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97화 (198/301)

197. 진짜 배신자는

순간 흑천궁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사라졌던 혈조야귀가 갑자기 나타난 것도 모자라서 투혈권왕까지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하면…… 교패의 추측이 사실로 밝혀진 셈이 아닌가?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파천신군 이자권만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거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군.’

한편 혈조야귀는 흑천궁까지 따라온 적비연을 보면서 입을 척 벌렸다.

‘저, 저 미친놈이 언제 여기까지……!’

적비연이 싸늘한 미소를 머금더니 융단을 따라 거침없이 걸어왔다.

“회의 중이신데 불쑥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권왕전에서 사로잡은 죄인이 달아나는 바람에 무례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적비연은 당장에라도 혈조야귀를 잡고 끌고 나갈 기세였다.

그러자 교패가 얼른 그 앞을 막아섰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적비연이 교패를 빤히 보았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권왕전에서 탈옥한 죄인을 잡으려고…….”

“지금 절 놀리시는 건지요? 저자는 혈조야귀가 아닙니까?”

교패가 딱딱한 음성으로 쏘아붙이자 장내의 수뇌인사들이 술렁거렸다.

적비연은 소란이 조금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상대가 혈조야귀면 죄를 지어도 무관하다는 건지?”

교패가 미간을 슬쩍 구겼다.

본질을 회피하는구나.

하지만 어림없는 수작.

자신을 상대로 말싸움을 하려는 것인가?

그때 혈조야귀가 얼른 교패에게 달려오며 부복했다.

“주군! 아닙니다! 저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권왕이 이유 없이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부디 제 말을 믿어주십시오!”

“진정해라. 그렇잖아도 내 너를 찾으려고 했다. 대체 그간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혈조야귀가 적비연을 사납게 쏘아보며 답했다.

“권왕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자 장내의 수뇌인사들이 다시금 술렁였다.

“교 선생의 추측대로군.”

“하면 정말로 권왕께서……?”

“허어, 그럴 리가.”

작은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가 교패와 적비연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렸다.

이자권은 그저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

그는 적비연을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일부러 찾아갈 수고까지 들어주는군.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이 몰락하게 되는 걸 보는구나.’

몰락이라는 표현도 우습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 공자는 떠오르지도 않은 별이었다.

잠룡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그저 개천의 도룡뇽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운 좋게 비밀 임무에 성공하면서 갑자기 과대평가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가야 할 때.

‘대체 네놈이 금역에서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제 무덤을 팠으니 이제 끝이다.’

서두를 필요도 없다.

오히려 지금 급한 건 권왕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교패가 조금은 느긋한 태도로 혈조야귀에게 물었다.

“조금 전 급히 보고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무엇이냐?”

“그건 권왕이…….”

그때 적비연이 말을 가로지르며 불쑥 끼어들었다.

“그놈 입에서 나오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소. 어차피 새빨간 거짓말이오.”

“절대 아닙니다! 권왕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절 믿으셔야 합니다. 권왕전주는 본 련을 배신하고 몰락시킬……!”

“노옴! 그 더러운 입을 닥치지 못할까!”

찰나지간 적비연이 품에서 비수를 꺼내 날렸다.

쒸에에엑!

빛살처럼 뻗어나간 비수가 혈조야귀의 미간에 꽂히려는 순간,

삐잉, 따앙!

교패의 손을 떠난 바늘이 비수를 쳐내면서 청명한 금속성이 울렸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

분위기가 거칠어지자 장내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교패가 불쑥 나서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공자!”

“보면 모르겠소? 저 악랄한 죄인이 세 치 혀로 여러분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염려되어 손을 쓴 것이오.”

그러자 혈조야귀가 두 눈에 핏발까지 세우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저자는 지금 절 죽여서 살인멸구(殺人滅口)하려는 개수작입니다! 절 믿어주십시오!”

“닥쳐라! 네놈이……!”

적비연이 다시 소리치자 교패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만. 혈조! 공자께 예를 갖추도록 하라!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주, 주군……! 절 믿으셔야 합니다!”

“시끄럽다. 아직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 련주님이 계시는 앞이다. 진정하고 예를 갖추도록 하라!”

“죄, 죄송합니다.”

교패가 다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공자께서도 자중해 주시지요. 영문을 알 수 없으니 일단 전후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혈조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는 듯합니다만.”

“죄인의 말을 굳이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자 이번엔 이자권이 불쑥 나섰다.

“그건 네 생각이고. 나 역시 교 선생과 같은 의견이다. 더구나 사부님이 보시는 앞에서 피를 보는 것이야말로 무례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쯤 되자 적비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형마저 그리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적비연이 한발 물러나자 교패가 혈조야귀를 돌아보았다.

“이제 말해보게.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저는 며칠 전 사 공자를 미행하다가 함정에 빠져서 권왕전 무인들에게 사로잡힌 후 지금껏 취조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사 공자를 미행해? 어째서?”

“우연히 사 공자와 벽력적가의 무인이 만나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장내가 술렁거렸다.

“사 공자가 벽력적가와 접선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이건 보통 일이 아닌데.”

상황이 심각해지자 지켜만 보던 장로회주 유형백이 엄한 투로 다그쳤다.

“혈조! 자네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혹여, 자네가 내뱉은 말 중 한 치의 거짓이라도 섞여 있다면 노부가 용서하지 않을 걸세!”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사실이니 믿어주십시오.”

교패가 미간을 좁히고는 말했다.

“계속해 보게.”

“예, 주군. 사 공자는 저를 취조실에 가둬두고는 믿기 힘든 말을 했습니다.”

“그게 뭔가?”

“자신이 흑천련을 망하게 만들고 무림을…… 지배할 것이라고…….”

혈조야귀의 목소리가 조금은 작아졌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 스스로 이야기를 하면서도 왠지 주눅이 들었다.

“무림을 지배하다니……?”

수뇌인사들이 수군거리는 와중에 이자권이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무림을 지배한다니. 사제, 대체 무슨 말을 떠든 건가? 실성이라도 한 것이더냐?”

이제 모두의 시선이 적비연에게 향했다.

교패도 적비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입니까?”

적비연이 가만히 교패를 마주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소? 설사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한들, 그걸 저 녀석에게 얘기했을 리가 있겠소?”

그러자 혈조야귀가 억울한 표정이 되어서는 소리쳤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벽력적가의 무인과 접선하는 것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놈의 죄를 나한테 덮어씌우려고 하는구나.”

“사 공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거요? 분명 나는……!”

“시끄럽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적 없다. 벽력적가 무인을 만난 적도 없고.”

“저, 저런…… 뻔뻔한 거짓말을……!”

“닥쳐라! 여러분, 저놈은 지금 무림맹의 지시를 받고 본 련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느닷없는 주장에 수뇌인사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는 정말 벽력적가와 접선하지 않은 건가?”

유형백이 나서서 묻자, 적비연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의하면, 지금 무림맹은 벽력적가를 포위하고 장사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떠나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답니다. 그만큼 그들도 벽력적가를 탐탁찮게 여긴다는 거지요. 그러니 본 련과 벽력적가를 한꺼번에 묶어서 혼란에 빠트려 일석이조를 노리겠다는 가후의 계책인 겁니다.”

“여기서 왜 갑자기 무림맹 총군사가 나오는 건가?”

“그 이유는…….”

적비연의 시선이 혈조야귀에게 향했다.

“저 녀석의 머릿속에는 흑뇌고가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순간 장내가 다시 혼돈에 빠져들었다.

“흑뇌고라니!”

“맙소사! 그게 정말인가?”

한편 혈조야귀는 숨이 멎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저, 저 녀석……! 내가 흑뇌고에 당한 걸 알고 있었어?’

그럴 리가!

흑뇌고는 의술이 신의 수준 정도 되어야 겨우 감지할 수 있다고 들었다.

한데 투혈권왕이 무슨 재주로 자신에게 기생하는 흑뇌고를 감지한단 말인가?

교패가 미간을 좁히고는 나섰다.

“공자, 그 말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오. 정 믿지 못하겠다면 교 선생께서 직접 확인해 보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겁니다. 하나, 만약 흑뇌고가 없다면?”

“그럼 나는 모든 직위를 내려두고 본 련을 떠나겠소.”

이쯤 되자 수뇌인사들은 이제 놀라기도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교패와 이자권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할 일.

이자권이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무리수를 두는구나. 흑뇌고라니? 하!’

분명 차기 련주 자리가 탐나서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리는 것이리라.

그러는 사이 교패가 혈조야귀에게 다가갔다.

“혈조, 손목을 내밀게.”

“주, 주군! 설마 정말로 사 공자의 말을 믿습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그 누구도 믿지 않네. 그저 확인만 할 뿐일세.”

혈조야귀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바작바작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주춤 물러나자 교패가 눈살을 구겼다.

“혈조?”

“주, 주군. 이러지 마십시오. 저는 정말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렇다면 더욱 당당하게 진맥을 받게.”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설마 나를 못 믿는 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진맥을 할 것인데.”

“하, 하지만…….”

이제 혈조야귀의 낯빛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이대로 있으면 꼼짝없이 흑뇌고에 당했다는 것을 들키고 말리라.

마침 적비연이 미운 소리만 골라서 했다.

“보시지요. 뭔가 찝찝한 게 있으니 저러지 않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혈조야귀는 무림맹에서 정체를 들킨 겁니다. 그 후 흑뇌고가 심어져서 본 련으로 돌아온 거죠. 그 덕에 경계지를 넘어설 때도 사지육신이 멀쩡할 수 있었던 겁니다. 유일하게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귀환했죠. 그리고 지령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본 련의 금역인 현무장까지 잠입을 한 겁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억울합니다!”

혈조야귀가 소리치자, 지금껏 차분하게 대응하던 교패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니까 진맥을 받으시게!”

교패는 짜증이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혈조야귀가 흑뇌고에 당하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혈조야귀의 반응을 보니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다.

반면 혈조야귀는 거의 울어 버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교패와 혈조야귀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혈조야귀가 어느 순간 몸을 돌리더니 바닥을 박찼다.

타앗!

그가 쏜살같이 달아나려는데,

슈슈슈슈슉!

차차차차창!

허공에서 그림자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혈조야귀를 단숨에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그들 모두 서슬 퍼런 칼날을 꺼내 들고 혈조야귀를 겨누었다.

“헛……!”

혈조야귀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물러나자 그 뒤로 교패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자네 정말로……!”

“주, 주군……!”

혈조야귀의 동공이 흔들린다.

찰나,

팟!

혈조야귀가 몸을 날리더니 앞을 가로막은 무인에게 조공을 펼쳤다.

촤촤아악!

까가아앙!

“크웃!”

“읏!”

두 명의 무인이 간신히 조공을 막아내며 주춤 물러났다.

그 틈으로 혈조야귀가 달리려는 순간,

“어딜!”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더니 단숨에 달려 나가 혈조야귀의 등짝에 일권을 가했다.

시커멓게 물든 주먹이 등을 때리자 혈조야귀의 가슴이 터져 나갔다.

콰아앙!

“크어억!”

굉장한 울림이 일어났지만 혈조야귀는 그 자리에서 석상이라도 된 듯 꿈쩍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가 울컥 피를 토하는가 싶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적비연이 혈조야귀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와서는 육단 복판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교패를 보는 적비연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이제 제 말 좀 믿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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