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낚싯줄에 걸리는 것은
한참만에야 이자권의 입이 떨어졌다.
“확실한 겁니까?”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중해져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대공자의 신분이라지만 이번 일만큼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무턱대고 몰아붙였다간 오히려 역풍을 제대로 당할 수도 있기에.
원래 대어를 낚을 때는 지나치게 힘을 줘서는 안 되는 법.
자칫 낚싯줄이 끊어지면 득보다 실이 크지 않겠나?
그런고로 확실히 해야 한다.
이게 정말 대어인지.
아니면 그저 바위에 걸린 것인지.
자칫하면 차기 련주 자리를 탐내서 사제 간의 도의마저 저버린 몰인정한 대사형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교패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자권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확실합니다.”
“근거는?”
교패가 말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곱게 접힌 한지였다.
이자권이 한지를 펼쳐 들자 그 안에서 조그마한 손톱이 나왔다.
“이게 뭐요? 손톱……?”
“맞습니다. 누구의 손톱인지 아시겠지요?”
“칼날처럼 단단하고 색이 검은 것으로 보아서는 필시 조공을 익한 자의 손톱일 터. 혹시…… 혈조의 것이오?”
“그렇습니다. 익힌 무공의 특성상 혈조의 손톱은 잘린 후 만 하루가 지나면 핏빛에서 흑빛을 띠게 되지요.”
이자권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그는 지금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걸 어디서 발견하셨소? 설마…….”
교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왕전 취조실 근처에서 발견했습니다.”
교패가 확신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이자권이 투혈권왕을 만나서 시간을 끌어준 그 일각의 시간 동안 취조실 근처에서 발견한 결정적 증거였다.
“혈조가 남긴 흔적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면 취조실 확인은 하셨소?”
교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대공자를 찾아뵙지도 않았겠지요. 권왕이 끝까지 공개하지 않더군요.”
“흐음.”
이자권이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가 다시 무거운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단서가 부족하지 않겠소? 만약 수색을 했다가 혈조가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쪽이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소.”
“귀문회에서 얻은 정보와 일치합니다.”
“귀문회까지?”
“시간을 다투는 문제라 귀문회에서 먼저 정보를 입수한 후 검증 차원에서 다녀온 것입니다.”
“과연.”
이자권의 표정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귀문회에서 얻은 정보. 거기에 혈조야귀의 손톱. 그리고 권왕의 이해하기 힘든 대응.
이만하면 십중팔구가 아닌가?
이자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여기서 이럴 문제가 아니군. 한데 교 선생께서는 권왕전에 다녀왔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습니다만.”
“하면 사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위기의식을 느끼고 후속 조치를 취했을 지도 모를 일이 아니오? 가령 혈조를 다른 곳으로 빼돌린다거나.”
“물론 거기까지 예상하여 권왕전 주위로 고수들을 상당수 배치해 두었습니다. 물 샐 틈도 없이 감시하고 있으니 무리한 행동은 하지 못할 겁니다. 단, 시간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서는 서둘러야겠지요.”
‘혈조의 시체라도 찾으려면…….’
교패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자권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확실히 대어를 낚을 기회다.
망설이다간 놓치고 만다.
이 정도면 장로회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패까지 끌어들일 확률이 높아진다.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디 그뿐인가?
규율을 어기고 범행까지 저지른 투혈권왕은 재기가 불가능해지리라.
압승의 고지가 눈앞에 있는 셈.
“좋소. 당장 갑시다. 내 교 선생께 힘을 실어드리겠소.”
“감사합니다.”
교패가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 시각 혈조야귀는 권왕전 취조실에서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들던 그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혀를 꾹 깨물었다.
찢어진 혀에서 비릿한 피맛이 느껴진다.
졸면 안 된다.
정신을 차려야 어떻게든 기회를 낚아채서 빠져나갈 수 있다.
교패가 자신에게 늘 했던 말이 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일지라도 그 위기를 타개할 단 한 번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는 것.
그래, 분명 기회가 있을 거다.
때마침 문밖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문 앞에서 소리쳐 묻는 자는 투혈권왕의 좌호법인 엽강호인 듯했다.
이내 다른 목소리가 대꾸했다.
“혈조야귀를 처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순간 혈조야귀가 눈을 부릅떴다.
나를 처리하라니?
죽이겠단 소린가?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혈조야귀는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귀를 세워 문밖에서 나누는 대화 소리에 집중했다.
중간중간 목소리가 끊어지긴 했지만 대략의 정황은 파악할 수 있었다.
“벌써? 예상보다 빠르군.”
“교 선생이 내부 수색권을 얻기 위해 대공자와 함께 흑천궁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뭐야? 그럼 서둘러야겠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사람이 들어왔다.
엽강호와 여추백이었다.
혈조야귀는 눈을 감고는 기절한 척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앞으로 있을 단 한 번의 기회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엽강호가 턱짓을 하자 여추백이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뺨을 후려쳤다.
짜아악!
정말이지 살이 찢어져 나갈 것만 같은 통증이었다.
하지만 혈조야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내심으로는 여추백을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여추백이 엽강호를 돌아보았다.
“이 녀석, 완전히 뻗었는데요?”
“줄곧 고문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일단 풀어. 여기서 끝내고 시체는 화골산(化骨散)으로 녹여 버린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여추백이 공진철을 풀고는 혈조야귀를 질질 끌었다.
어차피 마혈을 점했기 때문에 공진철을 푼다고 해서 혈조야귀가 갑자기 미쳐 날뛰지는 못할 터였다.
혈조야귀는 바닥에 반듯하게 누운 채로 생각했다.
‘화골산을 쓴다는 건 사혈을 점해서 최대한 흔적 없이 죽이겠다는 심산이로군.’
만약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른다면 반드시 병장기에 피를 묻히거나 주변으로 피가 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혈을 점하면 혈흔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익힌 혈조마공 특성상 혈흔이 남게 되면 특유의 검붉은 빛깔 때문에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리라.
‘생각보다 아주 멍청하진 않구나. 하지만…….’
사혈을 확실히 점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혈을 풀어야 한다.
기혈이 막힘없이 흐를 때 점혈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가 마지막 기회다.’
마침 엽강호가 혈조야귀 앞으로 걸어오더니 지풍을 날렸다.
툭! 툭툭툭!
몸 몇 군데에 지풍이 닿자 혈조야귀의 몸이 꿈틀거렸다.
엽강호가 재빨리 다시 사혈을 점하기 위해 지풍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쉬이이잇, 파박!
“엇!”
느닷없이 벌떡 일어난 혈조야귀가 빛살같이 손가락을 뻗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의 손가락을 보통 무인의 칼과 다름없다.
당황한 엽강호가 성큼 물러나자, 혈조야귀의 손가락이 허공을 할퀴었다.
“칫!”
혀를 찬 혈조야귀가 그대로 철문을 향해 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두 놈을 바닥에 때려눕히고 싶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다.
오랫동안 공진철에 구속되어 있던 상태였기에 몸 상태가 온전하진 않다.
타다다닷!
그가 경신술을 펼쳐 달리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울렸다.
“뭐 하냐! 잡아라!”
“예, 옛!”
여추백이 얼른 소리치며 뒤따라왔다.
하지만 이미 혈조야귀는 복도를 벗어나서 권왕전 마당까지 뛰쳐나온 상태.
주변이 갑자기 밝아지자 햇빛이 바늘처럼 눈알을 쑤셔댔다.
“크읏!”
그가 눈을 잔뜩 구기고는 담장을 향해 냅다 달렸다.
혈조마공의 특성상 다른 무인들보다 빨리 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보통 조공처럼 몸의 일부를 무기화하는 경우 내공 회복이 남들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파바밧!
순식간에 담장을 넘은 혈조야귀는 그대로 심원을 바라보며 달려갔다.
‘교 선생을 먼저 만나야 한다!’
마침 엽강호와 여추백도 담장을 뛰어넘어 혈조야귀 뒤를 바짝 쫓아왔다.
평소라면 두 사람쯤은 가볍게 따돌렸겠지만 공진철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마침내 거의 따라잡혔을 무렵,
슈슈슈슈슉!
갑자기 혈조야귀 뒤로 그림자들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촤아아앗!
급하게 멈춰 선 엽강호와 여추백이 미간을 좁히고는 소리쳤다.
“웬 놈들이냐!”
“교 선생의 지시로 권왕전을 감시 중이오. 더 이상 그를 쫓으면 무력으로 맞설 것이오.”
엽강호와 여추백이 짐짓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엽강호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감히 권왕전에 맞서다니.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소?”
“우리는 교 선생의 지시를 따를 뿐.”
“흥! 좋소. 돌아가자.”
엽강호가 몸을 돌리자 여추백이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 * *
“권왕전을 수색하겠다는 건가?”
주렴 너머의 그림자가 착 가라앉은 음성을 흘렸다.
흑천련의 주인이자, 절대강자인 태청강의 목소리였다.
교패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곡불한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권왕을 의심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만약 수색했다가 아무런 혐의도 나오지 않으면? 그땐 교 선생께서 다 책임질 수 있겠소?”
“책임은 내가 지지요.”
“대공자……!”
곡불한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자권을 돌아보았다.
교패가 이자권과 함께 올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탓이다.
“대공자님, 이건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자칫 무리수를 두시다간…….”
“무리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합니다.”
이자권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 말투만큼은 단호했다.
“끄음.”
곡불한이 침음을 흘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자권까지 이토록 적극적으로 나서니 흑천궁에 모인 수뇌인사들이 술렁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다섯 제자 중 한 명이 금역에 들어가서 많은 이들을 죽이기까지 했다는 건 믿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한참 만에야 주렴 너머의 그림자가 다시 목소리를 흘렸다.
“요 군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러자 가장 상석에 서 있던 요당이 철접선을 접으며 말했다.
“혐의가 있으면 조사를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조사를 함에 있어서 성역은 없어야겠지요.”
다시금 장내가 술렁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콰다앙!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흑천궁 정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인영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놀라서 돌아본 곳에는 처참한 몰골의 혈조야귀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서 있었다.
“혈조……!”
누구보다 교패가 가장 놀라서 소리쳤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흑천궁에 모였던 수뇌인사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사라졌다던 혈조야귀가 갑자기 나타나다니?
한편 혈조야귀는 길게 깔린 융단 복판까지 겨우 걸어와서 쓰러지듯 무릎을 꿇고는 포권했다.
“존엄하신 련주님 앞에 불쑥 찾아온 것을 사죄드립니다! 하나 급히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무례를 무릅쓴 것이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혈조! 자네,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교패가 황망한 표정으로 소리치는데,
“하, 이 새끼가 여기까지 도망쳤네.”
불쑥 들린 낯익은 목소리.
이번에도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이제 막 흑천궁 안으로 들어선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혈조야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넌 좀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