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199화 (200/301)

199. 기회

흑천련 내의 평판이 달라졌다.

아니, 흑천련뿐만 아니라 서호 주변으로 소문이 자자하게 났다.

무인들은 저마다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가 기지개를 켠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후계자 구도에서 가장 말미에 있었던 투혈권왕이 이제는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장로회의 지지를 얻었으니 더 이상의 기 싸움은 무모한 것이라는 말까지 떠돈다.

-확실히 이번 사건으로 얻은 게 많군.

적비연 옆에 부유하고 있던 극마는 언덕 아래의 서호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적비연은 반철룡이 살아생전에 자주 찾아왔던 보석산 바위 절벽에 걸터앉아서 동파육을 먹고 있었다.

반철룡이 즐기던 것이지만 기억을 모두 가진 적비연은 자신이 즐겼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적비연이 동파육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운이 좋았지. 마침 혈조야귀가 흑뇌고에 당한 상태였으니까.’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녹림채를 찾아가봐야지. 거기서 만통지를 만나볼 생각이야. 그라면 알지도 모르니까. 지금 이 무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만약 그놈이 백발광인들을 만든 거라면?

‘그럼 오히려 잘된 건지도. 그 자리에서 모든 내막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제 막 후계자로 인정받는 상황에서 갑자기 천목산으로 가겠다고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겠냐?

‘그래서 적당한 핑계를 댈 생각이야.’

-어떤?

‘녹림채를 흑천련의 우군으로 만들기 위해 다녀오겠다고 할 거야.’

-흐음.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제대로 된 후계자의 행보로 보이겠군.

‘실제로도 그렇게 만들 생각으로 찾아갈 거니까. 흑천련을 먹고 강호의 정점에 올라서려면 우군이 필요하다.’

지금껏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거듭 성장하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조력자를 찾아야 한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이 자리에 올라온 것도 조력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당장 적비연이 가진 능력만 해도 많은 이들의 기억과 힘을 합한 것이지 않은가?

직접 이렇게 기억을 삼켜 보니 집단지성의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이제 곧 바위 절벽에 앉아서 동파육을 먹는 낭만은 누리지 못하게 되리라.

강호에서 부는 찬바람에는 피비린내가 묻어나게 마련이다.

적비연이 마지막 남은 동파육 한 점을 입에 털어 넣었을 때였다.

그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적비연의 반응을 눈치챈 극마가 눈살을 구겼다.

-왜 그러냐?

‘쉿. 누군가 오고 있어.’

적비연의 대꾸에 극마도 입을 다물었다.

육신이 없는 극마로서는 적비연보다 기척을 감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적비연이 이토록 긴장을 하는 상대라면 만만찮은 고수라는 뜻.

실제로 적비연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했다.

문득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이 자리에서 백발광인과 대면했던 일.

물론 그건 적비연이 겪은 기억이 아니라 반철룡의 기억이었다.

하나 워낙 강렬한 기억이었기에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다.

지금 딱 그런 기분이다.

상대가 쏘아낸 살기가 등을 뚫고 가슴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하면 상대는 어디에 있는가?

숲에 가려져 있다.

마치 맹수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먹이를 노려보는 것만 같다.

섣부른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날아드는 것은 살기가 아니라 목숨을 앗는 칼날이 되리라.

어쩐다?

선공을 해야 하나?

고수를 등 뒤에 두고 선공을 양보한다는 건 죽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야만 한다.

그런데 몸이 꼼짝을 하지 않는다.

마치 맹수를 앞에 두고 그대로 얼어붙어서 경련을 일으키는 초식동물이 된 기분.

도대체 누구기에 이렇게까지?

이 정도면 상대 역시 자신이 눈치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

원하는 게 뭔가?

이대로는 안 된다.

생각이 많아지니 움직이기도 전에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거다.

침착하자.

당장 상황 분석부터 다시 한다.

강한 상대가 등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공격을 해오지는 않는다.

만약 공격을 한다면 언제든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음에도.

그렇다면 무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뭔가 행동하는 것을 기다린다?

하지만 이렇게 강렬한 살기를 쏘아 보내면서?

심호흡을 한차례 하고 나자 머리가 조금은 맑아졌다.

상황 파악도 된다.

살기가 숨통을 찢어버릴 듯 날아드는데도 심중만은 물속에 가라앉은 바위가 되었다.

역시 선공하기를 기다린 거다.

하지만 선공하면 십중팔구 죽는다.

일, 이 할에 목숨을 걸 수는 없다.

그건 하늘이 무너졌을 때나 할 일.

지금은 하늘이 무너지지도, 땅이 꺼지지도 않았다.

마음을 정리한 적비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상대의 의중이 파악되자 격랑이 일던 마음이 진정되면서 손발도 차분해졌다.

적비연이 돌아서서 포권을 취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지요? 후배에게 볼일이 있으시다면 편히 말씀을 내리시지요.”

예를 다했다.

전신의 긴장을 풀고 무방비 상태로 말을 건넸다.

저벅저벅…….

풀숲 사이에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사내.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감이 머리부터 찍어 누르는 듯하다.

기이한 일이다.

아까처럼 살기를 발출하지도, 기도를 열지도 않았는데 이토록 강렬한 위압감이라니.

스르릉.

다음 순간 죽립 사내가 허리춤에 패용하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여기서 손을 섞자는 것일까?

물어보지 않아도 답은 나왔다.

죽립 사내가 천천히 기수식을 취한 것.

애초에 죽립 사내는 자신이 싸움에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준 것이다.

여기서 마다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적비연은 천천히 흑천투권공을 일으켰다.

푸쉬이이.

두 주먹이 시커멓게 물들더니 연기를 피워 올렸다.

“비무를 원하신다면……!”

말을 뱉던 적비연이 순간적으로 바닥을 차며 튀어나갔다.

일부러 말을 중간에서 끊고 나갔다.

상대를 교란시키려는 술책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무공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나다.

공기마저 산산이 부숴 버릴 듯 날아간 주먹이 상대의 옷깃에도 닿지 않는다.

파아앙!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전신의 기혈이 뒤틀리는 듯하다.

‘호신강기!’

이 정도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늘 그렇듯 직접 겪어서 느끼는 충격은 배 이상이다.

보통이라면 여기에서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우왕좌왕하리라.

하지만 적비연은 수백 년의 인생을 경험한 노회함이 있다.

그는 당황하는 대신 재빨리 상대의 옆구리 쪽으로 돌아가면서 오른발을 올려 찼다.

쉬이이잇, 파앙!

다시 한번 호신강기에 막힌 발길질이 허공만 때린다.

‘이래서야……!’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상대는 아직도 칼질 한 번 하지 않았다.

혼자서 부서지지 않는 바위를 두고 용을 쓰는 것만 같다.

초절정 팔 단? 아니면 구 단?

모르겠다.

어쩌면 천해경에 이른 건지도.

천외천이 있다더니.

이 정도의 고수가 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다음 순간,

쩌억!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갈라지고 세상이 갈라졌다.

죽립 사내가 검을 뽑아 들자 모든 것이 뚝뚝 갈라진다.

쉭! 쉭!

단 두 번의 검로가 앞을 스쳐갔을 뿐인데 세상이 조각조각 갈라져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차라리 잘된 거다.

상대가 움직이면 그만큼 빈틈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공격 순간은 상대의 공격이 끝나는 시점이다.

쉬팟!

적비연은 바닥을 차며 그대로 주먹을 뻗어냈다.

흑천투권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자 주먹이 혜성처럼 허공을 가른다.

쉬이이이잇! 꽈앙!

적비연의 주먹과 죽립인의 주먹이 서로 맞부딪쳤다.

“크읍!”

신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기습을 하지 않고 비무 신청을 하기에 마음을 조금은 내려두었는데, 이래서야 자칫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다.

적비연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는 그대로 횡으로 그었다.

쒸이이잉!

평호추월 초식이 펼쳐진다.

잔잔한 수면 너머로 기의 파랑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뿐이다.

피에 젖은 달이 떠올라야 하건만 붉은 노을조차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허공을 벴기 때문이다.

대신 상대의 주먹이 수평선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콰차앙!

놀랍게도 수면이 무너져 내리면서 세상의 끝이 드러났다.

허공에 가상의 수면을 만든 건 검신이다.

한데 그 검신이 산산 조각 나니 초식이 완전히 망가지고 수면은 오히려 파도가 되어 적비연을 덮친다.

파파팡!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 올리며 두 주먹을 교차해서 겨우 막아냈다.

한데 상대의 공격은 그걸로 끝이 아니다.

쉬이이잇!

교차한 주먹 사이로 날아드는 검은빛의 주먹이 보인다.

적비연은 놀랐다.

‘흑천투권공!’

-뭐? 그건 네놈이 사용하는 권공이 아니더냐?

극마가 눈살을 구기고는 물었다.

맞다.

흑천투권공은 적비연이 사용하는 권공이다.

흑천련주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신만이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마 이자는……?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상대의 흑빛 주먹이 그대로 적비연의 양팔을 때렸기 때문이다.

꽈앙! 촤아아아악!

묵직한 충격에 몸이 떠밀리면서 두어 장이나 미끄러졌다.

팔이 저릿저릿하다. 아니, 팔뿐만이 아니다.

온몸이 저릿하게 울리면서 사지가 마비될 것만 같다.

아주 잠깐 기혈의 흐름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흑천투권공의 위력이다.

타격을 받은 상대가 내상을 입지 않더라도 일정 시간 내공을 운기할 수 없다는 것.

다음 순간 적비연은 자신이 짐작한 상대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차차차착!

죽립인이 그 자리에서 흩어져 날아오른 파편 다섯 개를 낚아채더니 허공에 휙 뿌리는 것이 아닌가?

쉬쉬쉬쉬쉭!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부서진 검의 파편들이 허공에 부유했다.

창세비월도!

검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유유히 떠 있다.

언제든 적비연을 향해 날아들 것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내면서.

-저건 네 사저가 사용한 무공이 아니더냐?

이번엔 극마도 대번 알아보았다.

맞다.

창세비월도는 사예린이 사사한 무공이다.

그렇다면 역시 죽립인은 바로…….

‘흑천련주 태청강이었어.’

아마 처음 사용한 검공은 파천신군에게 가르친 파천기검(破天氣劍)이었으리라.

찰나,

타타타타탕!

다섯 자루의 파편이 서로 마구 부딪치면서 어지럽게 날아든다.

따다다다다앙!

흑천투권공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면서 연신 주먹을 내질렀다.

콰콰콰콰콰앙!

푸스스스스!

주먹 끝에서 부서져 나간 파편들이 가루가 되어 연기처럼 흩어졌다.

“훅, 훅, 훅……!”

상대가 사부라고 하더라도 방심하면 죽는다.

흑천련주 태청강은 그런 인물이다.

파편가루가 뿌옇게 흩어지고 나자 태청강이 죽립을 들어 올리고 얼굴을 드러냈다.

굵은 눈썹에 오뚝한 코와 얇은 입술.

강직한 인상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만 같은 무정한 얼굴.

중년의 나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흔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태청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눈치가 늦구나.”

적비연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제자, 사부님을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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