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03화 (204/301)

203. 천목산의 주인

뭐랄까?

눈빛이 살아 있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하나같이 부리부리하게 부릅뜬 눈은 거칠고 호전적이다.

낫을 들고 선 사내는 당장에라도 손을 뻗을 것 같고, 밭을 갈던 사내는 한순간에 갈퀴를 내던질 것만 같다.

그들이 쥐고 있는 농기구가 하나같이 살상무기로 보인다.

이들이 녹림채 무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아까보다 더욱 노골적인 투기가 읽힌다.

아니, 그 사실을 몰랐어도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 이들은 지금 우리를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어. 명백해.

임송화는 긴장을 다지면서 여차하면 도를 뽑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현청도 은근슬쩍 검파에 손을 얹었다.

그렇게 대응을 하자니 날아드는 기도는 더욱 예기를 뿜는다.

자박…… 자박…….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송곳 같은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그럴 수밖에.

이들은 불청객이다.

마을 정문을 통해서 들어온 자들이 아니다.

암도 출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암도가 밝혀졌다는 건 아주 큰 문제다.

자박…… 자박…….

’이번에는 적비연 일행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다.

마을에서 일하던 촌부들과 아낙들이 어느새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

적비연이 마을 중심의 우물가에 다다랐을 때는 주변으로 온통 화전민들이 모여서 눈을 부라리며 예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포위된 형국.

적비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우물을 등지고 밖을 바라보며 섰다.

겉보기에는 그저 성난 화전민일 뿐이다.

하나 이들의 겉모습만 보고 방심하면 큰 코 다친다.

산적이라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총채에 거주하는 자들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무공 수위가 어지간한 무인들 뺨칠 정도의 수준은 된다는 말이다.

생존을 위해 모인 자들.

살기 위해서 독해진 자들.

세금으로, 약탈로, 삶의 터전을 잃어서 떠돌다가 악에 받쳐 이곳까지 모여든 자들이다.

그저 강해지고 싶은 욕망으로 무공을 익힌 무인들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

벼랑 끝에 내몰려서 삶의 밑바닥을 맴돌던 자들이 생존의 수단으로 택한 방식.

빼앗기고 짓밟히는 것에 신물이 나서 죽기 살기로 강해진 자들이다.

그 과정이 옳지 못하다고 하여 마냥 깔보기만 하면 그들의 독기에 당하고 만다.

예의도 없고, 존중도 없지만 서로 살기 위해 뭉친 자들이기에 동료의식만큼은 투철하다.

-쳇, 나 때는 말이야. 녹림 같은 건 무인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는데. 강호가 많이 물러졌군.

‘강호가 물러진 게 아니라, 그만큼 녹림이 독해진 거지.’

적비연의 지적에 극마도 더는 부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마을 중심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임송화가 화전민들을 둘러보면서 나직이 물었다.

“어쩌자는 걸까요?”

적비연에게 던진 물음이다.

“글쎄. 일단 지켜보자고.”

적비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화전민을 둘러보았다.

그때 화전민 틈에서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현청이 검파를 잡고 뽑으려고 하자 적비연이 얼른 전음을 날렸다.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주의를 들은 현청이 검파에 손만 얹은 채로 거구의 사내를 지켜보았다.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저벅저벅!

단숨에 현청의 머리통을 쪼갤 기세로 다가오는 거구!

그런데 현청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치더니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벌컥벌컥 마신다.

“크어! 물맛 좋다! 한잔하시겠소?”

거구가 돌연 바가지를 내밀며 묻는다.

현청이 잠시 망설이는데 적비연이 불쑥 나섰다.

“한 잔 주시오.”

적비연이 바가지를 건네받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은 정말로 맛이 좋다.

하지만…….

‘역시 독이 있군.’

적비연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우물물 자체에 독이 들어 있진 않았을 거다.

사내가 바가지에 독을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게 녹림이다.

강호 무인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들은 치졸하고 비열하다.

하지만 그 비열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을 철저하게 믿는 자들이다.

거구는 적비연을 가만히 눈여겨보았다.

지금껏 자신이 건넨 물을 받아 마신 인간들은 대체로 반각도 지나지 않아서 목숨을 잃었다.

빠르면 촌각도 지나기 전에 신호가 온다.

창자가 꼬이는 듯하고 급기야 신물을 토해내면서 각혈한다.

나중에는 목과 얼굴이 퉁퉁 부은 채로 질식사하거나 창자가 끊어지면서 죽는다.

녹림채에서 키우는 독혈대봉(毒血大蜂)의 위력이다.

하나 적비연은 반응이 없다.

그럴 수밖에.

독혈대봉이 아무리 영물에 해당하는 독벌이라지만, 빙백독광사만 하겠나?

만독불침지체인 적비연에게는 살짝 독한 술 한 잔과 진배없다.

“빙백독광사 내단을 흡수했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사실인가 보군.”

목소리는 화전민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희끗한 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왔다.

눈가에 깊이 파인 주름은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이곳 촌장인 듯했다.

“손님이 왔으니 접대는 해야겠지. 따라오시게들.”

노인이 뒷짐을 지더니 몸을 돌렸다.

적비연과 일행은 노인을 따라 민가를 지나쳤다.

언덕을 돌아서 한참을 걸어가니 나무로 지은 커다란 산채가 나타났다.

‘여기가 총채!’

임송화는 본능적으로 이곳이 투왕이 머무는 총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위기가 다르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숨어서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건 느껴진다.

그들은 일부러 기척을 드러내는 것이다.

허튼 수작을 하면 무사히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물론 적비연은 이곳에 와본 적이 있었다.

때문에 특별히 불편할 것도 없다.

산채에서 가장 큰 전각으로 들어가자 전방에 위치한 태사의에 거한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양쪽으로는 녹림채 수뇌부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한쪽에는 미계수도 보였다.

미계수의 표정이 썩 밝지 않은 것을 보니, 벌써 투왕에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다.

“용케도 멀쩡하게 나타나셨군.”

포권지례를 하기도 전에 투왕 추야성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적비연이 입매를 올리고는 답했다.

“환영식을 거하게 치러주신 덕분에 돌아가는 길이 한결 수월할 듯하오.”

“들었다. 파천신군의 수하들이라지?”

“그렇소. 한데 본 련을 상대로 너무 화려한 건 아닌지. 후일을 감당할 수 있겠소?”

“악산만살대진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흑천련이 본 채를 치려면 십중팔구의 전력상실을 각오로 덤벼야 할 터. 어찌 암도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노출된 암도는 곧장 폐쇄된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적비연이 씨익 웃었다.

“뭐, 나는 본 련을 대표해서 오긴 했으나 전쟁을 하자고 온 것은 아니오.”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지. 그래도 형식상 물어는 보겠다. 구태여 이곳에 온 이유가 뭐냐?”

“만통지를 만나고 싶소.”

“거절한다면?”

“흑룡의 은덕을 잊은 것은 아닐 텐데.”

적비연이 미계수를 힐끔 돌아보았다.

미계수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었고, 투왕은 그런 미계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허락하지.”

뜻밖에도 쉽게 나온 대답.

한바탕 난리를 칠 줄 알았던 임송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동행했던 호신위들 모두 의아한 표정이었다.

악산만살대진까지 펼치면서 버티던 녹림채가 아니던가?

이렇게 쉽다고?

투왕 추야성이 얼른 말을 이었다.

“이걸로 흑룡의 은덕에 대한 보답은 끝났다. 그럼 돌아가도록.”

적비연이 슬쩍 이맛살을 구겼다.

“무슨 소리요? 나는 아직 만통지를…….”

말을 꺼내던 적비연이 흠칫거리고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노인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화공천(和供天)일세.”

화공천.

만통지의 본명.

호신위들도 흠칫거리고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선 이 평범해 보이는 노인이 하늘의 이치를 꿰뚫어 본다는 그 지자란 말인가?

적비연이 포권을 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초면에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겠으나 본 련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싶습니다.”

“미천한 재주를 높이 사줘서 감사할 따름일세. 내 기꺼이 자네를 따라가고 싶구먼.”

노인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하게.

만통지를 만나면 무엇보다 그를 설득시키는 게 관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쉬울 줄이야.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곧바로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물론 나도 그러고 싶네만…….”

노인이 수염을 쓸더니 태사의를 슬쩍 본다.

자연히 적비연과 호신위들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태사의에 앉은 투왕이 거친 턱수염을 매만지며 낄낄 거렸다.

“감히 본좌의 허락도 없이 만통지를 데려가겠다고?”

그러자 현청이 발끈해서 나섰다.

“갑자기 무슨 억지요! 조금 전에 흑룡의 은덕에 보답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지. 그래서 보답했잖아.”

“뭐요?”

“만통지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나게 해주었잖아? 만통지를 데려가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군! 만통지께서 직접 동행 의사를 밝혔는데 무슨 명분으로 막는단 말이오?”

콰앙!

순간 추야성이 주먹으로 태사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팔걸이 일부가 부서져 나가면서 큰 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범 같은 기운을 뿜어내며 으르렁거렸다.

“만통지는 이곳에 터를 잡을 때, 본좌와 약조한 바가 있다.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갈 때만큼은 본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그런…….”

현청이 난감한 표정으로 만통지를 돌아보았다.

“사실입니까?”

만통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웃었다.

천하의 이치를 꿰뚫는 자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순박해 보이는 모습.

“허허, 그땐 이렇게 밖으로 나가고 싶어질 줄 몰랐지. 그래서 말인데 자네들이 날 좀 여기서 빼주게나. 나도 죽기 전에 세상 구경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오히려 만통지가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하! 이 사람 정말 만통지 맞나?

현청을 비롯한 호신위들이 입을 척 벌렸다.

지혜가 하늘에 닿으면 뭐 하나?

본인 앞날을 예지하지 못해서 이런 곳에 발이 묶여 있는데.

투왕이 파안대소를 하며 말을 이었다.

“크하하하! 이제 알겠느냐? 본좌의 허락 없이 만통지는 어디에도 갈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흑룡의 은덕을……!”

“그래서 만통지를 만나게 해줬잖은가! 그를 데려가는 건 별개다!”

“그런 억지를……!”

현청이 부글부글 끓는 표정으로 투왕을 노려보았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녹림이다.

비열하고 치졸하다.

하지만 그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니 아무리 말로 설득해 봐야 소용이 없다.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투왕을 보았다.

“원하는 게 뭐요?”

그제야 투왕이 이죽거림을 멈추고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적비연을 응시했다.

“그대가 투혈권왕으로 불린다지?”

“그렇소만.”

“혹자들이 그러더군. 사파 제일의 권사가 바로 자네라고.”

“한데?”

쾅!

투왕이 다시 팔걸이를 부수고는 소리쳤다.

“아니 될 말이지! 본좌가 있는데 어찌 자네가 제일의 권사란 말인가?”

적비연은 그제야 대략의 낌새를 채고는 물었다.

“한 번 붙자는 거요?”

투왕이 소매를 걷더니 씩 웃었다.

“그대가 수왕을 꺾고 또 한 번의 약조를 받아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뭐, 꺾은 건 아니고…….”

“꺾었다. 그 고집불통인 꼴통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면 꺾은 것이다.”

“흐음. 그렇다고 치고.”

“해서 본좌는 그대를 꺾을 것이다. 그럼 서열은 확실해지는 셈이 아니겠느냐?”

도대체 그 서열을 왜 정하는 건데?

하지만 적비연은 떠오른 질문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 답도 알고 있었기에.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다.

오랜 기간 서로 벗처럼 지내면서도 앙숙처럼 다툰 수황과 투왕이다.

‘왕’과 ‘황’ 자를 두고도 불복하며 다툰 사이다.

호전적인 성격인 투왕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않겠나?

‘그렇다면 나는 이 기회를 역으로 잡아야겠지.’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열을 가려봅시다. 단, 내가 이기면 만통지를 데려가겠소. 그리고 수로채처럼 앞으로 내가 필요할 땐 언제든 나의 힘이 되어 주시오.”

“하하하! 약조하지! 하나 본좌가 그대를 찍어 누르면, 만통지는 이곳에 남는다. 그리고 본좌가 필요할 땐 언제든 흑천련이 본좌의 명에 따라야 한다!”

“그럽시다.”

적비연이 흔쾌히 답하자 투왕 추야성이 벌떡 일어났다.

“좋다! 그럼 하늘 아래 누가 최고의 권사인지, 누가 투황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가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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