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눈에는 눈, 사기에는 사기
쒸이이잉!
파파팟!
강기를 품은 검이 어지럽게 날아든다.
쾅쾅! 투콰앙!
검로를 피하며 뻗어내는 주먹은 애꿎은 삼나무만 계속해서 박살 낸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한 사람은 용이 되어 어지럽게 쓰러진 삼나무 사이를 구불구불 누볐고, 다른 한 사람은 범이 되어 걸리적거리는 삼나무를 죄다 때려 부쉈다.
범, 그러니까 투왕은 두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소문을 의심했다.
‘이런 놈이…… 투혈권왕? 투혈권왕이라고?’
어이가 없다.
당연히 내공을 이용한 박투술이 주가 될 줄 알았다.
아니, 당연히 그렇게 될 일이다.
한데 지금 검법을 펼치지 않은가?
오히려 검법을 펼치니 권법을 펼칠 때보다 훨씬 상대하기가 까다로워졌다.
왜 이런 놈이 투혈권왕이라는 별호가 붙은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다.
나뭇가지를 검처럼 쥔 적비연은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암기는 여기저기 엉켜서 쓰러진 삼나무가 막아준다.
어쩔 땐 투왕에게 날아들어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다 보니 녹림의 무인들이 함부로 암기를 날리지도 못한다.
‘그래도…… 그래도 이 숲의 주인이 누구인지 네놈이 알아야 할 것이다!’
투왕은 이를 빠득 갈면서 버텼다.
상대가 갑자기 검법을 능숙하게 사용하면서 당황하긴 했지만, 시간은 자신의 편이 될 터였다.
수하들도 조금만 지나면 투혈권왕의 움직임을 읽을 것이고, 그땐 다시 암기가 날아들 테니.
하지만 변수는 엉뚱한 부분에서 발생했다.
“시간만 끌면 다시 유리해질 것 같나?”
적비연의 말에 투왕이 흠칫거렸다.
적비연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은 구슬이었는데 회색빛이었다.
찰나, 적비연이 손가락으로 회색 구슬을 튕기자 삼나무로 날아가더니 펑 터졌다.
취이이이익!
숲 전체에 자욱한 연기가 가득 차올랐다.
“이, 이건 또 무슨……!”
“이런 곳에 오면서 이 정도 대비책은 세워뒀지.”
칠괴의 기억을 가진 적비연은 녹림이 어떤 곳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비무를 어떤 방식으로 치르는지도.
이곳에 오면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니 미리 준비한 수가 다양할 수밖에.
지금 터뜨린 연막탄 역시 그중 한 수였다.
비무가 벌어지면 녹림은 반드시 협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역시나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다.
한데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투왕이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질러댔다.
“이놈! 권사라고 속여서 검을 쓰고, 이젠 연막탄까지? 비열하기 짝이 없구나!”
누가 들으면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애초에 비무에서 협공을 하고 암기도 먼저 썼으면서 정당성을 논하다니?
어쩌면 그래서 더 녹림의 수장답다고 해야 할까?
보통의 경우라면 비열한 건 그쪽이 아니냐며 맞받아쳤으리라.
하지만 적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투왕을 비롯한 녹림이 그렇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 타인에게 공감이나 하겠는가?
나뭇가지를 검처럼 맞대고 있던 적비연이 눈을 번뜩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말로 해서 안 통하는 것들은 줘 패야겠지?”
“뭐라? 이런 미친놈이…….”
찰나, 적비연이 발을 뻗었다.
퍼억!
발길질이 명치에 적중하자 투왕이 신음을 터뜨리면서 뒤로 성큼 물러났다.
투왕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적비연을 쏘아보았다.
‘어째서 새파랗게 어린놈이 이렇게나 공력이……!’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겨를이 없다.
쉬이이잇!
“큿!”
강기를 품은 나뭇가지가 매섭게 떨어져 내린다.
투왕이 얼른 팔을 들어 올려 막았다.
따아악!
강기와 호신강기가 부딪치면서 공기를 찢을 듯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노오옴!”
투왕이 다시 주먹을 뻗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적비연은 벽력활보를 펼쳐 투왕의 주먹을 벗어나더니 그대로 목을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러갔다.
따아악!
나뭇가지가 목에 부딪치자 벌건 줄이 생겨났다.
“으악! 따따따거!”
투왕이 제목을 부여잡고는 팔짝팔짝 뛰었다.
적비연은 멈추지 않았다.
쉬이익, 따악! 딱!
“크아악! 아얏!”
정신없이 날아드는 나뭇가지가 투왕의 전신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날아드는 길은 신묘하기가 짝이 없다.
얼핏 보면 회초리를 마구 휘둘러 대는 것 같지만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절학의 검로다.
적비연은 벽력적가의 검법과 서호검법, 그리고 만검세가의 검법을 마구 섞어서 휘두르는 중이었다.
거기에 구천혈마검까지 더해지니 정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동시에 수가지 검법이 뒤섞여서 어지럽게 날아드니 투왕은 생전 처음 겪는 현상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얼핏 보면 덩치 큰 어른이 무차별적으로 매를 맞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저 나뭇가지를 맞는 사람이 투왕이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아니, 일류무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마 그 즉시 목이 날아가거나 팔 다리 하나는 사라져 불구가 됐으리라.
나뭇가지에 강기를 입혔으니 당연하다.
한데 투왕의 호신강기가 워낙 강해서 매를 맞는 것처럼 따가운 수준에서 그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투왕으로서는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
쉬잇, 따악! 쉿, 따악!
“크억! 아악! 크익……!”
투왕이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모가지를 잡아 비틀고 싶지만, 적비연의 신법이 기묘하기 그지없었다.
멱살이라도 잡았다 생각하는 순간이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대신 회초리가 날아드는 게 아닌가?
배후에서 반듯한 정공의 기운을 느끼고 돌아서면, 어느새 사특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회초리가 옆구리에서 날아든다.
옆구리를 막을라치면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진 회초리가 천둥소리와 함께 정수리에서 떨어진다.
후려치는 나뭇가지의 검로가 제각각이다.
하나의 검법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한데 문제는 하나의 사문에서 파생된 것도 아닌 것 같다.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진 검로가 여기저기에서 번쩍번쩍 날아드니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연막탄 때문에 적비연을 노리는 암기는 날아들지도 않는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아니, 비무 중에 연막탄 쓰는 꼴통 새끼가 어디 있나?
딱! 따닥! 따악!
“크읏……!”
몸을 둥글게 말고 잔뜩 웅크린 투왕은 온몸으로 날아드는 회초리를 맞으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이 방어 자세는 그가 독자개발한 무공 중 하나인 방탄암신공(防彈巖身功)이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절대 이런 자세를 취하진 않겠지만, 승부에 있어서 체면 따위는 생각지 않는 투왕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이긴 자다!’
공력을 최대한 아껴 호신강기를 피부에 밀착시키는 방법인데, 이 경우 피부가 바위처럼 딱딱해진다.
대신 몸이 둔해져서 빠른 대응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한참이나 그렇게 일방적인 구타를 막아내던 투왕이 눈을 부릅뜨고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찰나, 그가 방탄암신공을 풀어 버리고 모든 공력을 오른손에 집중해서 파암진산권(破巖振山拳)을 펼쳤다.
슈우우웃, 꽈앙!
파암진산권은 상대에게 직접 가격하는 권법이 아니다.
그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바닥이나 바위 등을 때려서 그 주변으로 기파가 미치도록 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보통은 다수의 적에게 포위됐을 때 사용하는 권법인데, 고작 투혈권왕 한 사람에게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문제는 이 여파가 주변의 녹림 무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산천지가 떨리더니 강렬한 기공에 떠밀려 주변의 바닥이 온통 뒤집어졌다.
콰콰콰콰콰아!
“크억!”
“우악!”
삼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녹림채 무인들의 비명이 마구 들려왔다.
적비연도 강렬한 기의 소용돌이에 떠밀려 연막 너머로 사라졌다.
겨우 몸을 추스른 투왕이 연신 어깨를 들먹이며 씨근거렸다.
그는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막이 자욱한 데다 조금 전 펼친 파암진산권 때문에 먼지 안개가 사방으로 가득하다.
눈으로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느껴야 한다.
‘어디냐? 이 쥐새끼 같은 놈……!’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투왕은 당장에라도 적비연의 목을 잡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마 그에게 위안을 주는 건, 자신이 구타당하는 장면을 수하들이 보진 못했다는 점이랄까?
바로 그때,
쉭!
“거기구나!”
투왕이 번개처럼 돌아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석상처럼 굳어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너, 너, 너……!”
부리부리한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투왕.
그는 바로 앞에서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는 적비연을 보았다.
아니, 들고 있는 건 검이 아니라 나뭇가지다.
하지만 검이나 진배없다.
까딱하다간 목이 뚫려 즉사할 거라는 위기의식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분위기뿐만 아니라 느껴지는 기감도 다르다.
핏빛처럼 붉어진 눈동자,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허공에서 넘실거리며 흘려대는 이질적인 기운, 막강한 위압감.
이건…… 마치…… 그래, 이건 분명히…….
‘마기!’
투왕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본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었다.
실제 그는 극마와 일체화를 진행 중이었다.
“눈치챘나 본데.”
“너, 넌 도대체 정체가……!”
“쉿. 이쯤에서 우리 거래를 하는 게 어떤가?”
적비연의 눈이 웃음을 짓는다.
사실 거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나?
당장 일 푼의 힘만 가해도 적비연이 든 나뭇가지는 투왕의 목에 구멍을 뚫을 텐데.
하지만 적비연의 두 눈을 보면서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묘하게 마음이 움직인다.
“이 비무는 비긴 걸로 하지. 어때?”
“내게 굴욕을 안길 생각인가?”
“굴욕이라기보단 한배를 타자는 뜻이야.”
“한배?”
“당신은 내 비밀을 지켜주고, 이 비무는 비긴 걸로 하고.”
“그걸로 끝?”
“아니지. 만통지를 내게 넘겨주고 내가 원할 땐 힘도 빌려줘야지. 다만 내게 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호의로 내린 결정으로 가자고.”
“결국 네놈이 하자는 대로 다 하는 게 아닌가?”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나을 텐데. 어차피 체면 따위는 없지 않았던가?”
“흥! 본좌가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 줄…….”
“당신은 내가 수황을 꺾었다고 했지. 그런데 당신이 나와 비기면? 서열은 어떻게 되는 걸까?”
“……!”
마지막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수황에 대한 치기 어릴 정도의 경쟁심.
그 때문에 적비연의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니 나머지는 쉽다.
적비연의 눈빛과 말투, 동작 하나하나에서 설득력이 더해진다.
환생을 거듭하며 자연스럽게 얻은 이능, 공천지권위가 먹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주 잠깐, 수황보다 높은 서열이라는 것을 상상해 본 게 시발점이 됐다.
그때부터 적비연의 모든 언행과 기운이 세밀한 설득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당장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적비연의 제안은 나쁠 게 없다.
모양이 좀 빠지면 어떤가?
지켜보는 자들이 없다.
수하들도 이 사실을 모른다.
적비연의 눈빛은 철저한 함구를 약속하고 있다.
그 눈만 바라봐도 무조건적인 신뢰가 생긴다.
믿고 따르라.
그리하면 너에게 이로움이 있으리라!
투왕도 모르는 사이, 공천지권위가 깊게 먹혀든다.
체공 위주로 익힌 투왕은 상단전이 약하기에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기도 하다.
체면 따위는 개나 줘버린 녹림이기에 더 쉽다.
그래, 체면이 무슨 소용인가?
명예에 목숨을 버리는 것들이 제일 한심한 자들이다.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지 못한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결국 살아남는 자가 강한 법.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단 한마디면 목숨과 대의명분, 그리고 서열까지 챙길 수 있다.
투왕 추야성이 입매를 씨익 틀어 올렸다.
“말은 바로 해야지. 수황이 아니라, 수왕이다. 그리고 나, 투황이 그대와 승부를 가리지 못한 걸 인정하지.”
적비연이 나뭇가지를 던져 버리고는 포권했다.
“한 수 잘 배웠소.”
투왕이 웃었다.
그는 지극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서 결론을 내렸다.
‘이걸로 수황이 내 아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