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통(通)의 경지
어떻게 된 걸까?
임송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몇 번이나 도파에 손이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현청 역시 여차하면 검을 뽑을 태세였지만 경거망동하진 않았다.
녹림인들 역시 다섯 호신위를 경계하면서도 숲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천지가 격동할 만한 지진이었다.
투왕의 파암진산권이라는 걸 그들은 알았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상대가 고작 한 명인데 어째서 파암진산권까지 펼쳤을까?
답은 구하지 못했다.
뭐라도 보여야 말이지.
생각보다 상대의 무공이 고강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패배는 없으리라 확신했다.
투왕이 진다고?
상상할 수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왕은 이길 것이다.
여차하면 여기 있는 호신위들을 깡그리 도륙해 버리고 삼나무 숲으로 뛰어들어 투왕을 도우리라.
그렇게 질긴 잡초처럼 명맥을 유지해온 녹림이 아니던가?
강호 예법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지.
이기면 그만이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런데 한바탕 지진이 일어난 후로 움직임이 고요하니 다가갈 수도 지켜만 볼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 됐다.
시간이 흘렀다.
동귀어진이라도 한 건가?
기분 나쁜 고요함.
연막이 사라지고 먼지 안개가 서서히 걷혀간다.
이윽고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귓가에 날아와 박힌다.
꿀꺽……!
무인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삼켰다.
“어엇! 채주님이시다! 총채주님이시다!”
“오오오! 역시 투황께서 이기셨다!”
녹림 무인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반대로 호신위들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치잇!”
“이 비열한 새끼들!”
엽강호와 한사가 동시에 공력을 끌어올리면서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호신위들이 일제히 투기를 일으키며 이판사판 싸우려고 할 때였다.
“잠깐! 아직이야!”
다급하게 소리친 사람은 임송화였다.
그녀의 목소리에 다른 무인들의 시선이 다시 먼지 안개 쪽으로 돌아갔다.
투왕의 뒤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또 다른 그림자.
그는 다름 아닌 적비연이었다.
호신위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떠올랐고, 녹림인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 찼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긴 거지?”
저마다 술렁이며 숲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보았다.
다만 만통지만은 안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오오, 드디어 세상 구경을 하겠구나!”
그는 알고 있었다.
투왕이 이겼다면 적비연이 저렇게 멀쩡하게 걸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을.
물론 녹림 무인들도 알고 있었지만 그저 믿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 * *
패배는 무승부로 위조됐다.
굴복은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상대의 기백을 인정하고 협력을 약속한 일대종사 투황 추야성!
녹림인들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내뱉는 말이 됐다.
세간에서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투혈권왕이 그것을 인정하니 결국은 그렇게 알려질 것이다.
그러니 가슴을 펴고 당당해도 된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녹림인들도 조금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따르는 투황이 그런 호협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이 승부는 자신들 생각과 다르게 기울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자도 있을 거다.
하지만 누구도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뱉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지나친 망상일 뿐이다.
결과가 좋으면 끝이 아닌가?
언제 자신들이 그 과정까지 따졌던가?
죽지 않았으면 된 거다.
더욱이 패배도 아니면 말할 것도 없다.
적비연 일행은 만통지와 함께 녹림채를 나섰다.
비열하고 치졸한 녹림인들이 세상 광명정대한 모습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일관성 따위는 없다.
그렇게 강호에서 버텨온 녹림이니까.
태산이 사시사철 다른 모습을 보이듯, 녹림은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많이 참으셨네요.”
삼나무 꼭대기에 선 미계수가 옆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투왕이 꼿꼿한 자세로 서서 멀어져가는 적비연 일행과 만통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미계수는 투왕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체면 따위도 없는 인물이라고 말하지만, 생각보다 그의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그럼에도 적비연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는 건 정말 기이한 일이다.
투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녹림은 어디에나 있어야 한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중원은 산야로 이어져 있지. 하지만 녹림은 이곳에만 있어. 그것은 진정한 녹림이 아니다.”
“혹시 비무 중에 머리를 많이 맞으셨습니까?”
“뭐야? 이 새끼야?”
“아니,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말하시니까.”
투왕이 피식 웃더니 멀어져 가는 적비연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자가 말하더군. 녹림의 숙원을 풀어주겠다고.”
미계수가 미간을 좁혔다.
“저자가요?”
“그래. 저자가.”
“아직 흑천련주가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데요?”
“너도 저자와 손을 섞어봤다면 느끼는 바가 있었을지도. 수왕 그 녀석이 왜 저자와 손을 잡은 건지 일견 이해되더군. 어쩌면 저자는 우리 녹림을 어디에나 존재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저자가 그렇게 해주겠다던가요?”
“그래.”
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뭔 개소리에 속아 넘어간 거냐고 놀려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계수도 지금만큼은 까불지 않았다.
워낙 투왕의 표정이 진지했기에.
미계수가 투왕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제가 도약의 발판을 제공한 셈이 되었으니 과가 아닌 공을 세운 셈이군요?”
투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계수를 돌아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리될지도 모르지만, 그 전에 좀 맞아야겠지?”
“어째섭니까? 우리 녹림은 언제나 결과주의……!”
“네 말대로 이유와 과정 따윈 필요 없다. 그냥 내가 지금 널 때리고 싶을 뿐이니까.”
“헉! 너무하십니다!”
미계수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의 뒤통수에 투왕의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안 서! 어디서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해 저런 혹 덩어리들을 달고 와서는 뭐가 어째?”
“언제는 숙원을 풀어줄 자들이라면서요? 너무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닙니까?”
“닥쳐라! 그냥 와서 맞아!”
미계수는 달아나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제멋대로시라니까. 뭐, 그래서 녹림다운 거지만.’
규율도 없고 규칙도 모른다.
체면도 없고 뭐든 제멋대로.
하지만 녹림은 잡초처럼 버틴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 * *
천목산을 내려온 임송화는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는 만통지를 보았다.
만통지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그는 연신 하늘을 우러러보고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가 하면, 눈빛을 반짝이며 흐르는 물을 유심히 보다가 손으로 흙을 주워 들어 뿌리기도 했다.
언뜻 보면 광인처럼 보일 지경이다.
다 늙은 노인이 연신 헤벌쭉해서는 아이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니 멀쩡하게 보이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저 사람이 정말 천하제일지자가 맞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현청도 전음으로 답했다.
[그 난리를 쳐서 데려오는 중이니 맞지 않겠소?]
[녹림이 하도 뒤통수를 치니 이젠 저 영감님도 헷갈려요.]
[하긴. 나도 확신은 안 서오.]
현청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이었다.
천하제일지자라면 좀 더 품위가 있고, 어딘지 모를 위엄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그저 천방지축 아이 같지 않은가?
그러거나 말거나 만통지는 연신 두 팔을 벌려 빙글빙글 돌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참 좋다. 좋아. 바람은 머물지 않으니 자유롭고, 하늘은 끝이 없으니 숨이 닿지 않는구나. 물은 굽이굽이 흐르니 인생을 닮았도다.”
이제는 덩실덩실 춤까지 춘다.
지켜만 보던 적비연이 만통지에게 다가갔다.
“그리 좋소?”
“아무렴 좋지 않은가? 수십 년 동안 산속에 틀어박혀 옴짝달싹도 못했는데 이리 자유를 얻었으니. 정말 고맙네. 날 찾아줘서.”
만통지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뭐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영감님이 날 좀 도와주셨으면 하오.”
“물론일세. 그런데 자네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뜬금없이 던진 말에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오?”
“반로환동(返老還童)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찌하여 영기(靈氣)가 충만한가? 아니, 복잡하다고 해야 하려나? 다층적인 기운. 그 나이에 도저히 지닐 수 없는 기운이로세.”
“영기라는 것이 보인단 말이오?”
만통지가 고개를 저었다.
“영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지. 나처럼 이통(理通)의 경지에 오르면 자연히 알게 되는 일.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바람이 부는 걸 느껴서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질세.”
“계속해 보시오.”
“자네는 묘하단 말일세. 마치 영통(靈通)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달까? 하나 진정 영통지경이었다면 날 찾아올 필요도 없었을 터. 참으로 묘하군. 묘해.”
만통지가 흥미롭다는 듯 적비연을 가운데에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도가에서 말하는 영통이란 말 그대로 영을 다스리거나 통할 수 있는 경지다.
진정 영통에 이른 자는 의지나 기운을 상대에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공유할 수 있게 된다.
무인이 신선의 경지에 이르면 동기감응(同氣感應)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불가에서는 달마 정도의 고승이 이의제신(以意制身) 경지에 이르러 뜻을 전하는 수준이니 가히 놀랄 만하지 않은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통이 가능한 경지.
해서 신통(神通)의 경지라고도 부른다.
흔히 신통방통하다는 말은 이러한 경지에서 따온 말이다.
사실 만통지가 느낀 건 꽤나 그럴싸하다.
실제로 적비연은 영을 통해서 몸을 옮겨 다니고 있으며 수많은 기운을 그대로 흡수했으니까.
‘그냥 척 보는 걸로 그런 걸 느끼다니.’
어쩌면 만통지야말로 영통의 경지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다.
확실히 만통지는 기대 이상이다.
이런 자가 정말 녹림에 갇혀 있었다고?
그냥 빠져나올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고?
뭐, 사람 속을 어찌 알까?
더구나 만통지의 속내를.
적비연이 상념을 털어내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만통지를 응시했다.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겠소?”
“물론일세.”
적비연은 호신위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도록 하고는 만통지와 자리를 옮겼다.
* * *
“흐음. 그게 사실인가?”
무겁게 입을 연 만통지는 더 이상 천진난만한 표정이 아니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은 그가 꽤나 심각하다는 걸 대변해 주고 있다.
놀랄 수밖에 없을 테지.
혼이 이동하면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나는 게 어디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나?
열이면 열 입을 쩍 벌리고는 믿지 못할 거다.
한데 만통지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그 백발광인들이 정말 흑천련 지하에서 발견되었단 말인가?”
아, 놀란 건 그쪽인가?
적비연이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바요.”
“아무래도 그들을 내가 직접 봐야겠네.”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오. 과연 사부님이 허락하실지도 알 수 없고.”
“하나 날 데려가면 자네가 흑천련주가 되는 게 아닌가?”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하오.”
“그럼 문제 될 건 없지. 내가 그 광인들을 보면 강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네.”
만통지의 표정이 지금껏 가장 심각해졌다.
적비연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그게 그리 큰일이오?”
“큰일이지. 더구나 어쩌면…… 그 일은 내게도 책임이 있을 듯하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적비연이 더 물어보려고 했지만 만통지가 몸을 돌리더니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왕 이리 됐으니 꾸물거리지 말고 서두르세. 오랜만에 서호도 보고 싶구먼. 많이 변했으려나?”
적비연이 얼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영감께서는 내 이야기는 놀랍지 않소?”
“자네의 어떤 이야기?”
“그러니까 내 영혼이 육신을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그게 뭐 대수라고. 세상에 놀랄 일이 그리 없을까?”
뭐라고?
이게 대수가 아니라고?
적비연이 멍하니 바라보는데, 만통지가 우뚝 멈추더니 돌아섰다.
그가 착 가라앉는 눈빛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정말 놀랄 일은 겉이 바뀌는 게 아니라, 속이 바뀌는 거지. 이통에 다다라서도 깨우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무엇이오?”
만통지가 자박자박 다가와서는 적비연의 가슴께를 검지로 쿡 찔렀다.
“바로 인간의 마음일세. 영통에 이르면 깨우치려나? 아니지, 심통(心通)에 이르러서도 타인의 마음만은 어쩌질 못하는 것이니. 오, 통재라.”
만통지가 혀를 차고는 걸어갔다.
적비연이 미간을 푹 찌푸렸다.
“도대체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