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녹림삼불가앙(綠林三不可仰)
‘저런 곳에서 비무를……?’
임송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삼나무 숲을 바라보았다.
굵기가 두 아름도 훌쩍 넘는 삼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곳.
너무 많은 나무가 심어져 있어서 두어 장 앞을 내다보기도 어렵다.
정리되지 않은 수풀은 허벅지까지 올라오고,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삼나무는 제법 차가운 날씨에도 울창하게 우거져 머리 위를 덮고 있다.
때문에 대낮인데도 삼나무 숲 안으로 들어서면 어둑한 저녁 무렵으로 느껴진다.
비무를 한다기에 무대가 마련된 연무장이나, 산채 무인들이 수련하는 대연무장 같은 곳에서 치를 줄 알았다.
한데 저긴 그냥 숲이 아닌가?
그것도 완전한 자연이다.
어디선가 새가 지저귀고, 풀벌레가 튀어 오른다.
당장에라도 노루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뭔 비무를 이딴 곳에서 하냐?
극마가 삼나무 숲을 휘둘러보며 불평 어린 소리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적비연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실제로 녹림의 수련 장소야. 여느 문파들처럼 연무장을 만들어 수련할 줄 알았어? 근본부터 다르다는 걸 몇 번 말해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비무는 평범하게 해야 할 것 아냐?
‘녹림에서는 녹림의 법도를 따라야지.’
-이런 지형이면 주인이 훨씬 불리할 텐데도 이해심이 아주 넓으시군.
극마가 빈정거리자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짐작했으니까. 괜히 녹림이 아니라고. 한때 무림에서 유행하던 말이 있어.’
-뭐냐?
‘녹림삼불가앙(綠林三不可仰).’
-녹림에서 세 가지는 바라지 말라는 건가?
‘맞아. 정의와 겸손, 그리고 보은.’
-쳇, 한마디로 개망나니들이란 말이군.
‘그 정도로 일반적인 규율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다. 사파와는 또 다른 길을 간다는 건 분명하지.’
-그런데도 자신은 있는 거냐?
적비연은 대답 대신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을 몰랐다면 긴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비연은 녹림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대비도 충분히 했다.
칠괴의 기억 덕분이다.
개똥도 약에 쓰인다더니, 칠괴의 기억이 이렇게 요긴할 줄이야.
그래, 적어도 사람은 경험이 재산이라는 말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그때 투왕이 굵은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그럼 어디 흑천투권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볼까?”
“한 수 배우겠소.”
적비연이 포권하자 투왕이 코웃음을 치더니 대뜸 몸을 날려 왔다.
“흥! 사파에 몸을 담으면서 정파 놈들 흉내는 그만하시지!”
파파팡!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움직임.
황소 같은 덩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순식간에 삼나무 기둥을 박차고 세 번 연속으로 이동하더니 눈앞에서 일권을 내지르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이 적비연이 아니라, 진짜 투혈권왕이었다면 꼼짝없이 일격에 당하고 말았으리라.
물론 흑천투권공이 전신을 금강불괴에 버금가도록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으니 그 한 방으로 결과가 나오진 않겠지만.
슈우우우욱!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투왕의 커다란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든다.
하나 그 모습은 제삼자에게만 그렇다.
적비연에게는 사뭇 다르다.
숲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먼지들이 공기압에 떠밀려 퍼져 나가는 것부터 보인다.
시활안이 발동한 것이다.
그만큼 적비연의 움직임도 느려지지만, 생각할 시간은 더 주어진다.
적비연은 뒤로 물러나거나 팔을 들어 막는 대신 몸을 빙글 돌렸다.
바로 옆에 삼나무가 있었다.
적비연이 삼나무를 등지면서 빙글 돌아가는 사이, 포탄처럼 날아들던 주먹은 삼나무 기둥을 완전히 박살 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주먹이 닿기도 전부터 삼나무가 터져 나가고 있다.
콰앙!
육중한 충격음과 동시에 커다란 삼나무에 구멍이 뻥 뚫렸다.
삼나무가 완충 작용을 하면서 파괴력은 급감했다.
적비연은 그대로 금나술을 펼치면서 삼나무를 뚫고 튀어나온 주먹을 낚아챘다.
동시에 몸을 다시 빙글 되돌리면서 손목을 꺾었다.
아니, 꺾어야 했다.
하지만 투왕이 괜히 투왕인가?
‘무슨 쇠뭉치도 아니고……!’
사람을 만진 것 같지가 않다.
피부부터 거짓말처럼 딱딱하다.
오히려 투왕의 우악스러운 주먹이 활짝 펼쳐지는가 싶더니 그대로 적비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다음 순간,
콰작! 우지끈!
삼나무를 뚫고 튀어나온 팔이 그대로 삼나무를 절반 찢어냈다.
그렇다.
찢어냈다는 표현이 딱이다.
나무 기둥 한가운데를 뚫어서 옆으로 빠져나왔으니 찢어낸 것만 같다.
구구구궁……!
커다란 삼나무가 무거운 신음을 흘리면서 천천히 넘어간다.
투왕이 적비연의 손목을 잡은 채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삼나무 아래에 깔릴 상황!
적비연이 얼른 흑천투권공을 일으키면서 육중한 무게의 삼나무를 떠받쳤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투왕은 다시 왼손을 뻗어왔다.
“으하하하! 본좌의 손맛을 느껴라!”
투왕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면서 일권을 내지른다.
주먹이 그대로 적비연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박히려는 순간, 간발의 차로 머리를 비틀어 꺾었다.
콰자아앙!
날아든 주먹이 그대로 기울어진 삼나무 기둥을 쳐내면서 박살 났다.
나무 파편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적비연은 전신에서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다.
파아앙!
본래 호신강기는 몸을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되지만, 바로 눈앞에서 삼나무가 터져 나가자 호신강기에 튕긴 나무 파편이 암기로 변해 버렸다.
투타타타타타!
무차별적으로 터져 나간 삼나무 파편이 투왕의 전신에 마구 박혀들었다.
“흥! 운이 좋구나!”
거칠게 포효한 투왕이 순간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땅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린다.
동시에 산새들이 화들짝 놀라 창공으로 솟아올랐다.
푸드드득!
적비연은 바닥이 쑥 꺼지는 느낌을 받으면서 얼른 몸을 날렸다.
쿠르르르르!
물러진 땅바닥이 갈라지면서 주변 삼나무가 마구 기울어진다.
팟! 팟! 팟!
적비연은 얼른 쓰러지는 삼나무 기둥을 박차면서 최대한 높이 도약했다.
“쥐새끼 같은!”
투왕이 쓰러진 삼나무 기둥 하나를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인들이 저마다 탄성을 흘렸다.
“저, 저게 정말 사람 힘이야?”
임송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렇게 큰 통나무를 직접 들어본 사람은 안다.
저 정도 크기의 나무가 얼마나 무거운지.
열댓 사람이 달려들어 들어도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프다.
무인이라도 말이다.
쉽게 생각해서 집을 떠받치는 기둥 하나를 사람 혼자서 뽑아 드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아니, 저 길이로 보면 그 이상일지도.’
그럼에도 투왕은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만 같다.
“노오옴!”
그가 사자후를 터뜨리면서 삼나무 기둥을 통째로 휘둘러 댔다.
쿠콰콰콰콰앙!
주변의 삼나무가 마구 부러지면서 숲이 통째로 뒤흔들린다.
산사태라도 일어난 것만 같다.
뿌리째 뽑혀서 넘어가는 나무도 있었고, 기둥이 절반가량 뚝 부러져서 쓰러지는 나무도 있다.
슈우우욱, 콰작!
마침내 투왕이 휘두른 나무가 다른 나무와 얽히면서 꿈쩍도 하지 않자, 적비연이 훌쩍 뛰어내려 나무 기둥을 밟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파바밧!
벽력활보를 펼쳐 날아가는 적비연은 바람처럼 빨랐다.
쉬이이잇!
적비연의 주먹이 송곳처럼 날아든다.
투왕의 주먹이 포탄 같은 느낌이라면, 적비연의 일권은 검봉처럼 날카롭다.
“흥!”
투왕이 코웃음을 치더니 손바닥을 쫙 펼쳐서 뻗었다.
꽈앙!
육중한 폭음에 이어 투왕이 뒤로 밀려났다.
콰과과과아앙!
마구 뒤엉켜서 쓰러진 삼나무에 등을 기대며 멈춰 선 투왕이 입매를 비틀었다.
“제법 매운 주먹이다. 하나 본좌에겐 어림없지!”
콰앙!
그가 진각을 밟자 뒤엉켜서 쓰러진 삼나무 더미가 폭약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산이 터져 나간다.
그 파편이 멀찍한 곳에서 구경하던 무인들에게까지 매섭게 날아든다.
‘이런 미친……!’
임송화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얼른 검을 휘둘렀다.
파파파파팡!
검기가 날아드는 삼나무 파편을 마구 쳐냈다.
푸스스스스!
조각조각 잘려 나간 삼나무 파편이 주변으로 안개처럼 흩어진다.
그녀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호신위들 모두 암기처럼 날아드는 파편을 쳐냈다.
녹림채 무인들은?
저마다 다른 나무 기둥 뒤에 몸을 숨기거나 바위 뒤로 숨은 지 오래다.
확실히 그들은 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다.
공력을 쓰지 않고 안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다.
체면 같은 건 애초에 가진 적도 없으니 내세울 필요가 없다.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확실히 저런 점은 배워야겠네.’
임송화가 생각을 하는 사이, 삼나무를 터뜨리고 날아간 투왕이 적비연에게 일권을 뻗어갔다.
시활안을 펼친 적비연은 몸을 훌쩍 날려 뒤엉켜서 쓰러진 삼나무 기둥 뒤로 물러났다.
찰나지간 투왕의 주먹이 삼나무 기둥을 정면으로 쳤다.
툭!
무섭게 날아들던 모습과는 다르게 조용한 타격음.
지켜보던 임송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무 기둥 때문에 공력을 거둔 건가?’
아니다.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적비연의 신형이 충격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콰아앙!
투콰콰콰쾅!
삼나무 네 그루를 쓰러뜨리면서 튕겨나간 적비연.
분명 투왕의 주먹은 삼나무를 때렸는데, 그 뒤에 서 있던 적비연이 충격을 맞고 날아갔다.
삼나무는 멀쩡하다.
“저건…… 격산타우(隔山打牛)로군요.”
현청이 넋을 놓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산을 사이에 두고 소를 때린다.
말 그대로다.
커다란 삼나무가 적비연 앞을 막았지만, 그런 잔꾀에 두 번이나 걸릴 투왕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공력을 크게 일으켜 격산타우의 수법으로 적비연을 가격한 것이다.
그 결과 삼나무는 멀쩡했지만 뒤에 서 있던 적비연이 고스란히 타격을 입은 것.
엄청난 내공 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임송화도 내심 혀를 내둘렀다.
비열하고 치졸한 줄만 알았더니 제법 한 수가 있지 않은가?
아니, 고작 ‘제법 한 수’라고 표현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자신이 비무를 했다면 오초지적도 되지 않았으리라.
흑천련이 어째서 녹림을 흡수하지 못하는지 알 만한 부분이다.
한편 격산타우신공에 당한 적비연은 상의가 완전히 터져 나가서 검은 상체를 훤히 드러냈다.
상체가 검은 것은 흑천투권공 때문이었다.
물론 그 덕에 조금 전의 일격을 맞고도 깊은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제법 맵네.”
적비연이 입가에 흐르는 선혈을 닦아냈다.
“클클클. 허세 부릴 때가 아닐 텐데!”
파앗!
다시 한번 투왕이 날아올랐다.
비호가 따로 없다.
저 육중한 덩치가 어쩌면 저리 가벼워보이는지 신비로울 지경이다.
삼나무 사이를 어지럽게 헤집는 비호가 순식간에 적비연에게 달려든다.
찰나지간 적비연도 투왕을 향해 마주쳐 갔다.
그런데,
쉭쉭쉭쉭쉭쉭!
사방에서 날아드는 칼바람!
진짜 칼이다!
적비연이 몸을 뒤집으며 마구 회전했다.
파파파파팟!
거미줄처럼 날아드는 칼바람이 적비연의 옷자락을 사정없이 찢어낸다.
다행히 살갗은 베이지 않았다.
흑천투권공 덕분이다.
“저런 비열한!”
지켜보던 현청이 발끈 소리쳤다.
칼바람을 일으킨 자들은 숲에 잠입한 녹림의 무인들이다.
그들이 삼나무 가지마다 몸을 숨기고 있다가 품에서 암기를 꺼내 뿌린 것이다.
이번엔 엽강호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일대일의 비무에서 조직적으로 급습이라니!”
부우웅!
차차차앙!
엽강호가 대부를 휘둘러 앞세웠고, 한사와 여추백, 현청과 임송화도 도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녹림의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네 사람을 에워싸며 완전히 포위했다.
그들이 내뿜는 기도가 남다르다.
정예 중에서도 정예만 뽑은 모양이다.
그중에는 미계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계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이게 녹림의 방식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것들이!”
엽강호가 성난 포효를 내지르면서도 어쩌질 못했다.
머릿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은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
전신에 얕은 상처가 남았다.
공력을 아끼기 위해 흑천투권공을 적당히 조절한 탓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면서도 본좌에게 도전장을 내밀다니. 제법 갸륵하구나.”
투왕이 히죽 웃었다.
적비연이 따라 웃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도전장은 당신이 먼저 내민 게 아니었나?”
“뭣이? 감히……!”
“문답무용!”
순간 적비연이 다짜고짜 몸을 날렸다.
동시에 팔을 뻗자 날카롭게 잘려나간 나뭇가지 한 자루가 날아와 손에 착 감겼다.
“검……?”
투왕이 미간을 찡그렸다.
저래서야 마치 검술을 사용하는 것 같지 않은가?
권사가 검술이라니?
쒸이이익!
풀잎도 고수의 손에서는 신병이기가 되는 법.
강기까지 품은 나뭇가지가 무섭게 날아들자, 투왕이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양 손바닥으로 합장하듯 그것을 잡았다.
파앙!
“크읏! 권사가 이 무슨……! 권사로서의 자존심도 없단 말이냐!”
“녹림의 방식이 사기적이라는 건 알지만…… 당신이 하나 모르는 게 있어.”
“무슨……?”
적비연이 입매를 틀어 올렸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환생을 거듭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씹어뱉듯 말했다.
“난 더 사기적인 방법으로 강해졌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