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95화 (196/301)

195. 낚싯줄에 걸리는 것은

“이쪽으로 오시지요.”

시종이 공손한 자세로 교패를 안내했다.

낭하를 따라 한참 걸어간 교패가 지객당 안으로 들어서자 시종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교패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을 보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것은 대략 닷새 정도 전이었다.

권왕전 무인들이 자신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투혈권왕과 각을 세워 대립한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행동은 미심쩍었다.

뭔가를 숨기는 듯한 시선과 언행.

그러던 차에 서호 주변으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혈조야귀가 이번 사건의 용의자이면서 그 배후에는 교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이 교묘하게 섞여 있었기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에 딱 좋았다.

자고로 소문이란 믿기지 않는 이야기일수록 파급력이 큰 법.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리는 존재다.

그리고 적당한 흔들림을 즐기는 존재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이 모든 상황에는 누군가의 의도가 숨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귀문회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은 없었기에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보다도 빠르게 귀문회는 답을 내주었다.

“혈조야귀는 현재 권왕전에 갇혀 있습니다. 반 호법장 자택에서 권왕전 호신위들과 이 공녀가 그를 사로잡았지요.”

역시!

귀문회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뺨을 가늘게 떨었다.

놀란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짐작한 바였다.

다만 투혈권왕이 자신을 어지간히도 우습게 봤다는 것에 조금 화가 나긴 했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머리싸움이라니.

‘이곳에…… 혈조가 잡혀 있다.’

교패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권왕전 후원.

이렇게 직접 찾아왔음에도 투혈권왕은 끝까지 발뺌을 할까?

그렇다면 이번 사건의 진짜 용의자는 투혈권왕일 가능성이 크다.

투혈권왕은 왜 혈조야귀를 잡았나?

어쩌면 혈조야귀 역시 자신처럼 투혈권왕을 의심했던 게 아닐까?

제자라고 보긴 어렵지만 자신이 가까이 두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심복이다.

자신이 일을 해결해나 가는 방식을 바로 옆에서 보며 많은 걸 배웠을 거다.

즉,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분명 냄새가 나는데…….

권왕에게서는 전에 없는 냄새가 난다.

언제부턴가 권왕의 태도가 묘하게 변했다.

한데 그게 뭔지 정확히 콕 짚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마침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마침 적비연이 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포권했다.

교패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는 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불쑥 찾아온 제 탓이지요.”

“교 선생과 제가 그리 딱딱한 사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든 편히 찾아주십시오.”

“말씀으로도 감사합니다.”

적비연이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자, 교패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렇게 마주 앉아서 차를 마셔보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그래도 교 선생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제법 됐었지요.”

“시간이 참 빠르지요.”

교패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상대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일부러 과거를 회상하며 말을 던졌다.

“정말이지 교 선생께서 제 기혈을 뚫어주신 게 엊그제 같습니다. 그때 사흘 밤낮으로 제가 운기조식하는 걸 옆에서 도와주셨지요.”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교패가 의외라는 표정을 잠깐 지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건…… 적어도 이혼대법 같은 건 아니라는 건가?’

잠시 생각을 한 교패가 내심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사실 이혼대법을 떠올렸을 때, 본인이 생각해도 좀 황당하다고 여겼다.

다만 그만큼 투혈권왕의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그런데 이렇게 당사자가 아니면 기억하기 힘든 말까지 꺼내는 걸 보면 이혼대법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교패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실 제가 오늘 공자님을 찾아뵌 것은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섭니다.”

“무엇입니까?”

적비연의 질문에 교패가 가만히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정공법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지난번 연못에서처럼 완곡한 표현을 쓰진 않을 것이다.

잠시 심호흡을 한 교패가 적비연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혈조야귀를 찾으러 왔습니다.”

“혈조야귀를 왜 여기에서……?”

“혈조야귀가 이곳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귀문회를 통해 입수한 정보입니다. 공자께서 어떤 의도로 그를 사로잡은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만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흐음.”

적비연이 침음을 흘렸다.

사실 그는 내심 놀랐다.

교패가 귀문회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오다니.

어딘지 교패답지 않달까?

아니, 그래서 더 교패다운 것일지도.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넘어서는 행동을 해왔으니까.

정공법이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리라.

적비연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된 정보요.”

교패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다니?

이번엔 교패도 조금 당황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동요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게 아닌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쯤에서 부아가 치밀어서 화를 냈으리라.

하지만 교패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조금은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귀문회로부터 받은 정보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잘못된 정보요.”

적비연은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며 하오체까지 사용했다.

그러면서 내심은 감탄을 금치 않았다.

‘이 정도 되면 기분이 나빠서 화를 낼 만도 하건대 끝까지 침착하군. 과연 교패다.’

-그러게 말이다. 나 같으면 귀싸대기부터 날리고 시작했겠구먼.

‘그건 그냥 네가 내게 하고 싶은 행동을 말한 것 같은데?’

-독심술도 쓸 줄 아는 거냐? 주인.

‘됐다. 말을 말지.’

적비연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극마는 끝까지 길들여지지 않을 모양이다.

하긴.

마선의 경지까지 오른 고수가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어쨌거나 교패는 지금 차갑게 식은 눈으로 적비연을 마주 보았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까?

아까부터 서로 내뱉는 말에 예기가 실려 있다.

여기서 자칫 실수를 했다간 내뱉는 말에 제 목이 베일 수도 있다.

교패가 쓴웃음을 짓더니 찻잔을 들었다.

“역시 그렇군요. 귀문회도 실수를 할 때가 다 있군요. 저도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한데 공자님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귀문회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호오,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서는데?

‘그렇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어. 상대는 교패니까.’

적비연이 차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시종 하나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적비연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적비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패를 보았다.

“아무래도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대사형께서 오셨다는군요.”

“아, 그럼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가보시지요. 차를 마저 마시고 천천히 돌아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적비연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교패.

순간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됐다. 이걸로 일각의 시간을 벌었다. 일각 안에 권왕전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혈조를 찾아내야 한다.’

교패가 남은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아혈을 점혈당한 혈조야귀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소리를 내지르고 싶어도 쉭쉭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제길!’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림맹 권역의 경계를 넘어갈 때쯤 가후에게서 지령을 받았다.

반철룡과 벽력적가주의 관계를 조사하라는 것.

한데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투혈권왕이 얽혀들었다.

심지어 벽력적가에서 봤던 여자 무인이 투혈권왕을 깍듯하게 대하는 것까지.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좋게 보자면 투혈권왕이 벽력적가를 집어삼켰다는 것이다.

나쁘게 보자면 투혈권왕이 본 련을 배신하고 벽력적가와 손을 잡았다는 거다.

한데 이게 또 웃기는 일이다.

정작 무림맹 총군사인 가후가 모른다는 것.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긴. 지금 내 주제에 누가 누굴 배신한다는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나?

그때였다.

굳게 닫힌 철문 밖에서 돌연 권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권왕이 존대를?

혈조야귀가 흠칫거리고는 귀를 기울였다.

“아, 함부로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차분한 어조로 답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교패였다.

물론 혈조야귀는 교패의 목소리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주군! 여깁니다!’

당장에라도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의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째서 이런 곳에서 서성이시는지? 설마 길을 잃은 것은 아니시겠지요?”

“흐음. 죄송합니다. 사실 제 눈으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긴…….”

“취조실입니다.”

“문이 잠긴 것 같은데 한 번 들여다봐도 되겠습니까?”

“불가합니다.”

“어째서……?”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만.”

“교 선생, 예외라는 것을 두다 보면 결국 규칙이 무너지는 법이라고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렸군요.”

혈조야귀가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저놈……! 주군!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입에서는 여전히 바람 빠지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마혈까지 당했기에 몸부림을 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교패가 포기하는 듯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갔다.

‘제길! 어서 여길 벗어나지 않으면……!’

이곳을 벗어나는 대로 교패를 찾아가 저 미친놈이 내뱉은 말을 낱낱이 까발리리라.

‘어떻게든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 * *

교패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권왕이다.

련주의 네 번째 제자이자, 현재로서는 강력한 차기 련주로 급부상한 인물이다.

그런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심증은 가되 무턱대고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만하면 다 된 거다.

귀문회로부터 받은 정보와 지금까지 보인 권왕의 반응!

‘혈조야귀가 사로잡혀 있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권왕전을 함부로 수색할 수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식 수색 권한을 련주에게 요청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권왕인 만큼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그래서 교패는 곧장 대공자를 찾아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기꺼이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

이미 장로회는 이번 현무장 사건을 해결하는 자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내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대공자라면 자신의 제안을 결코 가볍게 듣지 않으리라.

파천전으로 들어서니 파천신군 이자권이 기다렸다는 듯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교패가 포권을 하며 답례했다.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교 선생의 청이라면 내가 무엇인들 못 들어주겠습니까? 이제 내게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조금 전에는 어째서 권왕을 찾아가라고 한 것인지. 설마 사형제지간에 사이좋게 차나 한잔 하라고 주선한 건 아닐 테고.”

교패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현무장 사건의 용의자를 파악했습니다.”

이자권이 반사적으로 흠칫거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다만 그 용의자가 제 선에서 해결하기에는 좀 버거운 상대입니다.”

이자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교패의 대답에 따라 자신에게는 상당한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게 설마…….”

마침내 교패가 자신이 생각한 답을 시원하게 내주었다.

“예, 사 공자, 투혈권왕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