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11화 (212/301)

211. 이몽(異夢)

“막내다.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을 생각이다.”

흑천련주 태청강이 데려온 아이는 앳된 외모에 귀여운 얼굴이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와 어딘지 장난기가 서린 표정.

이자권이 연리하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린 생각은 도무지 무인으로 보이지 않는 외모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부가 재능도 없는 아이를 제자로 들일 리는 만무했다.

“총명한 아이다. 네가 잘 지도해서 내 뜻을 잇도록 도와라.”

“알겠습니다, 사부님.”

“헤헤. 대사형, 잘 부탁드립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자권은 연리하와 자신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확실히 연리하의 재능은 천부적이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듣는 아이.

때론 이자권 자신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 당황하게 만드는 아이였다.

성격도 이자권과는 정반대였다.

매사에 진지한 자신과 달리 연리하는 모든 일을 가볍게 넘겼다.

처음에는 그런 연리하가 마냥 귀엽기만 했다.

왠지 틀에 꽉 박힌 자신의 생각을 연리하가 깨워주는 느낌도 들었다.

자연히 연리하와 가까워졌다.

연리하는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도 많은 아이였다.

걸핏하면 저잣거리로 달려 나가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쳤고, 그때마다 이자권이 직접 나서서 수습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연리하는 대사형밖에 없다며 졸졸 따라다녔다.

시간이 흘러 연리하가 두어 달씩 강호 유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자권의 배려 덕분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부탁해 오는 걸 뿌리칠 수 없어 그가 대신 사부에게 허락을 받아주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유랑하다가 돌아온 날은 곧장 이자권을 찾아와서 밤새도록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한 번씩 강호유랑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연리하는 부쩍 성장한 느낌도 들었다.

일취월장(日就月將).

연리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연리하의 무재는 세상이 놀랄 정도였다.

이자권이 검을 백 번 휘두르는 동안, 연리하는 한 번 휘두르고 백 마디 말만 떠들어댈 뿐이었다.

그럼에도 연리하의 무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져 갔다.

아직 오를 여지가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한데 연리하의 무공은 계속 상승했다.

그때쯤엔 사부가 이따금씩 이자권과 연리하를 불러들여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대체로 무학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자권이 답변이 궁해져 끙끙거리면 연리하가 대신 나서서 뜻을 짚어주곤 했다.

그때마다 사부는 연리하를 칭찬했다.

자연히 비교가 될 수밖에.

그때 느낀 자괴감이란.

불과 수개월 전만 해도 연리하가 끙끙거리면 이자권이 제대로 짚어주곤 했었는데.

그제야 은근한 경계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차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수련에만 집중했다.

한 번은 연리하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대사형은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무얼 말이냐?”

“매일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잖아요. 그게 재미있어요?”

“힘든 일이지.”

“그런데 왜 하세요?”

“그리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마라.”

“이해가 안 되네요. 백 번 휘두르는 것보다 아흔아홉 번 생각을 하고 제대로 한 번 휘두르는 게 훨씬 쉬운 것 같은데.”

그 순간 이자권은 마음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공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오의(奧義)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끝없는 수련만이 답이다. 보아라.”

말을 마친 그가 검을 뽑아 들고 흑천진력검(黑天進力劍)의 초식을 짧게나마 펼쳐 보였다.

쉬이이잇!

한순간의 웅장함과 위압감이 그의 검 끝에서 폭발하는 듯했다.

흑천진력검은 련주가 직접 창안한 것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라야만 펼칠 수 있는 상승무공이었다.

굳이 그걸 보여준 이유는 한 번쯤 기를 꺾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와! 엄청나요! 역시 대사형은 대단해요!”

“수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한 번 해보겠느냐?”

“네!”

연리하가 한참이나 서서 생각을 하더니 마침내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이자권은 내심 냉소를 지었다.

‘그게 그리 쉽게 될 것 같으면…….’

팟!

쉬쉬쉭!

순간 연리하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리고 사위가 검은 하늘에 뒤덮였다.

잠시 어둠에 잠긴 사이 연리하는 초식을 끝내고는 자세를 바로잡고 있었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어, 어떻게……?’

연리하가 펼친 초식은 완벽했다.

처음 그것을 시도한 것 같지 않았다.

연리하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헤헤. 역시 생각만큼 잘 안 되네요.”

생각만큼 잘 안 됐다고?

그럼 생각만큼 되면 도대체 어느 수준에 도달한단 말인가?

상대적 박탈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날 이자권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이후로는 유난히 막내에 대한 칭송만 귀에 들어왔다.

타고난 무재, 천진하지만 걸어오는 시비는 결코 피하지 않는 자, 심지어 차기 련주감이라는 말까지.

하루는 연리하가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대사형, 혹시 사저를 마음에 품고 계세요?”

“무슨 소리냐?”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연리하는 마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아름다운 꽃은 꺾으려고 하면 안 돼요. 지켜만 봐야지 내 것이 되거든요.”

앳된 얼굴로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회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들은 것이냐?”

“유랑하던 중에 어떤 영감님이 그러더라고요. 헤헤. 자꾸 짜증 나게 해서 죽여 버리긴 했지만, 그 말뜻은 괜찮은 것 같아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하찮은 일에 살검을 쓰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 사파가 욕을 먹는 거다.”

“앞으론 조심할게요.”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연리하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날부터 연리하는 보란 듯 사예린과 붙어 지냈다.

처음엔 애써 무시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질투심이 일어났다.

특히 사예린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을 바라보는 연리하의 표정은 마치 승자의 미소처럼 보였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연리하가 자신이 가진 모든 욕망을 하나씩 갈취해 가는 것만 같았다.

흑천련의 대공자라는 명성도 이젠 막내에게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파천신군보다는 만리혈사라는 별호가 더 오르내렸다.

마음이 심란하니 무공의 성취는 더디기만 했다.

결국 사부에게 심한 질책을 들었던 어느 날, 이자권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는 연리하를 찾아갔다.

연리하는 후원 정자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손바닥에 물집이 터지도록 검을 휘둘러도 모자랄 판에 낮잠을 자다니.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뭔가를 느낀 이자권이 연리하를 깨웠다.

“일어나라. 검을 들어라.”

연리하는 갑자기 찾아온 이자권을 보며 예의 그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대사형? 언제 오셨어요? 보고 싶었어요!”

‘역겨운……!’

저 가증스러운 미소에 얼마나 속았던가?

자신이 사예린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일부러 그녀에게 접근해서 질투를 유발한 막내다.

사부와 대화할 때는 본인의 성취를 드러내기 위해 대사형의 자존심 따위는 가볍게 짓밟는 녀석이다.

“오랜만에 대련을 하자꾸나.”

“정말요? 좋아요!”

대련은 진검으로 이루어졌다.

과연 연리하는 그간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빈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검술을 보여주었다.

반면 이자권은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속이 어지럽기만 했다.

‘어째서냐? 너는 어째서 모든 걸 가진 것이냐? 그러고도 어째서 가지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이더냐?’

검로가 막힐 때마다 조바심이 치고 올라왔다.

연리하의 웃음을 마주할 때마다 좌절감만 솟구쳤다.

‘그 웃음의 의미를 이젠 알겠다. 네놈은 날 비웃는 것이었어!’

차차차창!

이자권의 검이 점점 패도적으로 변해갔다.

오래전부터 쌓여온 열패감, 취기, 질투심이 뒤섞여 점점 이성을 마비시켜갔다.

문제는 흑천진력검이 그러한 마음을 더욱 격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다다랐다.

‘실수를 가장해서 놈을 불구로 만들어 버린다면? 다시는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면?’

사부님은 대노하시겠지만 결국 자신을 용서할 수밖에 없으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공교롭게도 연리하에게서 빈틈이 드러났다.

찰나 이자권은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살검을 펼쳤다.

탓, 쒜에엑!

공간을 갈라 버릴 듯 검은 기운이 연리하의 심장으로 짓쳐들었다.

명백한 살검!

그 와중에도 일말의 망설임은 있었다.

‘나는 정말 막내를 죽이려고 하는가?’

하지만 이미 검봉은 과녁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검봉이 미처 가슴에 닿기도 전에 한 줄기 빛이 눈앞을 스쳤다.

따아앙!

연리하가 변초를 이용해 검두(劍頭)로 검신을 쳐낸 것이다.

예기치 못한 역공에 이자권은 손바닥이 찢어지면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휘리리릭, 팍!

좀 전까지 살기를 머금었던 검이 정자 기둥에 날아가 꽂혔다.

“헛!”

헛바람을 삼킨 이자권이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나자 연리하가 바짝 따라붙으며 검신을 들이밀었다.

쿵!

이자권의 등이 정자 난간에 부딪치면서 멈췄다.

동시에 연리하의 검신이 그대로 이자권의 목을 벨 것처럼 다가섰다.

‘어, 어떻게 이런……?’

조금 전의 일격은 그야말로 필살의 순간이었다.

한데 눈 깜빡할 사이에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검을 들이민 연리하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천진한 웃음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냉소였다.

“대사형. 깜짝 놀랐잖아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요.”

“너, 넌…….”

이자권은 말을 잃고 말았다.

연리하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그간……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냐?”

“에이, 숨기긴 누가 숨겨요? 그럼 일부러 그런 것 같잖아요. 그냥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이죠.”

“어째서…….”

“당연히 대사형 체면을 생각한 거죠. 그런데…… 오늘은 어쩔 수 없었네요. 방금 저 죽이려고 한 거죠?”

꿀꺽.

이자권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도 흔들렸다.

치욕? 분노? 질투?

그런 건 느끼지 못했다.

단지 자신을 천진하게 쳐다보는 저 새카만 눈동자가 공포스러울 뿐.

탁탁탁.

연리하가 왼손으로 혈을 점하는 동안에도 이자권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찮은 일에 살검을 쓰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 사파가 욕을 얻어먹는 거라고요.”

연리하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이자권의 입에 넣어 삼키도록 하고는 다시 마혈을 풀어주었다.

“방금 그게 무엇이냐?”

“흑살고라는 녀석이에요. 유랑 중에 얻은 것인데 이렇게 쓰게 됐네요.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나머지는 대사형에게 선물로 드릴게요. 말 잘 듣는 개를 키우기에는 딱 좋거든요.”

연리하가 예의 그 해맑은 미소로 답했다.

이자권이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연리하가 돌아서다 말고는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조금 망설였죠? 덕분에 살았어요. 이렇게 대사형께 또 한 가지 배웠네요.”

“…….”

“강하지 않으면 독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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