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01화 (202/301)

201. 악산만살대진(惡山萬殺大陣)

적비연은 천목산 기슭에 위치한 객점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가 데려온 호신위는 다섯 사람.

좌우호법인 엽강호와 한사, 그리고 여추백과 임송화, 현청이었다.

나머지 인원은 련 내에 남아서 사예린과 함께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토록 했다.

별일이야 없겠지만, 갑자기 후계자로 주목받게 된 만큼 파천계에서 무슨 암계를 꾸밀지 알 수 없었기에.

천목산 아랫마을은 도검을 허리에 찬 무인들로 북적였다.

덕분에 천목산 아래 위치한 주루나 객점들이 때아닌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임송화는 객잔 이 층 창가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그녀의 시선이 저만치 창가에 앉은 투혈권왕에게 머물렀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벌써 천목산 기슭에 도착한 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투혈권왕이 천목산에 찾아간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련주가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파천계도 그 소식을 접했다.

그 바람에 지금 천목산 기슭에는 무인들이 넘쳐나고 있다.

태반이 파천신군이 보낸 무인이다.

실제로 파천계에서 얼마 전에 새로 임명된 흑철단주 설강(薛姜)은 삼백에 달하는 단원들을 이끌고 천목산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그들의 목적은 자명했다.

투혈권왕보다 더 빨리 녹림채로 들어가서 만통지를 데리고 나오는 것.

그렇게 되면 모든 공은 파천신군에게로 돌아가고 만다.

그런데도 투혈권왕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흑철단이 주 인력이고 투혈권왕과 자신들은 부가 된 것 같다.

‘나도 참 이젠 정말로 식구가 된 기분이네.’

솔직히 투혈권왕이 후계를 잇든 말든, 만통지를 데려오든 말든 알 게 뭔가?

간자로서 제 한 몸 건사하면 그만인 것을.

그런데 간자 생활도 오래하다 보니 이젠 정말 헷갈린다.

누굴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특히 지난번 무림맹의 무책임한 대응을 겪고 나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음 가는 대로!’

결국 참다못한 임송화가 벌떡 일어나서 투혈권왕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현청과 여추백, 엽강호와 한사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들도 궁금하긴 마찬가지.

다만 지금껏 그래왔듯이 무슨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기다렸을 뿐이다.

마침 임송화가 적비연 앞에 멈춰 섰다.

“주군, 한 가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적비연이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부드럽게 대꾸했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있지.”

“뭔지 여쭤도 될까요?”

“이틀 후에 녹림채를 찾아갈 생각이야.”

“이틀 후라고요?”

임송화가 목청을 높였다.

뿐만 아니라 지켜만 보던 네 명의 호신위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올라가도 모자랄 판에 이틀씩이나 여기서 보낸다고?

그러다가 흑철단이 먼저 만통지를 데려가기라도 하면?

흑철단을 쳐서 만통지를 가로챌 생각인가?

하긴 지키는 쪽보다는 뺏는 쪽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이대로 자신들이 만통지를 먼저 데려오게 되면 흑철단은 자신들을 칠 수도 있다.

아군끼리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련주는 그걸 허용했다.

련주는 일부러 투혈권왕의 행로를 모두 공개했다.

누구라도 만통지를 데려올 수 있으면 하라는 뜻이다.

아직까지 후계를 확실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밝힌 것이다.

누구든 만통지를 데려오면 차기 련주가 될 수 있다는 신호.

그러니 파천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건 마지막 기회다.

임송화가 마음에 품은 질문을 던졌다.

“흑철단을 칠 생각이시군요?”

“아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럼 대체 어떻게 만통지를…….”

“흑철단이 만통지를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적비연이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임송화가 눈살을 슬쩍 구겼다.

“글쎄요.”

“걱정 마. 흑철단은 만통지를 데려올 수 없어.”

“녹림채가 넘기지 않을 거란 말씀인 가요?”

“당연히.”

“하지만 상대는 흑철단이에요. 그들이 작정하고 녹림채를 찾아간다면…….”

“걱정 붙들어 매. 찾아가지도 못할 테니까.”

적비연은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임송화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자신감인가?

지금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무인들을 보고도 저런 소리가 나온다는 건가?

그런데 투혈권왕이 그렇다고 하니까 왠지 그럴 것 같다.

지금껏 그가 말한 대로 이루어져 왔으니까.

그래도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인지.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적비연이 호신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궁금하면 오늘 밤에 구경이나 가볼까?”

* * *

“이, 이건 도대체……!”

나뭇가지에 올라선 흑철단주 설강은 이가 부서져라 악다물었다.

꽉 말아 쥔 두 주먹은 연신 부들부들 떨렸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카로운 기도를 뽐내던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어 비탈진 언덕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총 삼백 명 중에서 살아남은 자는 고작 백여 명.

모두 나무에 매달리거나 목석처럼 제자리에 서서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다.

절반 이상은 사망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전쟁이 난 것도 아니다.

무림맹 복판에서 싸움을 치른 것도 아니다.

항주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도 않은 천목산이다.

한데 절반 이상의 흑철단이 죽었다.

‘제길!’

최근 흑철단주로 특진한 설강은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의식했다.

수뇌부에 뇌물을 먹여서 흑철단주로 특진된 자.

그렇게 소문이 나 있었다.

정식 진급 심사를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식 진급 심사에서는 반철룡을 비롯한 통과자들이 모두 권왕계로 들어가는 바람에 파천계의 흑철단주 자리는 공석이 되고 말았다.

추후 그 자리를 설강이 차지하게 됐으니 그런 소문이 돌 법도 하다.

그래서 설강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공을 세워서 능력을 입증하고자 했다.

어찌 된 일인지 투혈권왕은 천목산에 도착하고 나서도 녹림채를 곧장 찾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투혈권왕이 뭉그적거리는 동안 그는 흑철단을 이끌고 재빨리 천목산을 올랐다.

그런데 천목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앞선 무인들 사이에서 느닷없는 폭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매복인 줄 알고 주변을 경계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사방팔방에서 화살이 난무했다.

굵은 나무기둥도 단숨에 꿰뚫어 버릴 만큼 강력한 철시였다.

철시 한 대에 무인 서너 명이 꿰뚫려 즉사를 면치 못했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수풀에 가려진 것인지, 나무에 가려진 것인지 인기척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혈권왕이 왜 그렇게 굼뜨게 행동했는지도 이해됐다.

투혈권왕은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직후 후퇴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돌아서서 발을 내딛는 곳마다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땅인 줄 알고 밟은 곳이 푹 꺼지는가 하면, 낙엽인 줄 알고 밟은 것이 폭약으로 변하기도 했다.

산을 오를 때만 해도 멀쩡했던 숲이 갑자기 살아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어떤 기관장치인지, 어떤 진법을 사용한 건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천목산 전체가 무인을 삼켜 버리는 괴물로 변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폭약이 꽝꽝 터졌고, 그때마다 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 철시가 날아들었다.

도저히 디딜 곳을 찾지 못해 바위 위에 올라서면 어김없이 바위가 터져 나가고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이차 피해를 남겼다.

산 전체가 괴물로 변했다.

결국 진퇴양난에 빠진 흑철단은 제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설강이 이를 빠득 갈았다.

‘별 볼 일 없는 산적 주제에……!’

아니다.

생각을 달리 해야 한다.

별 볼 일 없는 산적이 아니다.

이곳은 천목산.

녹림채의 총채가 있는 곳이다.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

천목산도 결국 흑천련 권역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천목산은 녹림채 권역이다.

장강의 주인이 수로채인 것처럼 천목산의 주인은 녹림채다.

하지만 인정하는 게 늦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먼저 전진이냐, 후퇴냐.

오를 길보다는 돌아갈 길이 가깝다.

어디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마음을 굳힌 설강이 지시를 내렸다.

제일대가 먼저 몸을 날려 돌아가는 길로 내려섰다.

다행히 기관 같은 것이 작동하진 않았다.

제일대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살금살금 이동했다.

그들이 안전하게 하산하면 그 길만 따라서 이동해도 된다.

하지만 운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제일대주가 바닥을 분명하게 판별하기 위해 기풍을 날린 순간,

꽈아아앙!

폭약이 터지면서 제일대를 집어삼켰다.

땅이 뒤집히면서 열댓 명의 무인들이 비명과 함께 사방으로 튀었다.

“크아악!”

“으아악!”

비명을 끝으로 그들은 인육파편이 되어 탄내만 풍겼다.

꿀꺽.

지켜보던 자들이 저마다 긴장을 다졌다.

설강이 입술을 꾹 깨물고는 다시 수신호를 내렸다.

이번에는 다섯 명씩 내려 보내기로 했다.

폭약이 터지면 한 번에 너무 많은 인원을 잃게 된다.

다섯 무인이 앞서 제일대가 걸었던 길만 되짚어가며 걸어갔다.

제일대의 죽음으로 작은 기운도 함부로 운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은 철저하게 눈과 귀 오감만으로 사물을 판별하고 발 디딜 곳을 찾아갔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한 걸음씩 내딛는 기분.

한순간 방심하면 발밑에서 뭐가 터질지, 머리 위에서 뭐가 날아들지 알 수가 없다.

앞장선 무인이 시체를 밟고 올라섰다.

조금 전까지 동료였지만 이제는 살기 위해 디뎌야 할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이다음이 문제다.

파밧!

몸을 날린 무인이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땅으로 착지했다.

함정은 없나?

없다.

안도의 숨을 채 내쉬기도 전에,

쉭쉭쉭!

어둠을 가르는 소리!

뒤이어 무인의 목과 가슴 복부, 허벅지에 이어 뒤꿈치까지 단숨에 잘려 나간다.

촤촤촤촤촤악!

“끄억!”

목이 갈라진 무인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넘어간다.

콰당!

다음 순간 무인이 쓰러진 자리 아래에서 눈부시도록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온다.

꽈아아앙!

“크아아악!”

또다시 비명이 터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다섯을 잃었다.

살아남은 무인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설강은 최대한 침착하게 다음 지시를 내렸다.

이번에는 세 명씩.

이래서야 사지로 수하들을 내보내는 격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또 폭약이 터지면 한꺼번에 즉사하지 않도록 거리를 조금 두라는 게 조치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런데 그마저도 욕심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단, 단주님! 저, 저, 저기에……!”

다급한 목소리에 설강이 고개를 휙 돌렸다.

다음 순간 그의 두 눈이 잔뜩 커졌다.

“이런…… 미친!”

두두두두두……!

나무가 흔들리고 바닥이 흔들린다.

미세한 바람조차 조심해야 할 산 중턱에 지진이라도 난 것만 같다.

산 위에서 멧돼지 떼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가장 앞서 달리던 멧돼지가 뭔가를 밟았는지 폭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꽈아아앙!

* * *

산 중턱에서 그림자들이 마구 튀어 오르는 모습이 꼭 메뚜기 떼처럼 보인다.

적비연을 비롯한 호신위들은 천목산에서 일어나는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만통지를 찾겠다며 먼저 나선 흑철단은 천목산의 귀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임송화가 입을 딱 벌리고는 중얼거렸다.

“저, 저, 저건 도대체……?”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악산만살대진(惡山萬殺大陣)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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