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기적을 바라는가?
말은 없다.
꼬리가 붙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다만 적비연이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한데 꼬리가 점점 늘어났다.
처음에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이젠 잘 모르겠다.
이것들을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쳤어야 하지 않나?
머릿수에서 확실히 밀린다.
그렇다면 각개격파를 선택했어야 했다.
저들이 노리는 건 만통지이리라.
아마도 파천신군이 보낸 자들이겠지.
사파가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린다.
이젠 아예 대놓고 노골적으로 기운을 뿜어댄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목을 옭죄는 것처럼 살기가 뿜어져 오고 있다.
따닥…… 딱…….
모닥불에서 이따금씩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울린다.
만통지를 포함한 일곱 사람은 말없이 모닥불만 응시했다.
임송화는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여전히 모닥불만 바라본다.
무슨 생각이 저리 많을까?
사방에서 살이 따갑도록 살기가 날아드는데, 적비연의 생각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만 같다.
만통지와 대화를 하고 돌아온 적비연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건 만통지도 마찬가지.
둘이 무슨 대화를 했기에 천진난만하게만 굴던 만통지가 갑자기 과묵해졌나?
따닥…… 딱!
장작 타는 소리에 반응하며 불씨가 날아오른다.
임송화가 흠칫거리고는 도파에 손을 얹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지금껏 미동도 하지 않던 엽강호가 대부를 움켜쥐었고, 한사는 쌍검을 슬며시 꺼내 들어 무릎 위에 얹었다.
미세한 움직이지만 큰 변화다.
여차하면 기를 발출하며 튕겨 나갈 태세다.
현청과 여추백도 각각 검을 뽑아 들고는 눈을 가늘게 여몄다.
자박…… 자박……!
발걸음 소리.
사방에서 조여 온다.
하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적비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모닥불만 바라보고 있다.
혹시 적이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걸까?
그럴 리가.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이제는 살기만으로도 범인이 다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정말 모르는가?’
임송화가 입을 열려는 순간, 드디어 적비연이 움직였다.
허리를 바로 세운 적비연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동으로는 혈우대(血雨隊). 모두 백한 명이지. 하나같이 일류 이상이고 절정이 무려 스물이야. 파천계에서 세 번째로 강한 조직이지. 흑철단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걸 보면 악산만살대진으로 전멸했을 가능성이 크겠군.”
혈우대였나?
임송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간 간자 생활을 하면서 흑천련 조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혈우대는 결코 만만한 조직이 아니다.
초절정고수가 없다지만, 절정고수가 스물이나 포함되어 있다.
적비연의 말대로 파천계에서는 세 번째로 강한 조직.
흑천련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꿀꺽.
임송화가 마른침을 삼키고는 적비연을 가만히 보았다.
적비연이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나머지는 흑천련 무인이 아니군. 파천신군이 외부에 의뢰를 한 모양이야. 한참 생각했지. 이제야 좀 알았지만. 먼저 서쪽은 귀살칠혼(鬼殺七魂).”
귀살칠혼!
임송화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귀살칠혼은 정사를 막론하고 악명을 떨친 자들이다.
그들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어떠한 살수집단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 일곱 명만으로도 못 죽일 자가 없다고 알려진 괴물들.
맙소사.
파천신군이 귀살칠혼까지 불러들였을 줄이야.
확실히 그는 판을 뒤집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귀살칠혼도 다들 알 테니 굳이 설명할 필요 없겠지. 다음으로 북에는 무정쌍겸(無情雙鎌).”
‘하……!’
임송화는 입을 딱 벌렸다.
하나같이 그 별호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무정쌍겸.
천하의 대마두.
그의 손에 죽은 자만 무려 수백이다.
그는 무인만 골라서 죽인다.
주로 의뢰를 받고 살행을 하지만, 돈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흥미를 가진 일에만 움직인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은 투혈권왕을 죽이는 일에 흥미를 가졌다는 뜻이리라.
두 자루의 낫을 사슬로 이어서 다루는 게 특징이다.
적비연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서쪽은 삼악사도(三惡四刀). 처음 들어보는 별호일 거야. 웬만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정사를 막론하고 온갖 구린 일을 도맡는 녀석들이지. 그 별호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기 때문이야. 조심해야 할 놈들이지. 하나같이 초절정에 이른 자들이니까. 세 사람인데 사도라고 불리는 이유는 둘째인 이악(二惡)이 쌍도를 쓰기 때문이지.”
임송화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호신위들은 내심 놀랐다.
적비연이 이 정도로 식견이 넓을 줄은 몰랐으니까.
혈우대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귀살칠혼과 무정쌍겸, 삼악사도는 어떻게 알아낸 걸까?
그 답을 적비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파악하고 움직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기다렸어. 이젠 알아냈으니 슬슬 대응해야겠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지금 단지 기운만 느끼고 이들의 정체를 파악했단 말인가?
귀살칠혼은 여전히 눈에 보이지도 않고, 무정쌍겸도 얼굴은커녕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았다.
삼악사도 역시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다 똑같은 살기가 사방에서 쏘아질 뿐이다.
그런데 지금 기도만으로 상대를 구분해냈다고?
물론 지금 구분한 건 아닐 거다.
이들은 천목산을 나설 때부터 따라붙었으니까.
좀 더 거리가 가까울 때가 있었고, 멀 때가 있었다.
적비연은 그 순간순간 상대를 파악한 것이리라.
도대체 기감이 얼마나 예민하다는 건가?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도 만통지만은 태연했다.
그는 모닥불을 보며 엉뚱한 소리만 했다.
“불이 아깝군. 모처럼 자유를 얻어서 낭만적인 노숙이니, 멧돼지 구이라도 해먹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 영감이 지금 상황 파악은 하고 있는 걸까?
임송화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질문.”
적비연의 말에 엽강호가 넌지시 나섰다.
“어떻게 대응할까요?”
“저기 암벽 보이지? 강호는 영감님 업고 뛰어. 목숨 걸고 지켜야 해.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절대 나서지 말도록. 암벽을 등지면 달려드는 놈만 처리해.”
“복명.”
엽강호가 포권하며 답했다.
적비연이 한사와 여추백, 현청을 돌아보았다.
“세 사람은 동쪽을 맡는다. 머릿수는 많지만 상대하기가 제일 편할 거야. 공격적으로 나가야 해. 삼첨진(三尖陳)이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삼첨진은 원래 열한 명이 펼치는 진이었다.
하지만 최소 인원으로 세 명도 가능하다.
물론 이 경우 세 사람의 손발이 한 몸처럼 잘 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적비연은 호신위들에게 수시로 진법을 익히도록 했기에 세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저는…….”
임송화가 입을 열자 적비연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대기.”
“네?”
“기척을 최대한 지우고 대기하다가 강호나 삼첨진에게 문제가 생기면 지원을 하도록 해. 여차하면 달아났다가 돌아와도 좋아.”
대도를 사용하지만 유연성과 민첩성만큼은 가장 뛰어난 그녀였다.
임송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여추백이 조금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리 되면 주군 혼자서 귀살칠혼과 무정쌍겸, 삼악사도를 막으시겠다는 건데…….”
“해보는 데까진 해봐야지. 나보단 너희들 걱정을 해.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누구 하나 죽을 수도 있고.”
호신위들의 표정에 자못 비장함이 스친다.
알고 있다.
어디 누구 하나뿐일까?
전멸도 각오해야 하리라.
이미 호신위들은 마음을 굳혔다.
이곳에 뼈를 묻기로.
적비연 역시 그 의지를 읽을 수 있었기에 긴말은 하지 않았다.
이번엔 피만 흘리고 지나갈 수준이 아니다.
파천신군이 제대로 준비했다.
“그럼 다들 이걸 먹어두도록.”
적비연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하나씩 던져 주었다.
“이게 뭡니까?”
“공력을 일시적으로 상승시켜 주는 영단이야.”
길을 떠나기 전에 천상원주 은하란에게 받은 것이었다.
호신위들이 저마다 영단을 받아 들고 복용했다.
과연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단전에서부터 강맹한 기운이 일시적으로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오오, 이거 엄청난데요?”
“이만하면 충분히 싸워볼 만하겠습니다.”
호신위들이 저마다 공력을 운기하면서 허세를 부렸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잘들 소화시켜. 비싼 거니까.”
실제로 공증단(功增丹)은 비용 대비 실효성이 떨어지는 영단이다.
여느 영단처럼 몸에 축적되는 게 아니라, 일시적인 상승으로 끝나기에.
길어야 한나절도 가지 못한다.
그럼에도 제조비용은 여느 영단 못지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상시에는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천상원이 그동안 벌어들인 돈이 막대하니 가능한 것이다.
“자, 그럼 슬슬 일어날까? 다들 최선을 다해봐. 혹시 알아? 기적이 일어날지.”
적비연이 몸을 일으켰다.
다섯 호신위들과 만통지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강호, 달려.”
적비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엽강호가 만통지를 들쳐 업고 내달렸다.
적비연과 다른 호신위가 그 뒤를 바짝 붙었다.
다행히 암벽을 등질 때까지는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거리만 조금 좁혀올 뿐이었다.
충분히 자신 있기 때문이리라.
이쪽은 고작 일곱 명.
반대로 저쪽은 열 배가 훌쩍 넘는 인원이다.
마침 동쪽에서 걸어온 혈우대주가 포권을 했다.
“혈우대가 사 공자님을 뵙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부터 저희가 모실까 합니다만.”
“실례야.”
적비연이 단칼에 거절하자 혈우대주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대공자님의 명에 따라 억지로라도 모실 수밖에.”
“어디 할 수 있다면 해보시든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말을 뱉으며 나선 사람은 한사였다.
그가 쌍검을 뽑아 들고는 성큼성큼 나섰다.
그 뒤를 현청과 여추백이 받쳤다.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한 세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공천지권위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이런 마음의 변화가 현청으로서는 놀라울 지경이었다.
임송화는 기척을 죽이고는 어둠 속으로 스르르 묻혀갔다.
혈우대주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정면승부를 하시겠다?’
시간을 끌거나 기회를 봐서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 사람이 나와서 막아선다.
마치 세 사람이 백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듯.
우습기만 한데 왜 불길한 생각이 드나?
그래, 허세다.
아니면 이제 막 떠오르는 권왕계의 호신위들이라서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거나.
혈우대주가 검을 스르릉 뽑아 들었다.
“후회는 마시길.”
“그쪽이야말로!”
파밧! 팟!
한사와 여추백, 현청이 동시에 검기를 일으키며 화살처럼 날아갔다.
삼첨진은 굉장히 공격적인 진법이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러니 선공을 양보하지 않는다.
혈우대주는 놀랐다.
먼저 세 사람이 선공을 했다는 것에 놀랐고, 그들의 공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에 또 놀랐다.
하지만 이쪽은 일백의 무리다.
단 세 사람에게 밀릴 수야!
“조져!”
그의 명이 떨어졌고, 백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세 사람을 에워싸며 날아들었다.
“저긴 벌써 난리가 났군.”
사람 키만 한 도를 품에 안은 채로 나타난 일악(一惡).
삼악사도의 첫째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권왕, 혼자서 우릴 막으시겠다? 흑천련이 어지간히도 우리를 우습게 봤군.”
“킬킬. 그러니 우리 삼형제를 부른 것도 모자라서 저런 떨거지들까지 불렀겠지.”
이악이 무정쌍겸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양손에 사슬낫을 쥔 무정쌍겸이 곁눈질로 이악을 응시했다.
“주둥이를 가벼이 놀리다가 명을 달리하는 수가 있지.”
“호오, 어디 한 번 붙어보겠느냐? 그렇잖아도 무정쌍겸이 그 악명만큼이나 정말 악랄한지 보고 싶었는데.”
“원한다면 기꺼이.”
무정쌍겸이 시린 눈빛으로 이악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지 살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것 같다.
하지만 일악이 끼어들었다.
“그만. 먼저 의뢰한 일부터 끝내고 정리하지.”
“칫, 알겠수다.”
이악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일악이 한쪽을 힐끔거렸다.
“그나저나 귀살들은 뭐가 그리 무서워서 꽁꽁 숨은 건가? 어차피 정체도 드러난 것 같은데 모습을 드러내지, 그래?”
파스스스……!
불꽃같은 살기가 날아든다.
그의 말투가 귀살칠혼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한데 그 살기의 방향을 읽기가 힘들다.
과연 천하제일의 살수답다.
일악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게 그대들 싸움 방식이라면 어쩔 수 없고.”
마침 적비연이 입을 열었다.
“서로 인사는 다 끝났나?”
다시 한번 살기가 일어난다.
삼악사도와 무정쌍겸, 귀살칠혼이 동시에 뿜어내는 살기다.
적비연이 씨익 웃으며 엽강호와 만통지를 가리켰다.
“자, 선택해. 날 공격할 것인지, 만통지를 납치할 것인지. 물론, 만통지를 선택하면 너희들 손이 닿기도 전에 내 손에 뒈진다. 날 선택하면?”
적비연이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무조건 뒈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