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차도살인(借刀殺人)
“크윽!”
혈조야귀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내몰린 걸까?
이제 흑천궁에 모인 무인들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구심을 품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확실히 경멸과 분노를 담은 눈초리.
그는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흑뇌고가 심어져 있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는 꼴.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혈조야귀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죽을 땐 죽더라도 저 새끼만은 저승동무로 삼는다!
결심을 굳힌 그가 순간 혈조마공을 극한까지 일으키며 적비연에게 달려들었다.
“노옴! 죽어라앗!”
쒸이이익!
순식간에 자라난 붉은 손톱이 적비연의 목과 가슴을 갈라 버릴 듯 날아갔다.
찰나지간 적비연 앞을 교패가 막아섰다.
삐삐잉!
그의 손에서 바늘이 떠나가자 혈조야귀의 손톱과 부딪치면서 튕겨 나갔다.
따다앙!
“크읏!”
비틀거리며 물러난 혈조야귀 앞으로 교패가 성큼 이동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혈조야귀 코앞에 나타난 것.
“주, 주군……!”
교패는 분을 삼키는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혈조야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교패가 적비연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씹어뱉듯이 말했다.
“공자, 이자의 최후를 제게 맡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수하를 잘못 둔 죄, 제가 직접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
“저야 상관없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도 오랜 정이 있으실 터인데.”
적비연이 짐짓 생각해 주는 척 말하자, 교패가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답했다.
“사사로운 정으로 배신자를 눈감아 줄 수는 없지요.”
“과연 교 선생이십니다. 제 목숨을 노린 게 괘씸하지만, 교 선생께서 그리 강직하게 마음먹으셨다니 제가 양보해드리겠습니다.”
교패가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슬쩍 끄덕였다.
혈조야귀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서 교패를 올려다보았다.
실망감이 가득한 시선.
교패가 자신을 저런 눈길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없다.
그래서 지금 교패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다.
“주, 주군…… 제발……!”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간절한 마음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역시 교패는 입을 꽉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바늘을 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끝이다.
쉬잇, 푹!
순식간에 교패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정수리에 침 하나가 깊이 박힌 혈조야귀가 서서히 눈을 까뒤집더니 그대로 털썩 넘어가 버렸다.
혈조야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잠시 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혈조야귀의 콧구멍에서 코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에 젖은 채로 꾸물거리며 기어나오는 벌레.
“흑뇌고……!”
유형백이 무겁기 짓눌린 음성을 신음처럼 뱉어냈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흑뇌고가 들어 있었다니.
숙주를 잃은 흑뇌고가 혈조야귀 뺨에서 서성이더니 이내 몸을 벌렁 까뒤집었다.
키엑!
그렇게 흑뇌고도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다가 몸이 터져 죽고 나자 장내는 침묵이 장악해 버렸다.
교패가 손을 뻗자 혈조야귀의 정수리에 꽂혀 있던 침이 쑥 뽑혀 나와 손에 잡혔다.
능공섭물의 수법이었다.
그가 돌아서서 적비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 손으로 내 사람을 죽게 만든 오늘을 결코 잊지 않을 거요.’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비연이 태연하게 다가와 포권했다.
“본 련을 위하는 교 선생의 진심에 깊이 감복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교패의 눈빛이 짐짓 날카로워졌다.
그가 뭐냐는 듯 바라보는 적비연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혈조에게 흑뇌고가 심어져 있다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그러자 듣고만 있던 이자권이 한 걸음 나섰다.
“확실히 이상하구나. 흑뇌고는 의술에 통달한 자가 아니고서는 눈치채기도 어려운 것인데. 너는 그 사실을 어찌 알고 있었느냐?”
이제는 수뇌인사들까지 모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가벼이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적비연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그냥 떠본 겁니다.”
“뭐?”
이자권은 물론 교패와 다른 수뇌인사들까지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교패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떠본 거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심증은 매우 확고한데 혈조가 끝까지 부인하니 어쩌겠습니까? 마침 여기에 교 선생도 계시니까 흑뇌고가 심어졌을 거라고 떠봤습니다. 의술에 조예가 깊은 교 선생이라면 알아채실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교패는 적비연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심증만 가지고 떠봤다고?
만약 그랬다가 흑뇌고가 없었다면?
그럼 무모한 도박을 한 대가로 영원히 흑천련에서 제명됐을 거다.
설마 그걸 감수했다고?
그럴 리가.
그때 유형백이 파안대소를 하며 한 걸음 나섰다.
“허허허! 정말 대단한 기백일세. 심증만으로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심중을 굳혔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미가 어느 분을 꼭 닮았구나.”
유형백의 눈길이 주렴 너머의 그림자로 향했다.
그랬다.
흑천련주 역시 소싯적 무모하리만큼 자신의 운명을 몰아붙이곤 했던 것이다.
유형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사 공자가 아니었다면 이번 사건은 해결하기가 무척 까다로웠을 터. 본 회는 오늘부로 사 공자를 차기 련주로 지지할 것을 공식 선언하겠네.”
“……!”
교패와 이자권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이자권이 유형백을 돌아보았다.
“회주님, 그리 가벼이 결정하실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벼이 결정한 것이 아닐세. 본 회는 이번 사건을 해결한 자를 적극 지지할 것이라고 이미 밝힌 바가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도 없으니 대공자께서는 서운하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게.”
“그런…….”
이자권의 표정이 흙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는 사이 교패가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그럼 한 가지만 더 질문드리지요.”
“말씀하시죠.”
“취조실에서 심문한 것 같은데 뭔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습니까? 가령 혈조가 왜 금역에 들어간 것인지.”
“흑뇌고에 당한 탓인지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흑뇌고에 당했을 때 지령에 반하는 행동을 할 경우 발작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럼에도 혈조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신 거군요.”
“직감이랄까요? 요즘 사저와 부쩍 친하게 지내다 보니 저도 직감이 좋아졌나 봅니다. 한데 교 선생께서는 직감이 좀 떨어지신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지?”
“듣기로 현무장에 침입했던 혈조와 손까지 섞으셨다던데…… 정말 몰랐습니까?”
순간 교패가 눈살을 슬쩍 구겼다.
‘나를 몰아붙이려는 건가?’
과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적비연의 의도는 어느 정도 먹혀드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교 선생이 손까지 섞었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셨군.”
“설마…….”
“허어, 그럴 리가. 괜한 의심은 품지 맙시다.”
“그래도 워낙 소문이 많으니…….”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적비연이 불을 더 지폈다.
“혈조는 교 선생의 심복이죠. 그토록 가까이에 두고 지낸 자였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셨다는 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지요.”
그러자 이번엔 곡불한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나섰다.
“과연!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소?”
이쯤 되자 교패도 기분 나쁜 표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가 장내를 둘러보다가 곡불한을 향해 짐짓 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나마저 의심하는 거요?”
“상황이 그렇지 않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는 없을 테고. 서호 거리에 떠도는 소문을 나도 들어서 말이오. 게다가 정황상 혈조가 범인이라면 그 배후는…….”
“자중하시지요. 곡 당주님.”
뜻밖에도 나서서 말리는 사람은 적비연이었다.
적비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정말 교 선생이 배후라면, 이 자리에서 혈조야귀를 몰아붙여 흑뇌고를 밝히지 않으셨을 겁니다. 어차피 본 련에서 흑뇌고를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교 선생뿐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장내의 다른 수뇌인사들도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듣고 보니 그렇군.”
“이제 보니 사 공자께서 대인배시군요. 교 선생이 권왕전을 수색하려는 걸 아셨을 텐데도 저리 공명정대하게 대응하시다니.”
수뇌인사들이 저마다 적비연을 보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자권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저 새끼가…….’
단 하루 만에 평판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장내 수뇌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확실히 눈도장을 찍은 셈이다.
원래 그 도장은 자신이 받았어야 했다.
한데 모든 게 꼬이고 말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요! 교 선생!’
이자권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교패를 노려보았다.
순간 의구심도 들었다.
‘설마 교 선생이 날 일부러……?’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을 해서 교패가 얻는 게 뭔가?
흑천련을 향한 그의 충심은 거짓이 아니다.
그의 성품상 혈조야귀를 알고도 감쌌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건…….
‘역시 저놈이란 말인가?’
이자권의 시선이 다시 적비연에게 향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덕담을 겸양쩍은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적비연.
갑자기 적비연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지금까지는 막연한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꽤 확실히 다가온다.
마침 적비연이 이자권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저는 교 선생을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사형.”
이제 수뇌인사들의 시선이 이자권에게 향했다.
적비연은 자연스럽게 마지막에 이자권을 언급하면서 애초에 이 자리를 만든 사람이 그라는 것을 환기시킨 것이다.
이자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말이…… 맞다.”
한편 이 모든 과정을 교패는 담담히 지켜보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권왕……!’
사람이 저리 변하다니.
빙백독광사 내단을 복용했다는 것만으로 저럴 수는 없다.
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처럼 노회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마치 자신을 가지고 노는 기분이다.
모처럼 제대로 당했다.
‘그동안 내가 권왕을 몰랐던 건가?’
혈조야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수색권을 요청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게 됐다.
오히려 권왕의 평판만 드높여주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정말 이 모든 것을 의도한 것이라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자로군.’
적비연을 보는 교패의 시선에 경계심이 가득 담겼다.
* * *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면서 관제묘 안으로 방갓을 눌러쓴 사내가 들어섰다.
곧 문이 닫히자 실내에는 빛 한 줌 스며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방갓 사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흑뇌고가 숙주를 잃었습니다.”
놀랍게도 어둠 속에서도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제로?”
방갓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타살입니다.”
“호오, 하면 혈조가 이쪽의 첩자라는 게 발각됐다는 말인데…… 흑천련에 그만한 인물이 있다는 건 놀랍군요.”
“금목원에서 조사 중이니 곧 정확한 사인이 밝혀질 겁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을 터. 이왕 이렇게 됐으니 계획을 조금 더 당기지요.”
“하면…….”
“냉혼신검 설규를 이용하지요.”
방갓 사내가 흠칫거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천림(天林)이 열리겠군요.”
“차질 없이 준비하시길.”
“명심하겠습니다.”
방갓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새로운 하늘이 열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