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10화 (211/301)

210. 이몽(異夢)

적비연 일행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그 시각.

흑천련주가 기거하는 심천원에서는 모처럼 사제지간의 담소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쌀쌀한 날치 탓에 찻잔마다 담긴 용정차는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렸다.

하나 차의 열기와 달리 장내 분위기는 어딘지 칼바람이라도 부는 것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어쩌면 흑천련주 특유의 냉엄한 표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들어라.”

모인지 한참이 지나서야 묵직하게 한마디 꺼내는 흑천련주였다.

투혈권왕을 제외한 네 명의 제자들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각자 찻잔을 들었다.

흑천련주는 네 명의 제자를 가만히 보았다.

그저 바라볼 뿐임에도 눈초리가 워낙 날카로워서인지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많이들 서운하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

하나 그 질문의 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투혈권왕에게 기회를 준 것에 대해 묻는 것이다.

확실히 투혈권왕은 좋은 기회를 제공받았다.

만통지만 무사히 데려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련주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으니.

최근 서호 인근은 그 소식으로 연일 떠들썩했다.

이미 투혈권왕을 지지하기로 월희마녀에게는 좋은 소식이겠지만, 다른 제자들에겐 충분히 아쉬움이 남을 만한 상황이었다.

잠깐 멈칫거린 대공자 파천신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최근 넷째 사제가 이룬 업적을 보면 충분히 기회를 받을 만했습니다.”

련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파천신군을 보았다.

파천신군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진 않는다.

하지만 일부러 숨기지도 않는다.

련주가 입매를 살짝 올리고는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두고 보지만은 않았느냐?”

련주의 질문에 다른 사제들이 흠칫거리고는 대공자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사람은 만리혈사가 유일했다.

파천신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장차 본 련을 이끌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 정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본 련의 장래가 어두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시험이다?”

“시험이자 제게도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과연 대공자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대놓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만통지를 빼앗게 되면 련주의 자리는 자신에게 물려달라고.

게다가 사부의 의중마저 파악하고 있다.

“사부님의 뜻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얼음장 같은 태청강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찌 보면 냉소를 짓는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푸근한 웃음 같다.

태청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돌연 질문을 받은 사람은 바로 오 제자 만리혈사였다.

그 역시도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날아들 줄 몰랐는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그저 사형들과 사저의 뜻에 따를 뿐이지요. 헤헤.”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긴장마저 절로 풀어지는 듯하다.

오 제자는 확실히 순수했다.

하지만 강하면서 순수한 무인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뜻도 된다.

벌레들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은 사리분별이 가능한 어른이 아니다.

그저 장난처럼 날개를 찢고 꼬리를 자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순수한 아이가 더 위험하다.

만리혈사.

그 별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자신보다 약한 자들은 벌레와 같았다.

사부로서 무정함을 가르치긴 했으나, 만리혈사는 그보다 훨씬 비정했다.

태청강은 찻잔을 들어 마시고는 만리혈사의 맑은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막내의 재능이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을.

“속이 깊은 것과 음흉함은 가려야 할 것이다. 적아를 구별해야 길게 가는 법.”

“새겨듣겠습니다.”

역시나 해맑게 대답한다.

태청강은 시선을 거두고는 네 제자를 찬찬히 보았다.

첫째는 야망이 크지만 욕망을 다스리는 데 서툰 면이 없지 않다. 둘째는 강하지만 본능에 맡기는 편이다. 셋째는 약하고, 다섯째는 속내를 알기 힘들 정도로 음흉함을 지니고 있다.

넷째에게 무거운 기회를 준 이유였다.

물론 자신은 여기까지만 개입할 것이다.

그 이상은 제자들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다.

밥을 떠먹여 줘야 할 나이는 지났으니.

사제지간의 담소 자리가 이리도 삭막할 수 있을까?

공기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뜻밖에도 들린 폭음이었다.

꽈앙!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 폭음 때문에 창문과 찻잔이 다르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일이냐?”

태청강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꽤나 큰 폭음이었음에도 표정의 변화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허공에서 다급한 보고가 이어졌다.

“내원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금역으로 들어섰습니다!”

“금역으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던 태청강이 흠칫거리며 물었다.

“확실하진 않으나 냉혼신검을 목격한 자가 있습니다!”

“냉혼신검이?”

태청강이 그답지 않게 거듭 놀란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또 다른 목소리가 허공에서 다급히 들려왔다.

“련주님, 급보입니다!”

“뭔가?”

“무림맹이 경계지를 넘어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강서성 의춘지부(宜春支部)와 안휘성 금채지부(金寨支部)가 습격을 받아 궤멸 직전입니다. 이대로면 황산(黃山)과 남창(南昌)까지 밀리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뭐라?”

태청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지금?

느닷없이 나타난 냉혼신검과 경계지를 허물고 급습한 무림맹이라.

그간 너무 조용하다 싶었지만 이 또한 노림수일까?

태청강의 전신에서 뻗쳐 나오는 기도는 전에 없이 날카로워졌다.

쾅!

삼 공자 종권악이 탁자를 치고는 벌떡 일어났다.

“이 썩을 무림맹 것들이 기어코! 사부님, 제가 당장 달려가서 놈들을 막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한 종권악이었다.

이 기회에 눈도장을 찍겠다는 심산도 있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지원에 나서야 할 일.

태청강이 마다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멸단(天滅團)과 혈마대(血魔隊)를 이끌고 황산으로 떠나라.”

“사부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곧장 대답한 종권악이 자리를 떴다.

태청강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남창으로는 누가 떠나겠느냐?”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시기가 애매했다.

누군가 자리를 비운 사이 흑천련주가 바뀌어 있을지도 모를 상황이 아닌가?

지금껏 련주는 한 번 뱉은 말을 번복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시기가 엄중하더라도 마찬가지.

그런 만큼 쉽게 련을 떠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오 제자 만리혈사 슬며시 손을 들었다.

태청강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네가 가겠느냐?”

“아, 그건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볼까 해서요.”

“말하라.”

태청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동시에 속을 알 수 없는 막내가 어떤 의견을 내놓을 지도 궁금하다.

만리혈사가 대공자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감히 말씀 올리지만, 남창으로는 대사형이 직접 가는 게 어떨까 합니다.”

모두가 흠칫거리고는 만리혈사를 보았다.

지금 상황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까?

파천신군은 후계 자리를 두고 투혈권왕과 대립하는 중이었다.

이 엄중한 시기에 련을 비운다는 것은 후계 다툼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

태청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이유는?”

“현재 무림맹은 벽력적가가 있는 장사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미루어볼 때 강서성을 치고 들어올 세력은 무림맹의 핵심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 중 가장 강한 대사형이 직접 가는 게 안전할 거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틀린 말은 없다.

실제로 무림맹은 벽력적가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장사에 많은 무력을 집중시킨 상태였다.

태청강이 파천신군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막내의 조언에 일리가 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뜻밖에도 파천신군이 순순히 대답했다.

태청강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에게는 혈랑대와 철기대(鐵騎隊), 그리고 흑궁단(黑弓團)을 맡기도록 하마.”

그야말로 흑천련의 핵심 병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혈랑대는 맹주 직속 타격대로 백전불태(百戰不殆)의 위용을 자랑했다.

오래전, 냉혼신검 설규를 사로잡아 끌고 온 조직이 바로 혈랑대였다.

철기대는 뛰어난 기동성과 거침없는 파괴력을 강점으로 내세운 조직이다.

게다가 흑궁단은 활을 곧잘 쏘는 파천신군에게 딱 맞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흑궁단주 조신우(朝信友)는 흑천사왕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당장 준비하여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청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위급한 만큼 오늘 자리는 이만 파하도록 하지. 나머지는 상시 대기하도록.”

“하지만 냉혼신검이라면 그 백발광인이…….”

월희마녀의 말에 태청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돌아볼 뿐이었다.

월희마녀가 곧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부님의 명을 받듭니다!”

“사부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월희마녀와 만리혈사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 * *

쿠웅! 꽈앙!

연신 폭음이 들린다.

행장을 챙기던 파천신군 이자권이 창밖을 슬쩍 돌아보았다.

내원 곳곳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특히 금역인 현무장 인근에서 난잡한 소음이 들린다.

‘살펴봐야 되지 않을지…….’

잠시 걱정을 하던 이자권이 곧 고개를 저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이곳은 사부님이 지키고 계신다.

자신은 맡은 바 임무만 다하면 될 일.

짐을 모두 챙긴 이자권이 방을 막 나서려고 할 때였다.

“어딜 가세요?”

맑은 목소리를 울리며 들어선 사람은 다름 아닌 막내 사제인 만리혈사였다.

이자권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보다시피 남창으로 떠나려 한다.”

“남창으로요?”

만리혈사가 의외라는 듯 묻자 이자권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자신이 남창으로 가게 된 것이 다 막내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마치 금시초문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다니.

만리혈사가 한 술 더 떠서 묻는다.

“정말로 가실 건 아니죠?”

“뭐?”

“뭐야? 정말 거길 가려고 했어요? 진심?”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아.”

만리혈사가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창가로 걸어가서는 창문을 닫더니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진난만한 표정이었던 만리혈사가 이젠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차갑게 식은 얼굴이었다.

“제정신이에요?”

“무슨 말을…….”

“아니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네? 내가 기껏 남창에나 가라고 대사형을 추천했겠어요? 네? 생각을. 좀. 하시라고요.”

가까이 다가선 만리혈사가 검지로 이자권의 가슴을 쿡쿡 찍었다.

검지에 공력이 실린 탓에 이자권은 가슴께에서 적잖은 통증을 느꼈다.

“…….”

“흑귀대와 철기대, 흑궁단까지 손에 넣고 기껏 남창에 가시겠다? 그러고 돌아오면 련주가 된 넷째 사형이 두 팔 벌려 환영해주겠군요.”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답답한 소리는 그만 하시죠. 지금 현무장에서 난리가 났어요. 냉혼신검이 돌아와서 백발광인들을 모조리 풀어줬다고요.”

“뭣이?”

“대사형은 그것들이 얼마나 미친 괴물인지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이건 전에 없을 기회라고요. 아시겠어요? 흑귀대와 철기대, 그리고 흑궁단. 여기에 남아 있는 파천계 조직을 규합하면? 흑천련을 한번 무너뜨렸다가도 다시 세울 수 있을 정도지요.”

“넌 설마…… 이 와중에 반역을…….”

“그만. 거기까지. 말을 예쁘게 하세요, 대사형.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이건 좋은 기회라고요. 정당하게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아시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찌 그런 짓을……!”

짜아악!

순간 이자권의 뺨이 휙 돌아갔다.

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만리혈사가 손바닥을 주무르며 말했다.

“정신 차리세요, 대사형. 땅에 떨어진 것도 주울 줄 모르면…… 살아갈 의미도 없잖아요?”

이자권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가 이내 스르르 풀어 버렸다.

그런 이자권 곁을 만리혈사가 지나치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강하지 않으면 독하기라도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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