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12화 (213/301)

212. 이몽(異夢)

쿠구구궁!

커다란 폭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전각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다르르……!

창문이 몸을 떨어대며 심상치 않은 상황을 알렸다.

마주 앉아 차를 마시던 은하란과 예홍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밖을 보았다.

방금 전에 들린 소음과 달리 창밖으로 펼쳐진 서호의 풍경은 고요하기만 했다.

다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반대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서호 반대편은 흑천련 본단이 있는 곳!

“확인해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예홍이 창밖으로 제비처럼 몸을 날렸다.

휘리릭, 탁!

순식간에 객점 지붕으로 올라선 그녀가 먼발치의 흑천련 본단을 살펴보았다.

내원 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커다란 폭음이 들리더니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솟구쳤다.

아무래도 뭔가 사달이 난 게 틀림없었다.

‘반역……?’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적비연이 자리를 비운 틈에 대공자가 반역을 일으킨 것일까?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들어 투혈권왕으로서의 적비연 행보는 굉장히 파격적이었으니까.

적비연이 차기 련주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나 다름없는 상황.

하지만 그 추측을 부정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반역은 아닐 거예요.”

어느새 은하란이 지붕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녀 역시 기본적인 경공 정도는 익히고 있었다.

“그럼 저건……?”

“글쎄요. 무슨 일일까요? 무림맹에서 심어놓은 간자가 저지른 짓일 수도 있겠고…….”

은하란이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같은 여인이 봐도 넋을 놓을 만큼 아름답다.

“어쨌든 반역일 가능성은 낮아요. 대공자는 바보가 아니죠. 그가 아무리 욕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들 지금의 련주를 상대로는 반역에 성공할 수 없을 테니까요. 다만, 이 상황을 이용한다면 또 모르겠지만요.”

“그럼 혹시 련주가 어떤 일로 화가 나서 전각들을 터뜨리고 다니는 게 아닐까요?”

이번엔 은하란이 입을 척 벌렸다.

부정의 끝을 달리는 예홍의 생각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건 더 가능성이 없을 것 같네요.”

“아…….”

“일단 저 정도의 소란이라면 보통 일은 아닐 듯한데. 더 지켜봐야겠어요.”

“알아보겠습니다.”

예홍이 이번에는 뜻을 눈치채고는 얼른 말했다.

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네.”

대답을 마친 예홍의 신형이 눈 깜빡할 사이에 흑천련 본단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 *

쿠구구궁!

전각 일부가 무너지면서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높이가 두 장 가까이 되는 담벼락을 딛고 선 흑천련주 태청강은 두 눈에 힘을 잔뜩 실었다.

“이것들이 대체 어떻게……!”

꽉 깨문 이 사이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

아니, 심각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이건 위험하다.

현무각에 가두었던 광인들이 모조리 뛰쳐나와 미쳐 날뛰고 있다.

흉수는 냉혼신검!

냉혼신검은 광인이었다.

머리가 미쳐서 사리분별을 못하고 사람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는 자였다.

그래서 그가 나타났다는 보고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냉혼신검이 제 발로 돌아왔다니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강호에서 멋대로 뛰어다니며 설치는 꼴을 보느니, 이참에 확실히 외양간에 처박아 놓으리라.

그런데 그가 정확히 현무각을 노렸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다른 망아지들의 고삐마저 죄다 풀어 버렸다.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 거다.

망아지들은 이제 탈을 벗어던지고 늑대의 본성을 드러냈다.

외양간을 지키던 자들은 늑대를 다스릴 줄 모른다.

일방적인 대학살.

이를 막기 위해 투입된 흑천련 무인들마저 곳곳에 시체가 되어 널브러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냉혼신검에게 의식이 돌아왔단 말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정확히 현무각을 노릴 수 있었을까?

눈을 가늘게 뜬 태청강은 현무각 장원의 참담한 현실을 보고는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만약 냉혼신검에게 의식이 있다면 이보다 위험할 수도 없다.

그의 무공은 초절정 후단에 이른다.

현무각에 잡혀 있던 광인들 모두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게다가 냉혼신검이 벽력탄(霹靂彈)까지 사용했다.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팟!

담벼락을 밟고 섰던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귀신처럼 현무각 장원 곳곳에 나타난 그가 마침내 광인 하나와 마주쳤다.

“크르르……!”

백발을 풀어헤친 채 허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광인은 영락없는 맹수와 같다.

이지를 잃고 그저 본능적인 공격성만 드러낸다.

그 주변으로는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목이 통째로 뜯겨 나간 시체부터 팔다리가 뜯어진 시체, 찢어진 살갗 사이로 내장을 쏟아낸 채 절명한 자도 있다.

“련, 련주…… 님……!”

부서져 내린 전각 한쪽에서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말하는 자가 보인다.

태청강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천살대주(天殺隊主).”

“죄, 죄송…….”

하얗게 질린 천살대주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이미 옆구리가 절반이나 찢어진 그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물론 그 기적이 그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으니.

“고생했다.”

무뚝뚝한 음성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태청강이 손가락을 튕겼다.

쉬이익, 퍽!

한 줄기 빛이 날아가더니 천살대주의 이마를 정확히 뚫었다.

이로써 천살대주는 지독한 고통에서 해방됐으리라.

태청강의 살기 서린 눈빛이 광인에게 향했다.

“크르르……!”

이지를 잃은 맹수가 다시 한번 태청강을 노려보며 잔뜩 경계한다.

놈은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태청강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껏 일방적으로 학살하던 먹잇감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슬금슬금.

천천히 걸음을 옆으로 옮긴다.

그러는 와중에도 태청강은 바위가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고요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그의 기도가 잔잔한 호수의 수면 같다.

그의 마음은 물속에 가라앉은 바위가 되었다.

찰나,

“크와아!”

타앗!

괴성과 함께 광인이 날아들었다.

제대로 된 초식도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움직임 하나하나에 상승의 무리가 담겨 있다.

거칠게 내뻗는 손은 조공이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은 것으로 보아 애초에 조공을 익힌 자가 틀림없다.

촤아아악!

태청강의 소매를 찢으며 광인의 손가락이 스쳤다.

파바밧!

태청강은 그대로 보법을 밟으면서 광인의 배후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기도가 격랑을 일으키는데도 태청강의 표정은 고요하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파도 아래에 잠긴 바위.

그의 얼굴이 딱 그렇게 보였다.

촤아아악!

광인이 본능적으로 돌아서며 손가락을 쫙 펼쳤다.

다섯 줄기의 강기가 각각 태청강을 할퀴며 지나간다.

태청강의 전신이 다섯 가닥으로 찢어졌다.

분명 다른 이가 보기엔 그랬다.

하나 찢어진 건 잔상이다.

태청강의 실체가 다시 보였을 때는 오히려 광인의 코앞까지 다다라서였다.

덥석!

태청강이 광인의 머리를 움켜쥐는 순간,

우우웅!

사위가 어둑해지면서 태청강의 손등으로 시커먼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퍼억!

끔찍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터져 나간 광인이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촤악!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낸 태청강이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훑었다.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

아스라이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재앙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던가?

현무각이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터져 버릴 줄 누가 알았겠나?

무너진 전각들 사이에서 점점 기척이 다가온다.

부스럭…… 부스럭…….

’후우우웅!

태청강이 공력을 끌어 올리자 장삼자락이 한 차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숨 막힐 듯한 살기가 사방에서 옥죄여 온다.

살기에는 광기가 섞였다.

근원이 없는 살기는 분노가 섞인 살기보다도 빈틈이 없다.

감정에 기반한 것이 아닌 만큼 흔들림조차 없기 때문이다.

스르릉.

태청강은 허리춤에서 흑천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사위가 어둑해진다.

그의 독문심공인 흑천강신기(黑天强神氣)가 극성으로 발휘된 탓이다.

무너진 전각들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역시나 이지를 잃은 광인들.

하나같이 숨 막힐 듯한 살기만 쏘아대고 있다.

범인이었다면 살기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정도다.

“크와아아!”

한 녀석이 괴성을 부르짖으며 몸을 날리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십여 마리의 맹수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태청강은 어둠으로 묻혀 들었다.

쉬이잇! 푹!

촤아악!

섬광은 터지지 않는다.

그저 어둠속에서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파공성만 울릴 뿐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피가 솟구치고 비명이 터져 나온다.

푹! 촤아악!

“크아악!”

“컥!”

때론 긴 비명이, 때론 짧은 비명이 터진다.

흑천강신기가 발휘되니 태청강은 어둠을 끌고 다니는 사자(使者)가 됐다.

광인들은 실체 없는 어둠에 달려드는 나방이 됐다.

그리고 꽤나 먼 곳에서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

은신술을 펼친 예홍은 모종의 전율을 느끼고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염라대왕이 따로 없어.”

* * *

“……!”

무심코 연무실 문을 열었던 연리하는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광인들이 모두 여섯.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자들이 수십이다.

‘이, 이건…… 어렵겠어!’

여전히 수십 명이 광인과 맞서 싸우고 있지만 거의 일방적인 도륙이라고 봐야 했다.

그럴 수밖에.

광인들의 무공 수위는 하나하나가 초절정 후단에 속했다.

어지간한 조직이 맞서 싸운다고 해도 어른과 아이 정도의 수준 차였다.

“공, 공자님…… 도와……!”

마침 문 가까이에 있던 무인 하나가 구원을 갈망하는 눈빛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는 두어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두개골이 절반으로 쪼개져 즉사했다.

운이 좋았던 걸까?

무인의 두개골을 쪼갠 광인은 연리하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른 먹잇감을 찾아 몸을 날렸다.

슬그머니 문을 닫고 돌아선 연리하는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마침 담을 넘어가는데 저만치 장로회주 유형백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연리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비소를 품은 연리하가 거침없이 몸을 날려 유형백 앞에 내려섰다.

“회주님!”

“오 공자! 자네는 괜찮은가?”

“예, 다행히 괜찮습니다. 하지만 련주님이 위험합니다!”

“뭣이? 련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연무실에서 광인들과 사투를 벌이고 계십니다! 지원 요청을 하라고 절 보내셨습니다!”

“어서 안내하게!”

“알겠습니다!”

연리하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앞장섰다.

연무실 입구에 다다른 연리하가 소리쳤다.

“저깁니다!”

“이놈들!”

분개한 유형백이 단숨에 몸을 날려 연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련주님! 무사하십니까?”

“크르르르……!”

일방적인 살육을 저지르던 광인들이 새로 나타난 먹잇감을 돌아보고는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유형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자만 해도 백여 명.

련주는 보이지 않았다.

“련주님은 대체 어디에……?”

“뒤를 부탁드립니다. 회주님.”

얼른 돌아보니 연리하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고 있는 게 아닌가?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유형백이 소리쳤다.

“오 공자! 이게 무슨……!”

하지만 그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크와악!”

여섯 마리 맹수가 일제히 포효를 내지르며 몸을 날려 왔기 때문이다.

여섯 줄기의 강기가 유형백에게 쏟아져 내렸다.

꽈과과과아앙!

전각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어댔다.

하지만 연무실은 특수한 재질을 이용해서 웬만한 연공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문을 굳게 잠그고 돌아선 연리하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회주님. 그러게 권왕계를 지지하지 말았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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