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09화 (210/301)

209. 아수라장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렇잖아도 어둑한 하늘인데 구름떼가 잔뜩 낮아지는 기분이다.

한데 구름이 아니다.

먹구름은 저렇게 세상을 덮칠 것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시커멓게 떨어지는 건 사람의 그림자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인영(人影)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암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저 높이에서 뛰어내린다면 누구랄 것도 없이 십중팔구 죽을 것이기에.

그런데…….

“저, 저, 미친……!”

진짜 사람이지 않은가?

수십, 아니, 수백 명이 야조라도 된 줄 아는가?

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이래서야 떨어지는 자들에게 깔려서 죽을 판이다.

떨어지는 가속도가 워낙 빨라서 혈우대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물러났다.

한데 떨어져 내리던 자들의 속도가 어느 순간 확연히 줄어들더니 뭔가에 튕기듯 다시 올라간다.

자세히 보니 몸을 가느다란 줄로 묶었다.

그제야 무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 이들은 녹림이었지!

녹림을 달리 말하면 숲에서 싸우는 귀신들이다.

숲의 온갖 지형지물을 가장 잘 이용하는 자들이 바로 녹림이 아닌가?

튕겨 올라간 녹림인들이 단도로 줄을 끊어내자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린다.

파바바밧!

모두 몇 명일까?

족히 삼백은 될 것 같다.

중원 전역의 산새마다 터를 잡고 퍼져 있어야 할 자들이 이곳에 다 몰려든 것만 같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천목산에 그들의 본채가 있으니.

어쨌거나 갑자기 상황이 역전됐다.

바닥에 내려선 녹림인들은 뭐라 말을 섞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적들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문답무용을 몸소 실천하는 자들이다.

혈우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곧 끝을 보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녹림이라니!

게다가 다짜고짜 몸을 던지면서 공격을 해오다니.

점잖게 말을 섞고, 배려를 가장한 도발 따위는 없다.

곧바로 창이 날아들고 도끼가 날아든다.

쉬이잇!

“크악!”

푸콱!

“어억!”

녹림의 무공은 투박하기 짝이 없다.

기본적인 박투술과 생존을 위해 익힌 실전 무공.

애초에 그들의 근본은 다양하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탈영병이 주를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거지가, 때로는 실향민들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군에서 익히는 무공과 일반적인 박투술, 은거기사들에게 전수받은 사공 등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다.

혈우대가 제각각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글쎄.

그게 녹림만 할까?

녹림은 도검창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기를 들고 휘두르는가 하면, 무인들 사이에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편법까지 등장하곤 한다.

바로 지금처럼.

“크하하하! 이 개 같은 것들아! 녹림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사각턱을 가진 중년 사내는 천목산에서도 서쪽 산채를 맡은 천서채주 조규였다.

그가 품에서 주먹만 한 나무통을 꺼내더니 혈우대원들을 향해 휙휙 집어 던졌다.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근처 녹림인들이 저마다 머리를 감싸 쥐고는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언뜻 우스꽝스럽기도 했기에 혈우대원들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눈치채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꽝! 꽈앙! 꽝!

폭음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떨어졌던 나무통이 조각조각 흩어지면서 사방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푸푸푸푹! 푹! 푹!

“크아악!”

“아악!”

단단한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날아가면서 혈우대 무인들의 전신에 박혀들었다.

개중에도 파편이 가슴에 틀어박힌 자는 즉사했고, 입이 찢어진 자도 있었으며, 눈에 박혀서 실명한 자도 생겼다.

혈우대주가 뺨을 부르르 떨었다.

“이…… 개 잡종들이……!”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다니!

처음 세 명이 신기에 가까운 조직력으로 버티는 걸 겨우 깨부쉈더니, 이젠 조직력 따위는 개나 줘버린 놈들이 나타나서 난장을 부리는 게 아닌가?

조직력을 개나 줘버렸다는 표현은 평가절하가 아니다.

실제로 녹림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채주! 진천뢰(震天雷)를 쓸 거면 거 미리 좀 말을 해줘야 할 것 아니오!”

“낄낄! 이놈들아! 그걸 말하면 저놈들도 다 피할 거 아니냐?”

“그러다가 우리도 죽잖소!”

“산나물 캐 먹고 산 게 몇 년인데 그걸 일일이 말해줘야 알아? 척하면 딱이지!”

“젠장, 그러다가 우리 다 뒈지면 책임질 거요?”

“오냐, 그땐 내가 거하게 고사를 지내주마!”

“흥! 쇠고기 한 상 가득 차려야 할 거외다! 술독은 두 자릿수로 준비하시고!”

“약속하마! 킬킬!”

녹림인끼리 떠드는 소리.

여기저기에서 정신 나간 웃음소리까지 들린다.

아니, 뭐 이런 족속들이 다 있나?

이건 뭐 오합지졸도 아니고.

그런데도 대응하기가 힘들다.

삼백에 달하는 무인들이 격식도 없이 마구잡이로 달려드니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완벽한 조직력과 완전 자유분방한 싸움꾼들의 격돌.

삼천진과 또 다른 의미로 반대되는 상황.

‘이, 이것이…… 녹림인가.’

수십 년간 녹림과 싸울 일이 없었다.

흑천련과 녹림은 무언의 동맹 관계나 다름없었기에.

무림맹과 대척한 시점에서 굳이 녹림과도 척을 질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녹림이 집단 싸움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알 까닭이 없다.

한데 이건 상상을 깬다.

아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진천뢰를 터뜨리다니.

“뭐, 이런…….”

다들 목숨을 내던진 사람 같지 않은가?

하긴, 그랬으니 저 절벽 위에서도 뛰어내렸을 테지.

다시 한번 암벽을 올려다보니 높이가 까마득하다.

그때 조규가 일갈을 터뜨리면서 혈우대주를 향해 날아왔다.

“네놈이 대가리로구나!”

부우우웅!

허공을 가르면서 일장이 날아든다.

의외로 제대로 된 장력에 혈우대주가 깜짝 놀라면서 몸을 비틀었다.

파앙!

허공에서 장력이 터지면서 기풍이 사방으로 훅 불어나간다.

‘이런 애송이가……!’

그래도 무림에서 칼밥을 먹은 자신이다.

이런 오합지졸의 수장에게 밀릴 수야!

화가 머리끝까지 난 혈우대주가 이를 빠득 갈고는 검을 내질러갔다.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쒸이이잇!

검기가 허공을 가른다.

그렇잖아도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린 격이었다.

하나 혈우대주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그가 단순히 오합지졸의 수장 정도가 아니라, 천목산 서쪽 산채를 담당하는 천서채주라는 사실을.

산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공이 최소 절정 후단의 고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성급함이 묻어난 검로는 그대로 허공을 지나쳤다.

천서채주 조규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

당황한 혈우대주가 섬뜩한 감각을 느끼고 휙 돌아섰다.

어느새 그의 뒤로 돌아간 조규가 입매를 히죽 말아 올렸다.

“몰랐냐? 녹림은 원래 겁대가리가 없다.”

슈우욱, 꽈앙!

눈앞에서 뻗어 나온 일장에서 강렬한 빛이 터졌다.

동시에 혈우대주의 앞섶이 온통 터져 나가면서 뒤로 날아갔다.

“크어억!”

한참이나 바닥을 굴러간 혈우대주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조규를 보았다.

그가 비틀거리면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이미 배 속은 내상을 입어 진탕이 되었다.

혈우대주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자…… 초절정이잖아!’

그는 진작 알았어야 했다.

산채의 주인 중에서도 본채가 있는 천목산에 터를 둔 채주들은 최소 초절정 이상이라는 것을.

조규가 씨익 웃었다.

“본좌의 특기인 벽천장(霹天掌)이니라. 자, 진지하게 덤벼라. 애송아.”

혈우대주는 그제야 임무를 벗어나 살 궁리부터 해야 할 순간임을 깨달았다.

한편 그 순간 적비연은 다시 한번 신기를 보이고 있었다.

푹! 푸푹!

“크억!”

“으억!”

어둠 속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생겨나는가 싶더니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픽픽 쓰러져 갔다.

귀살칠혼들이다.

녹림인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귀살칠혼은 속수무책으로 적비연에게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난전에 익숙하지 않다.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은밀하게 살행을 시도하는 자들이다.

한데 주변의 기운이 난무하니, 숨겨진 그들의 존재가 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공기의 흐름이 끊어진다거나, 녹림인이 뿜어낸 기운이 튕겨져 나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범인의 눈에는 그저 아지랑이가 흔들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절정 중단을 넘어선 적비연은 시활안까지 지니고 있으니 아지랑이가 흔들리는 것도 예사로 보이진 않는 법이다.

이쯤 되니 귀살칠혼 중 이제 남은 자는 겨우 두 명.

그들은 아예 흔적을 지워 버렸다.

그리되면 공격도 어려워지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 중에도 녹림인들은 성난 파도 같았다.

“이여업!”

녹림인 중 하나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삼악사도 중 이악에게 날아들었다.

“가소로운!”

이악이 왼손에 든 칼로 날아드는 도끼를 쳐내더니, 오른손에 든 칼로 상대의 목을 뎅겅 썰어냈다.

츄아아아!

녹림인의 목이 떨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순간,

파바밧!

그는 방울져 떨어져 내리는 핏물 너머로 빛살처럼 날아드는 적비연을 보았다.

“칫!”

이악이 혀를 차고는 왼손에 든 칼날을 휘둘렀다.

아니, 휘둘러야 했다.

하지만 찰나지간 적비연이 바로 눈앞까지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무슨 가속이……?’

도저히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속도!

거기에 적비연의 손에 들린 검은 또 한 번 경악하게 만들었다.

‘검……?’

검은 갑자기 또 어디서 생겼나?

투혈권왕은 권사가 아니었던가?

다음 순간 빛이 터졌다.

푹!

이악의 목을 찌른 검신이 목 뒤로 불쑥 튀어나왔다.

쑤욱!

검이 뽑히는 것과 동시에 다시 한번 검봉이 이악의 심장을 뚫었다.

푸욱!

“꺽……!”

“이 형!”

삼악이 비명처럼 외치며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꽈앙!

순간 적비연이 발차기로 이악을 날려 버렸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이악을 삼악이 받아내는 순간,

파바밧!

적비연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가더니 순식간에 삼악의 목을 쳐내는 것이 아닌가?

슈커억!

삼악은 자신의 머리가 왜 허공으로 솟구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악의 몸을 받아내는 순간, 머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몸을 잃은 머리가 바닥에 툭 떨어졌을 때, 묵직한 무언가가 자신을 짓눌렀다.

퍼억!

삼악의 머리를 짓밟으며 나타난 자는 바로 무정쌍겸이었다.

그가 쏜살같이 달리며 손을 뻗었다.

촤르르르륵!

쇠사슬이 미끄러지면서 무정쌍겸의 손에 들린 낫 한 자루가 곧장 적비연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강기를 머금은 낫이었다.

한데 낫이 적비연의 목에 채 닿기도 전에 방해물이 나타났다.

차아앙!

느닷없이 떨어져 내린 검자루가 쇠사슬을 쳐낸 것이다.

투콰앙!

그 바람에 적비연을 향하던 낫이 목표물을 잃고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웬 놈이……!”

무정쌍겸이 눈을 부라리며 치뜨자, 쇠사슬을 쳐낸 미계수가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뒤늦게 절벽에서 뛰어내려 이제야 나타난 참이었다.

“투황이 내린 명이 있어서.”

무정쌍겸이 눈에 쌍심지를 켜는 순간,

쉬이이잇!

한 줄기 예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흠칫거린 그가 뒤로 물러났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촤촤촤아악!

세 줄기 빛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무정쌍겸의 옷자락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츄아아아아!

전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의 가슴에 만월(滿月)이 떴다.

극성에 이른 삼담인월 초식이었다.

“이런…… 개거지 같은……!”

무정쌍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죽어가면서도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건 적비연이 모든 힘을 쏟아붓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분명 투혈권왕은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하다니.

“크익!”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일악은 주춤 물러났다.

더 이상 삼악사도는 없다.

살아남은 자는 자신뿐.

한데 분노보다도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왜일까?

전신이 가늘게 떨려온다.

이번 임무, 잘못 떠맡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오냐, 죽기 살기로 싸워주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젠 그래야만 한다.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보통 죽기 살기로 싸우면 죽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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