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악산만살대진(惡山萬殺大陣)
“지, 지, 지금 뭐라고……?”
임송화가 봉목을 부릅뜨고는 돌아보았다.
악산만살대진이라니?
악산만살대진!
오래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아니, 강호에 몸을 담은 자라면 무조건 한 번은 들어봤을 거다.
녹림채가 이백여 년 전에 개발했다는 진법이다.
무시무시한 그 이름만큼이나 산 전체에 진법을 두어 침입자들을 모조리 전멸시켜 버리는 대진.
오래전 황궁에서 녹림을 토벌하고자 시도했을 때, 이에 대항하여 만든 진법이라고 한다.
녹림채가 아직도 건재한 것은 바로 이 악산만살대진 때문이라고.
결국 황궁은 토벌을 포기했고, 이후에는 무림과 불가침 조약을 다시 맺으면서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아니다.
필요했다.
정사대전이 일어났던 그 시기에 녹림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악산만살대진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상당 부분 실전된 상태.
그 이후 터를 잃고 쫓겨난 녹림채는 악산만살대진에서 실전된 부분을 보완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사실을 적비연이 알고 있는 이유는 강동칠괴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강동칠괴는 녹림채를 자주 들락거렸고, 그 당시 악산만살대진을 보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기에.
하지만 강동칠괴 역시 실전된 악산만살대진을 복구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임송화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악산만살대진이라니…… 그게 아직도 전해져 오는 건가요?”
놀랄 수밖에 없다.
산에서 펼치는 진법 중에서는 악산만살대진을 넘어설 게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적비연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답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실전됐지.”
“그런데 어떻게……?”
“그새 잊었나 보군. 우리가 누굴 찾으러 저 산에 오르려는 건지.”
“아……!”
임송화가 그제야 탄성을 터뜨렸다.
쿠쿠우웅!
그러는 사이에도 산은 연신 포효를 내지른다.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비명을 단숨에 집어 삼킨다.
만통지.
그래, 그가 녹림채에 있다는 걸 깜빡했다.
하늘의 이치를 꿰뚫은 자.
그런 자가 녹림채에 있으니 악산만살대진을 복구하는 건 시간문제였으리라.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시간을 끌어서……!’
임송화는 새삼 놀란 표정으로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투혈권왕이 거기까지 생각했다는 건 놀랍다.
정보를 얻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것은 그 정보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각 정보조직마다 천하의 지자들이 모여서 그 정보를 분석하는 거다.
뚝뚝 떨어져서 따로 노는 정보를 정확하게 활용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걸 투혈권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도대체 저 남자, 얼마나 똑똑한 거야?’
만검세가주를 보고 미쳤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이를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침착한 성격과 언뜻언뜻 드러나는 혜지는 감복할 만했다.
심지어 그를 보면서 연정까지 품지 않았던가?
반철룡을 보았을 때는 괴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만검세가주보다 못할 줄 알았는데 그의 매력은 만검세가주를 꼭 닮아 있었다.
게다가 무공이 발전하는 게 눈으로 보이고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 사람.
투혈권왕은 만검세가주와 반철룡을 합쳐놓은 것 같다.
물론 투혈권왕이 적비연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겠지만, 그 내막을 모르는 임송화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하아, 내가 이렇게 금방 사랑에 빠지는 성격이었나?’
가슴이 심상치 않다.
투혈권왕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가슴이 뛴다.
안 돼.
정신 차려.
저자는 사파의 수장이 될지도 모를 사람.
연정을 품을 상대가 따로 있지.
하지만 무림맹이 자신들에게 한 짓을 떠올리면 사파의 수장이라도 그 뜻이 옳을 땐 따르고 싶다.
그러다가 사문을 등지게 된다면…….
‘나참,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어디까지 하는 거야?’
임송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거나 임송화는 투혈권왕을 다시 봤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사람.’
그런 그녀의 시선을 받는 적비연 곁에는 극마가 팔짱을 낀 채 부유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은 적비연에게만 보였다.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거냐?
‘알았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도 없는 예측이다.
녹림채는 자신에게 빚이 있다.
‘흑룡의 은덕.’
이걸 사용하면 그 어떤 부탁이든 녹림채가 들어줘야 한다.
만약 처음부터 녹림채에 찾아가서 다짜고짜 흑룡의 은덕을 들먹인다면?
십중팔구 녹림채는 모르쇠로 일관하리라.
원래 그런 곳이다.
무인끼리 맺은 약속이라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곳이 바로 녹림채니까.
애초에 그들의 근본은 무인이 아닌, 산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수로채는 약속을 지켰다.
이 사실이 투왕에게 가장 걸리는 점이리라.
자존심상 약조를 저버릴 수 없게 된 거다.
투왕이 가장 의식하는 자가 바로 수로채의 수황.
오죽하면 수황의 별호를 수왕으로 깎아내리면서 본인을 투황이라고 지칭할까?
수황이 약조를 지켰는데, 본인이 약조를 저버리면 강호에서 명분이 서지 않는다.
녹림채가 언제 명분을 중시했던가?
하지만 수로채보다 못하다는 말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투혈권왕이 만통지를 찾으러 천목산으로 온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마냥 기다렸다가 만통지를 만나게 해줘야 하는가?
아니다.
애초에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한마디로 ‘흑룡의 은덕’을 사용할 기회조차 안 주면 된다.
그래서 천목산에 악산만살대진을 설치해 두었다.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살겁이 일어난다.
산 전체를 악마로 둔갑시키는 진법.
누구든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천목산에 올라라.
만통지를 철저하게 보호하는 대가로 녹림채는 악산만살대진을 복구했으리라.
그런 와중에 흑철단이 투입됐으니 아수라장이 펼쳐질 수밖에.
-그럼 저 녀석들이 전부 죽으면 이제 신경 쓸 상대는 없어지는 건가?
‘그럴 리가.’
-또 있다고?
당연하다.
파천신군이 고작 흑철단 하나만 보냈을 리가 있겠나?
물론 그렇다면 좋겠지만.
이건 마지막 기회다.
만통지를 먼저 찾는 것에 실패했으니, 그다음 수를 둘 것이다.
-그다음 수라면…… 주인이 만통지를 데려오는 순간 빼앗는 건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하긴. 쉽게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겠지. 그럼 거기에 대한 대비책도 있는 거냐?
‘그땐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겠지. 우선은 만통지를 찾아가야 해.’
-어떻게? 천목산 전체가 흉산으로 변했는데.
맞는 말이다.
흑철단이 전멸한다고 해도 악산만살대진이 효력을 다한 건 아니다.
고작 삼백의 인원을 제거하고 역할이 끝난다면 대진(大陳)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았을 것이다.
무려 황궁의 무력을 방어하기 위해 개발된 진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모든 기관진식에는 반드시 그 파훼법이 있듯, 악산만살대진도 상대할 방법은 있다.
-파훼법을 안다는 거냐?
‘파훼법이라기보단…… 비밀통로를 알고 있는 거지.’
적비연이 싱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 * *
이틀 후.
악산만살대진은 아직도 유효하다.
흑철단은 여전히 천목산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간간히 폭음도 들려온다.
근방으로 소문이 자자하게 나 버렸다.
천목산에서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면 죽는다는.
사람들의 이목은 천목산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됐다.
누군가 악산만살대진이 펼쳐져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제 사람들은 천목산으로 들어선 흑철단 중 과연 몇 명이나 무사하게 돌아올지 내기까지 했다.
대다수가 전멸을 예상했다.
악산만살대진이 펼쳐진 천목산은 바람에 나부끼는 솔잎 하나도 위험하기에.
그럼 녹림채가 밖으로 나올 때는 어떻게 할까?
악산만살대진을 관통하나?
아니다.
그들만 사용하는 비상통로가 있다.
적비연은 호신위들을 이끌고 천목산 기슭으로 이동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
야산은 천목산 중심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전혀 받지 않았다.
양쪽으로 산이 버티고 있어 협곡처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산 능선이 항아리 모양처럼 휘돌아가고 있었기에 이들의 움직임은 먼 곳에서 절대 볼 수 없었다.
천목산 중심에서 꽤나 떨어진 곳이니 진법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산짐승들이 돌아다닌 흔적도 곳곳에 보인다.
경사가 급한 곳 중간쯤에 멈춘 적비연은 주변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그 모습에 임송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녹림채를 찾아갈 거라더니 왜 이런 곳에?’
도대체 뭘 찾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방을 면밀히 살피는 모습이 마치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 이런 곳에 온 적이라도 있던 건가?
주변을 한참이나 더듬던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문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언덕배기.
적비연은 망설임 없이 걸어가더니 가볍게 기풍을 날려 낙엽들을 모조리 치워 버렸다.
그러자 큼직한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강호.”
“예, 주군.”
“이거 치워봐.”
밑도 끝도 없는 명령에도 엽강호는 질문 한마디 없이 행동한다.
적비연이 시키는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기에.
엽강호가 대부를 바위 아래에 끼워 넣고 힘을 주자, 생각보다 쉽게 바위가 들어 올려졌다.
그 아래로 너구리굴 같은 구멍이 드러났다.
‘설마……?’
임송화의 예상은 이번에도 정확했다.
적비연이 턱짓을 했다.
“들어가.”
“저, 저길요?”
임송화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스스로 후회했다.
자신이 아는 투혈권왕은 한 번 내뱉은 명령을 번복하지 않았으니까.
한사가 제일 빠르게 반응했다.
그는 완전히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너구리굴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뒤를 이어 여추백과 현청, 그리고 임송화가 따랐다.
적비연이 들어간 후에는 엽강호가 돌덩이를 가지고 와서 바위 밑에 받치고는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엽강호가 발로 돌덩이를 차 버리자 육중한 바위가 그대로 닫히면서 너구리굴을 완전히 숨겨 버렸다.
‘갑갑해……!’
어둠 속에서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통로를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오래전 추혼단을 피해서 수로에 들어섰을 때처럼 갑갑함이 느껴졌다.
호흡이 차오를 때마다 내공을 운기해서 답답함을 몰아내곤 했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를 포복으로 나아가고 나자 마침내 너른 공간이 나타났다.
빙백독광사를 만났던 그 동혈과는 다른 느낌.
그땐 천연 동굴이었지만 지금 들어선 곳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통로다.
너구리굴에서 몸을 비집고 나온 적비연이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녹림채가 만든 암도(暗道)야. 미로처럼 얽혀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잘 따라와.”
‘도대체 이런 건 또 어떻게……?’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라도 가진 건가?
임송화는 적비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사방이 깜깜한 데다 야명주 같은 것도 없었기에 길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적비연은 이미 와본 적이나 있는 것처럼 거침이 없다.
당연히 와본 적이 있다.
녹림채가 강동칠괴에게 은밀한 의뢰를 맡길 때면, 세간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이 암도를 이용하도록 했으니까.
칠괴의 기억에 의하면 저 너구리굴을 기어가는 걸 몹시 싫어했다.
‘길은 알고 가는 거겠지?’
임송화는 적비연의 등을 보며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실소했다.
아직까지도 이런 의심을 하다니.
지금껏 겪어보지 않았던가?
그가 따라오라면 그냥 따라가면 된다.
의심은 쓸데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길이 복잡한 것만 빼면 인공 통로여서 그런지 비교적 편안한 이동이었다.
별도의 기관장치도 없었다.
이따금씩 악산만살대진 때문인지 아스라이 폭음이 울리고 천장에서 흙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무려 한 식경을 더 이동했을 때 비로소 출구가 나타났다.
들어올 때와 달리 출구는 꽤 크고 넓었다.
동혈을 걸어 나온 임송화는 저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여기가 천목산이라고?’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 같다.
험산이 병풍처럼 둘러진 분지에 화전민이 모여 사는 촌락이 보인다.
일부러 산을 깎아 분지를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심지어 악산만살대진이 일으키는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마을을 감싼 산이 방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낯선 자들이 비탈진 언덕을 따라 내려오자 화전민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는 멀거니 쳐다보았다.
‘이자들…… 평범한 화전민이 아냐!’
임송화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쳐다보는 눈빛에 예기가 서려 있다.
살이 저미도록 날카로운 기도가 사방에서 날아든다.
모습을 드러낸 자들도 있지만 숨어서 노려보는 자들도 있다.
평화로운 삶은 철저한 위장막이다.
‘다들 무인이었어.’
그녀의 추측을 읽은 것처럼 적비연이 말했다.
“이들은 모두 녹림채 무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