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후계자
“흑천투권공으로는 부족하더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
다른 사람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태청강이다.
투혈권왕의 사부이자, 흑천투권공을 창안하고 전수해 준 사람.
그는 단번에 알아본 거다.
적비연이 흑천투권공이 아닌 검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하다는 거지?”
“사부님께 사사한 무공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무공을 익힌…….”
“무인으로서 강한 무공을 탐하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 죄송할 일이 아니지.”
“…….”
“감히 내 숨은 뜻을 파악하려 들지 말거라.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부터 해야겠구나.”
“죄송합니다! 불초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 묻겠다. 흑천투권공으로 부족하더냐?”
“예, 조금 더 강한 무공을 익히고 싶었습니다.”
적비연은 솔직하게 말했다.
흑천투권공은 확실히 상승무공인 데다 천하제일의 권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흑천투권공만으로 천하를 장악하는 건 어렵다.
당장 태청강만 해도 흑천투권공 이외에도 많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가?
어째서 그는 다섯 제자에게 각각의 특기를 나눠서 가르친 것일까?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려는 안배였을까?
아니면 이 또한 자질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태청강이 뒷짐을 지더니 바위 절벽 끝으로 걸어가서 섰다.
찬바람이 그의 얼굴에 마주 부딪쳐왔다.
겨울이다.
머지않아 눈발이 날릴지도 모르겠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태청강의 입이 열렸다.
“강해졌구나.”
“사부님 덕분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
태청강도 흘려듣는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게 느껴진다.
문득 태청강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 정도의 고수가 되면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극마가 코웃음을 쳤다.
-절대강자가 된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다. 그저 세상이 무료할 뿐이지.
‘그 무료함을 누려보고 싶군.’
-뭐, 나쁘진 않지만 특별히 대단할 것도 없지.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극마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태청강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불쑥 튀어나온 질문.
왠지 다른 말을 하려다가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적비연은 굳이 심중을 캐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조금 전에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를 받지 않았던가?
분명 살아온 경험으로만 따지면 적비연이 훨씬 많다.
하지만 흘려보낸 세월의 기간이 노회함을 모두 대변해 주진 않는 모양이다.
‘하긴 얼마나 살았느냐보다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
수십 년을 살아도 아이보다 더 참을성이 없고 생각이 얕은 어른도 많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태청강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했으리라.
그러니 저 위치까지 올라갔을 테고.
그가 사파의 우두머리든, 정파의 수장이든 상관없이 경외심이 든다.
적비연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녹림채를 찾아갈 생각입니다.”
“녹림채라.”
적비연이 미리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
“무림맹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녹림채를 확실히 끌어들여…….”
“믿느냐?”
“……예?”
적비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태청강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네 선택을 믿느냐?”
“그렇…… 습니다.”
태청강이 적비연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지 않기 때문이다. 너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해라.”
“새겨듣겠습니다.”
“녹림채에 다녀오겠다는 건 그 이유뿐이더냐?”
태청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치 심중을 꿰뚫는 것만 같다.
적비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왠지 이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면 들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잠깐 갈등을 하던 끝에 일부 진실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실은 정보 하나를 입수했습니다.”
“무엇이냐?”
“만통지가 녹림채에서 지내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그를 우군으로 삼을 수 있다면 본 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만통지. 그를 데려올 수 있겠느냐?”
“데려오겠습니다.”
태청강이 적비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적비연도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할 수 있다면 만통지의 지력을 계속해서 빌리고 싶었으니까.
물론 흑천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지만.
태청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녀오너라. 네가 그를 데려온다면…….”
“…….”
“련주의 지위를 넘겨주도록 하마.”
“……!”
적비연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옆에서 부유하던 극마 역시 입을 딱 벌렸다.
-주인, 원래 련주라는 자리가 먹던 곶감처럼 이렇게 날름 던져주는 거냐?
‘그럴 리가.’
-굉장히 파격적인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통지를 데려와야겠군.’
적비연이 포권하며 소리쳤다.
“반드시 그를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 * *
꽈드득……!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끊어질 것만 같다.
대궁에 걸린 철시는 정확히 과녁을 노리고 있었다.
활을 좀 쏘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거리가 가깝더라도 활을 쏠 때는 과녁보다 조금 더 위쪽을 노려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파천신군 이자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쏜 화살은 언제나 직선으로 달린다.
무지막지한 강기가 실리기 때문이다.
화살 한 대로 다섯 명까지 꿰어 죽인 적도 있었다.
오죽하면 파천신궁이라 불렸겠나?
무림맹에 신궁 축일공이 있다면, 흑천련에는 이자권이 있었다.
호흡이 착 가라앉았을 때,
패애앵!
손에서 시위가 떠났다.
동시에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쒸에에에엑!
철시가 세상을 갈라 버릴 것처럼 날아간다.
과녁에 명중하기 직전,
따앙!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철시가 튕겨 나갔다.
이자권의 눈동자가 커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후원 한쪽에서 자갈돌을 던졌다가 받으며 걸어오는 남자가 보인다.
오 공자 연리하다.
천진난만하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지만 이자권은 그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잘 알고 있다.
저 얼굴만큼이나 천진하다면 만리혈사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도 붙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대사형.”
“왔, 왔느냐?”
이자권이 그늘진 얼굴로 대꾸했다.
이자권은 연리하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연리하가 이자권 곁에 나란히 서서는 과녁을 보았다.
“한바탕 난리가 났던데…… 이런 곳에서 유흥을 즐기고 계셨군요.”
“심신수양의 일환으로…….”
“에이, 굳이 변명하실 필요 없습니다.”
“…….”
누군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마치 막내 공자가 대사형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이자권이 막내의 눈치를 살피다니.
연리하가 생글생글 웃으며 이자권을 돌아보았다.
“저도 활 좀 잘 쏘고 싶은데 가르쳐 주시겠어요?”
“활을……?”
이자권이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갑자기 무슨 속셈인가?
하지만 생각을 깊이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벌써 연리하가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연리하가 옆을 힐끔 보고는 묻는다.
“안 가르쳐 주세요?”
“음…… 오른발을 반 보 더 뒤로 빼고, 턱을 좀 더 당기는 게 좋겠다. 기의 운용은 심포락경(心包絡經)을 따라 운기하되 왼손은 대장수양명지맥(大腸手陽明之脈)을 따라 순행해야 한다.”
“오, 바로 효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호흡도 안정되고 무엇보다 화살촉이 단단해지는 느낌이 드네요.”
“바로 그거다. 지금 그 느낌을 잘 기억하는 게 좋다. 그 상태에서 서서히 강기를 실으면 백발백중이 되지.”
연리하가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긴 상태에서 씨익 웃었다.
“이래서야 대사형이 다 떠먹여 준 꼴이군요.”
“그렇지도 않다. 결국 쏘는 건 자신이니까 마지막까지 집중하지 않으면 화살이 크게 빗나가고 만다.”
“하긴 밥상을 차려주고 입안에 떠먹여 줘도, 밥상을 걷어차고 입안에 든 걸 뱉어버리는 인간도 있으니까요.”
말을 씹어뱉는 연리하의 전신에서 살기에 가까운 살벌한 기도가 팽팽하게 올라왔다.
이자권이 흠칫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활을 쏠 때는 기운을 발출하기보다는 마지막까지 갈무리하는 느낌으로…….”
하지만 연리하의 기도는 오히려 더 용솟음치며 올라오더니 이내 대궁이 따악!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강기까지 입혔던 터라 부러진 대궁 파편이 무기처럼 변해 옆에 있던 이자권에게 날아들었다.
“헛!”
파파아앙!
순식간에 호신강기를 일으켜 부러진 대궁 파편을 막아냈지만, 실처럼 가느다란 시위가 그의 뺨을 스치면서 선혈을 남겼다.
피츗!
“큿!”
이자권이 주춤주춤 물러나는 사이 연리하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어쩌죠? 대사형의 대궁을 제가 부러뜨렸어요.”
“괜, 괜찮다. 연습용이니…….”
“죄송합니다. 다 차려준 밥상을 제가 발로 엎어버리고 말았네요. 누구처럼.”
마지막 말을 내뱉는 연리하의 표정은 지금까지 천진한 얼굴과 확연히 달랐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냉담하기 짝이 없다.
연리하가 부러진 대궁을 한쪽으로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는 이자권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차려준 밥상을 엎다 보면 꼭 다치게 되죠.”
“…….”
이자권은 꾸중 듣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들으셨습니까?”
“무얼…… 말이냐?”
“사부님이 넷째 사형을 만나셨다더군요.”
“들었다.”
“그럼 넷째 사형에게 내려진 임무도 잘 아시겠군요?”
이자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통지 소환.
만약 투혈권왕이 녹림채에서 만통지를 데려오게 되면 차기 련주 자리는 공식적으로 그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 소식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투혈권왕이 차기 련주 자리에 가까워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련주가 직접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심신을 다스리고자 후원으로 나와 활을 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연리하가 활짝 웃으며 이자권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럼 우리 똑똑하신 대사형은 뭘 해야 하는지도 아시겠군요?”
“내가 직접 막으마.”
“마지막 기회입니다.”
“명심하지.”
“아시겠지만 마지막이라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어차피 여기가 끝이니까요. 복잡한 건 그 후에 생각하자고요.”
“알겠다.”
연리하가 활짝 웃으며 걸음을 돌렸다.
“역시 대사형은 다 생각이 있으시다니까. 그럼 전 대사형만 믿고 따릅니다. 얼굴 상처는 약이라도 바르셔야겠어요.”
이자권은 대답 대신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그는 연리하가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 * *
흑천궁 지붕에 꼿꼿하게 선 태청강.
그의 곁에서 철접선을 든 요당이 먼발치에서 길을 나서는 적비연을 보며 말했다.
“그가 정말 성공할까요?”
“모를 일이지.”
“방해가 많을 겁니다.”
“감당해야 할 일.”
어차피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하면 련주의 자리가 무색하리라.
요당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합니다.”
“뭔가 꾸미고 있겠군.”
“그들이야 매번 해오던 짓이니까요.”
“자세한 정보는 아직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태청강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천만에. 요당이 부족하다니.
그의 지략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 뛰어난 게 문제다.
차고 넘치는 지략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자.
가후.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알 수가 없다.
수로채에 대패를 당하고도 이렇게 잠잠할 리가 없을 텐데.
분명 뭔가 있을 텐데 아직까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하나 투혈권왕이 만통지를 데려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후우웅.
찬바람이 분다.
태청강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중얼거렸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