사람들이 첫 손가락에 무림맹 총군사 가후를 꼽는다.

이어서 흑천련의 총군사 요당을 꼽고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인 교패를 꼽는다.

끝으로 이제는 잊혀져 가는 만통지가 있다.

만통지는 정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은거기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순서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칼밥 좀 먹은 무인이라면, 강호에서 가장 똑똑한 자로 제일 먼저 만통지를 꼽으리라.

무공을 익히지 않았으나 세상의 이치를 꿰뚫은 자.

바닷속만큼이나 깊은 깨달음을 얻어 지혜가 하늘에 닿은 자.

심지어 황궁에서조차 군사 직을 맡기기 위해 수차례 불러들였으나 모두 고사하고 신기루처럼 종적을 감춘 자.

얼마나 아는 것이 많으면 그 별호가 만통지겠나?

천하사대지자?

웃기는 소리.

그 단어에서는 원래 ‘사대’라는 글자가 빠져야 한다.

천하지자.

불과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천하지자만이 존재했다.

그게 바로 만통지였다.

하지만 천하사대지자로 불리면서 그 첫 손가락에 가후가 꼽힌 것이다.

“그럼 천하사대지자라는 말을 만든 것도 어쩌면 가후일지도 모르겠군.”

“그럴지도요. 무림맹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일 수도 있었겠죠.”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적비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그래서 만통지의 위치는 알아냈소?”

“그러니까 가주님을 이렇게 모셨죠.”

은하란이 싱긋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돈이 꽤 많이 들었어요.”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이래서야 마치 살림꾼에게 잔소리를 듣는 심정이랄까?

적비연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어쩔 수 없었소. 필요한 정보였으니까.”

“이해해요. 어쨌든 그만한 돈은 있었으니까요.”

옆에 있던 극마가 툴툴거렸다.

-그래도 좀 친해져서 공짜로 정보를 줄 줄 알았더니. 받아먹을 건 다 받아먹는군.

적비연이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귀문회를 너무 물렁하게 본 거다.

화령이 유해 보인다고 해도 한 조직의 수장이 아닌가?

그것도 비밀 정보 조직으로는 강호 제일로 치는 귀문회주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돈 되는 정보를 막 퍼줄 리가 없지.

‘귀문회를 너무 믿어선 안 돼. 그들은 돈이 된다면 그 누구에게든 정보를 넘길 자들이니까.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세상 참 각박해졌군.

적비연이 내심 웃어넘기고는 은하란을 보았다.

“그래서 만통지의 위치는?”

“천목산에 있어요.”

“천목산?”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천목산이라면…….

“녹림?”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녹림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아요.”

“뜻밖이로군. 확실히 녹림채에서 그를 보호하고 있다면 강호에서 종적을 지울 수 있었겠지.”

애초에 산적들이 모여서 만든 녹림채.

하지만 그들을 단순히 산적이라고 얕잡아보면 큰코다친다.

녹림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유구한 세월 그들이 강호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험산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긴 세월 동안 많은 것들을 약탈했다.

거기에는 비단 재물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제 주인을 찾지 못한 온갖 신병이기와 비급서도 포함된다.

그리고 강호공적이 되어 쫓기는 악인들을 일정한 대가를 받고 숨겨주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무공을 익히기도 하고, 아예 무림공적이 산채의 두목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깊은 산속에서 자라나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은 게 바로 녹림이다.

그들의 생명력은 질기고 질기다.

인생 밑바닥에 머물다가 살기 위해 산속으로 숨어든 자들.

그들에겐 야생의 힘이 있다.

그래서 쟁쟁한 고수들이 으르렁거리는 강호에서도 녹림채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런 녹림채가 누군가를 숨겨주고 있으니 지금껏 그 행적이 묘연한 것도 일견 이해가 된다.

은하란이 적비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위치는 알았지만 상황이 좋지만은 않네요. 녹림채가 작정을 하고 만통지를 숨겨주는 것이라면 선뜻 협조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적비연은 여유가 있었다.

“괜찮소. 녹림채는 내게 진 빚이 있거든.”

“혹시 그게 수로채가 진 빚과 같은 성격인가요?”

확실히 은하란은 눈치가 빨랐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럼 다행이네요. 만통지를 찾으러 바로 가실 건가요?”

“아직. 일단 이곳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한 다음에 가야 할 것 같소.”

“하긴. 소식은 들었어요. 장로회가 곧 누굴 지원할지 정한다면서요?”

“그렇소. 그래서 좀 민감한 시기지. 조심해야 하고. 무엇보다 눈치 빠른 교패가 날 의심하고 있는 것 같으니.”

“제가 도와드릴 거라도?”

“아직은. 다만 언제든 필요하면 다시 연락하지.”

“그럼 살펴가세요.”

은하란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 * *

며칠 후.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누가 퍼트리기 시작한 건지는 모른다.

다만 가벼이 흘릴 수 없는 소문이었다.

얼마 전 흑천련 내원의 금역인 현무장에 침입자가 들어섰으며, 꽤 많은 자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문이다.

제아무리 흑천련에서 쉬쉬한다고 해도 이런 소문은 퍼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교패는 이해했다.

여기까지는.

한데 퍼진 소문은 그 이상이었다.

흉수는 혈조야귀며 현재 행적이 묘연한 상태라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는 것이다.

혈조야귀가 누군가?

교패와 똑 닮은 얼굴로 성형까지 한 교패의 심복이 아닌가?

자연히 교패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혈조야귀는 교 선생의 오른팔이 아닌가? 한데 그자가 금역에 들어갔다는 건…… 교 선생의 지시가 아니겠나?”

“이 사람아, 그건 말이 안 돼. 교 선생은 금역에도 들어갈 수 있어. 굳이 왜 수하에게 금역에 들어가라고 지시한단 말인가? 본인이 직접 들어가면 그만인 걸.”

“그건 그렇군.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으니 지시를 내린 게 아닐까? 그 교 선생이 침입자를 그냥 놓쳤다는 것도 영 이상하잖나?”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인 교패가 침입자와 대면하고도 놓쳤다는 것.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침입한 흔적은 있으나, 내원 밖으로 나간 흔적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원래 확실한 의심은 논란을 만들지 않는다.

그저 충격을 줄 뿐.

하지만 이건 정말 애매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많은 사람들의 입에 더욱 오르내렸다.

서호 주변의 객점이나 주루에는 삼삼오오 모였다 하면 사라진 혈조야귀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교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허황된 이야기.

사람들은 추워지는 날씨도 잊을 만큼 열띤 논쟁을 이어갔다.

사정이 이러니 당연히 수뇌부의 압박도 거세졌다.

교패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다.

“흐음.”

그는 창밖에서 떠들며 오가는 무인들을 보았다.

그들 역시 혈조야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없던 의심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권왕.’

그는 이 소문의 근원지가 권왕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소문으로 인해 권왕을 더욱 의심하게 됐다.

‘나를 상대로 머리싸움을 하자는 건지.’

그렇다면 응해줄 수밖에.

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마침 달콤한 향기를 풍기면서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왔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응대한 여인은 바로 화령이었다.

교패가 거두절미하고 입을 열었다.

“정보를 구하러 왔소.”

“원하시는 정보가 무엇인지요?”

“혈조야귀의 행방을 알고 싶소. 구할 수 있는 정보요?”

화령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답했다.

“물론입니다. 본 회는 어떠한 정보든 합당한 대가를 지불받으면 제공해 드립니다.”

교패가 희미하게 웃었다.

“대가는 서운치 않게 드리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