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기적을 바라는가?
쉬이이잇!
공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소리.
촤아악!
파육음에 이어 핏방울이 허공으로 솟구친다.
비명이 그 뒤를 따른다.
“크아악!”
귀가 비명을 듣는 동안 눈앞에서는 다시 빛줄기가 터진다.
번쩍!
손발이라도 움직일라 치면 뜨끔한 감각이 폐부를 비집고 들어온다.
반응하기에 늦은 것이다.
“끄억…… 꺽!”
혈우대원 하나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가슴을 쑤셨던 검신이 빠져나간 지 한참인데도 여전히 고통스럽다.
피와 침을 한 바가지 쏟아내면서 그대로 고꾸라진다.
쿠웅!
죽은 자를 동정할 시간은 없다.
아니, 쳐다볼 여유조차 없다.
동료의 죽음을 느끼는 사이 어느새 자신의 죽음이 목전에 들이닥치니까.
“이익! 쥐새끼 같은 것들이!”
혈우대 조장 하나가 이를 빠득 갈면서 장창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파공성과 함께 장창이 공간을 가른다.
혈우대는 무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함께 동고동락을 했기에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간다.
백 명 중 여든 명이 일류고수에 지나지 않는데도 흑천련 십대 조직에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적이 도검을 피하면 어느새 장창이 그 뒤를 쫓아 적의 가슴을 뚫어놓는다.
그마저도 피할 땐 암기가 날아든다.
진법 같은 건 없다.
그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진법이란 여러 사람이 합을 맞출 때나 필요한 것.
홀로 싸우는 자에게 진법이 필요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혈우대는 한 몸이기에 진법이 무의미하다.
흑천련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
수십 년간 그 명맥을 이어오면서 손발을 맞춘 고수들.
분명 그럴진대…….
‘어째서! 어째서 이놈들은……!’
고작 세 명이다.
자신들을 막겠다면서 앞으로 나설 때는 코웃음을 참지 못했다.
겉멋이 잔뜩 들어서 뒈지려고 작정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내던져 충성을 보이며 죽어가는 것이 대단한 낭만이라고 착각하는 족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이놈들은 혈우대보다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 세 명일 뿐인데 일단의 무리처럼 움직인다.
그렇다.
따지면 혈우대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백한 명의 혈우대는 한 명처럼 움직이고, 세 명인 호신위들은 삼백 명처럼 움직인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니 환장할 노릇이다.
하나가 치면, 하나가 빠지고, 다른 하나가 치면 또 하나가 빠진다.
둘이 동시에 칠 때도 있고, 셋이 동시에 칠 때도 있다.
백 명을 상대로 싸우니 세 사람에게 빈틈이 보일 만도 한데, 조금의 틈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 명이기에 틈이 더 적은 건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거기에 한 명 한 명의 공력도 무시할 수 없을 지경이다.
파악해 둔 것과 다르다.
왠지 배로 강해진 느낌이다.
그 부분만큼은 혈우대원들의 느낌이 정확했다.
공증단을 복용하면서 호신위들의 능력이 배가 되었으니까.
조직력으로 승부를 보면 밀릴 상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 세 사람의 조직력에 이렇게까지 밀리다니.
만통지 뒤에 버틴 암벽도 상당한 걸림돌이다.
그저 단단한 암벽일 뿐인데, 만통지 뒤로 천군만마가 지키고 서 있는 느낌이다.
세 사람을 무시하고 곧바로 만통지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건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만통지를 생포해서 납치해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다.
만통지에게 손이라도 닿을라 치면 그 앞에 태산같이 버티고 선 엽강호가 막아선다.
그리고 은신해 있다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임송화도 상대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자신들을 막아선 세 사람이 귀신처럼 나타나서 방해한다.
이러니 먼저 세 사람을 상대할 수밖에.
‘제길! 제길! 제길……!’
혈우대주는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백 명은 너무 많다는 것.
세 사람을 상대로 싸우기에 너무 낭비되는 인력이라는 것.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말도 있건만, 저 셋을 상대로는 통하지도 않는다.
하나가 창이 되면 다른 하나는 방패가 되고, 또 하나는 화살이 된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조직력에서 밀리니 더욱 부아가 치밀 수밖에.
“이놈들……!”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흥분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절로 조바심이 생긴다.
아니다.
침착해야 한다.
그래, 냉정하게 따지면 밀린다고 볼 순 없다.
삼 대 백의 싸움이다.
저 셋이 너무 잘 버티고 있으니 언뜻 밀린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좀 더 냉철하게 상황 분석이 된다.
혈우대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세 사람의 면면을 세세히 살폈다.
거친 호흡과 피부 겉으로 도드라지는 힘줄, 조금 더 격해진 표정과 전신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기운.
마음을 가라앉히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저 세 사람은 분명 지금도 기적적으로 잘 싸우고 있지만, 틀림없이 지쳐가고 있다.
처음보다 거친 호흡과 필요 이상으로 사용되는 근력, 점점 희미해지는 기도가 그 증거다.
혈우대의 피해는 만만치 않다.
벌써 서른 명이 전투불능 상태니까.
하지만 시간은 혈우대에게 손을 들어줄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고전을 하고 있지만 결국 승리는 혈우대에게 기울 수밖에 없다.
명확한 판단이 내려지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놈들이 지치고 있다! 계속 몰아붙여라!”
전투 중 수장의 한마디는 조직력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혈우대원들이 대주의 말에 기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치잇! 성가신 것들!”
한사가 이를 갈고는 쌍검을 매섭게 휘둘렀다.
촤촤아악!
“크억!”
“악!”
연이어 비명이 터지면서 두 명의 대원이 물러났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혈우대주의 말대로 지친 탓이다.
검에 실은 공력이 얕다.
그만큼 적의 상처도 얕을 수밖에.
여추백과 현청도 마찬가지다.
지금껏 여추백은 절도 있는 움직임을 보였고, 현청은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하나 여추백은 점점 검로가 무너져갔고, 현청은 검류(劍流)가 뚝뚝 끊어지는 듯하다.
이따금씩 임송화가 나서서 돕고 있지만 그녀 역시 은신과 전투를 반복하면서 기력이 떨어진 게 느껴진다.
“뒈져랏!”
마침 기합성과 함께 혈우대 조장 하나가 비도(飛刀)를 날렸다.
쉬쉭, 쒸엑!
푹! 푸푹!
“크윽!”
다급한 대로 팔을 들어 막은 여추백이 신음을 토해냈다.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비도 세 자루가 나란히 박혀 버렸다.
“끝이다!”
이번에는 장창을 든 조장이 질풍처럼 달려든다.
꼼짝없이 심장이 꿰뚫릴 판!
찰나, 그림자가 앞을 막아선다.
투깡! 푸욱!
“아악!”
모습을 드러낸 임송화가 비명을 터뜨렸다.
그녀가 얼른 대도를 들어 막았지만 완전히 튕겨내지 못한 장창이 그대로 왼쪽 어깨를 찌른 탓이다.
촤아아악!
“으윽!”
장창이 뽑혀 나가면서 피가 뿜어졌다.
임송화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물러났다.
그때쯤 현청도 비명을 터뜨리며 주춤거렸다.
돌아보니 허벅지가 길게 찢어져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 그림이 되었군.”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혈우대주가 한 걸음 나섰다.
한사와 여추백, 현청과 임송화가 부채꼴 모양으로 서서 혈우대를 경계했다.
삼첨진이 무너졌다.
아무리 훌륭한 진법이라도 기초 체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법.
너무 지친 탓이다.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내공을 소진한 탓에 공증단의 효과도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애초에 세 명이 백한 명을 상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면 사정을 봐줄 수 있는데.”
“허세 떨지 말고 덤벼라.”
여추백이 내뱉은 말에 혈우대주가 눈살을 구겼다.
“허세는 네놈이 떠는구나. 정녕 목숨을 던지고 싶다면 기꺼이 거둘 수밖에.”
혈우대주가 기도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그 순간에도 적비연은 거의 신기에 가까운 경지를 선보이고 있었다.
삼악사도의 표정은 처음과 달리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끄음. 저게 사람인가?”
“니미럴. 투혈권왕이 저렇게 강하단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일악에 이어 삼악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귀살칠혼의 은신술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딱 한 순간이다.
바로 살검을 펼칠 때다.
즉, 그들의 표적이 된 대상은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귀살칠혼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별호에 귀(鬼)가 붙은 이유다.
오죽하면 무림맹주조차 귀살칠혼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죽어야만 한다고 할까?
한데 적비연은 귀살칠혼의 얼굴을 하나씩 모두 보았다.
그럼에도 죽지 않았다.
오히려 귀살칠혼 중 두 명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적비연은 허공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귀살칠혼의 검을 팔뚝으로 막아내고는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홀연히 나타났던 귀살칠혼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날아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죽은 자는 삼혼(三魂)과 오혼(五魂), 칠혼(七魂).
이쯤 되면 둘 중 하나다.
귀살칠혼의 실력이 과장됐거나, 투혈권왕이 상상 초월로 강하거나.
그런데 저 정도의 은신을 펼치는 귀살칠혼에게 과연 과장된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괴물이었어. 제길.’
일악이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귀살칠혼이 공격하는 동안 자신들은 곧장 만통지를 노렸다.
하지만 적비연뿐만 아니라, 엽강호와 임송화에게도 가로막혔다.
물론 무공으로만 따지자면 삼악사도가 엽강호와 임송화보다 훨씬 강하다.
문제는 만통지를 산 채로 납치해야 한다는 점이다.
운 좋게 만통지를 낚아챈다고 해도, 그 순간 적비연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납치한 직후 대응할 수 있는 수단까지 생각해야만 한다.
이게 가장 걸리는 부분이다.
지금껏 누굴 죽여만 봤지, 지켜본 적은 없으니, 원…….
이대로면 적비연의 말대로 만통지 옷깃도 스치지 못할 상황 아닌가?
사정이 이런데도 무정쌍겸은 팔짱을 낀 채 나서지도 않고 있다.
일악이 그를 돌아보고 으르렁거렸다.
“옘병! 뭘 멀뚱멀뚱 눈깔만 굴리고 있어? 바짝 쫄아서 다리가 굳었냐?”
“아무래도 내가 너희들을 과대평가한 것 같군. 힘 좀 빼놓으면 만통지를 데려올까 했더니. 이래서야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건가?”
무정쌍겸이 무뚝뚝하게 말을 뱉으며 낫을 양손에 쥐었다.
일악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디서 못돼 처먹은 것만 배웠구나. 재주는 우리가 부리고 네놈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처먹겠다는 거였군?”
“그럴 생각이었는데, 재주도 부리지 못하는 미련 곰탱이들이니 어쩔 수 없이 나서야지.”
“뭐야? 이 거지발싸개 같은 새끼가……!”
“대형, 지금은 참으시오.”
보다 못한 이악이 나섰다.
말은 일악에게 건네고 있었으나, 그 역시 무정쌈겸을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무정쌍겸을 당장에라도 요절내고 싶었지만, 맡은 임무가 우선이었다.
일악도 이만 뿌득 갈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권왕. 제법 한 가닥 하는 것 같긴 한데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더구나 보아하니 저쪽은 벌써 위태위태한 것 같은데.”
일악이 힐끔거린 곳은 호신위 세 명이 막고 있는 혈우대 쪽이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오지랖을 너무 부리면 목숨이 위태로운 법이지. 너희들 걱정이나 하는 게 어떤가?”
파스스스……!
한 차례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금 살기가 묻어난다.
귀살칠혼이 내뿜는 기도다.
거기에 지켜만 보던 무정쌍겸도 나섰고, 삼악사도도 적비연을 노리며 걸어왔다.
이젠 대놓고 협공을 하겠다는 거다.
적비연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만통지만 빼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한 셈이다.
천하에 악명을 떨치는 자들이 의기투합했으니 두려울 건 없다.
하다못해 그들이 적비연을 상대하는 동안 혈우대가 만통지를 납치할 수도 있으리라.
궁지에 몰렸다는 것을 안 엽강호는 어금니를 꾹 씹었다.
호신위들이 모두 부상을 입었고, 공증단의 효력도 다 됐다.
믿을 사람은 적비연밖에 없는 상황.
적비연이 아무리 강해도 이 많은 자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다.
살아남는 게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빼앗기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게 문제다.
‘빌어먹을…… 여기까지인가?’
임송화도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뭔가 복안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절망적인 상황에 닥치자 힘이 빠진다.
이젠 정말 죽기 살기로 싸워서 적비연과 만통지만은 빼내야 할지도.
그런데 그때 적비연의 입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좀 늦었군.”
호신위들이 모두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일까?
그 의문에 대답한 자는 적비연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이 등진 암벽 꼭대기에서 우렁찬 사자후가 들려왔다.
“녹림이 투황의 형제인 투혈권왕을 돕기 위해 왔다! 권왕을 적으로 삼는 자, 녹림을 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