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무신(武神)의 싸움
“후우우.”
긴 숨을 토해냈다.
얼마만인가?
호흡을 참아가면서 싸워야 할 상대를 만난 것이.
인격이 없는 상대와 싸울 때는 늘 허무감이 밀려온다.
그래서 이런 싸움은 심리를 굳건하게 다져야 한다.
태청강은 호흡을 길게 토해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에게 달려들던 광인들 중 일곱이 목숨을 잃고 쓰러졌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철저하게 도륙 당했다.
태청강의 몸에도 얕은 상처가 생겼다.
복부를 가로지르는 선혈과 어깨를 길게 찢은 상처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다.
길 가다가 넘어진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에게 상흔을 남겼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무신(武神)이라고도 불리는 태청강이 아니던가?
이제 남은 광인들은 모두 여섯.
여섯 마리 맹수가 태청강을 가운데에 두고 어슬렁거리며 주변을 배회한다.
거친 호흡과 날카로운 기도, 어떤 녀석은 대놓고 독기를 휘날리고, 어떤 녀석은 철저하게 살기를 숨긴다.
분명 사람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맹수로 봐야 한다.
달리 말하면 생각을 끄고 본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저들에게는 속셈이 따로 없다.
그저 상대의 숨통을 끊어 버리는 극한의 공격성만 가지고 있으니, 방어하는 쪽에서도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면 오히려 불리하다.
맹수의 특성은 제각각이다.
각자가 익힌 무공에 따라서 공격 방식도 다르고, 기를 운용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 차라리 인간을 닮은 영물을 상대한다고 보는 게 낫겠다.
태청강은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폭음 소리.
자신에게 몰려든 맹수들이 전부가 아니란 뜻이다.
현무각 지하에 이토록 많은 맹수를 가두고 있었던가?
몰랐던 사실도 아닌데 새삼스럽다.
당장 칼을 맞대고 싸워야 할 상대가 되고 나니 성가시기 짝이 없다.
‘진작 군사 말 좀 들을 걸 그랬군.’
뒤늦은 후회가 살짝 밀려든다.
요당은 애초에 광인들을 어느 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그는 이 광인들이 본 련의 힘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전까지는 오히려 뇌관이 되어 자멸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었다.
그래도 통제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사실 냉혼신검이 탈출하지만 않았어도 통제가 가능했으리라.
냉혼신검이 탈출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만약 무림맹 사절단이 냉혼신검을 탈출시킨 거라면?
이 모든 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란 말인가?
무림맹은 어디서부터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걸까?
최근 잠잠한 무림맹이 어떤 수를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이런 식으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를 쓸 줄이야.
“크르르……!”
사실 그것도 추측일 뿐이다.
냉혼신검 혼자서 설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무림맹이 치고 들어오는 시점에 딱 맞춰서 냉혼신검이 습격한 게 아무래도 꺼림칙하다.
생각에 빠진 사이 맹수들이 으르렁거리며 기도를 끌어올린다.
우우우웅……!
흑천검이 검명을 일으키며 사위를 어둑하게 물들였다.
흑천강신기가 발휘되자 주변은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처음에는 동요하던 녀석들도 이젠 익숙해졌는지 안광만 번뜩일 뿐이다.
“그만 끝내지.”
태청강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마치 명령을 받은 자들처럼 맹수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크와아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들이 동시에 공격한 건 우연이 아니다.
흑천강신기에 실린 태청강의 목소리가 녀석들의 기운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지를 잃은 괴물들이 여섯 방향에서 동시에 협공을 펼치며 달려온다.
독기가 쏟아지고, 강기가 떨어져 내리고, 쇠붙이가 몸에 달라붙을 것처럼 날아든다.
상관없다.
의도한 바다.
어차피 상대는 보통의 인간이 아니다.
예측이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그럴 바엔 이쪽에서 의도한 대로 한꺼번에 들어오는 게 낫다.
파바바밧!
태청강이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초상승 경공을 펼치더니 마침내 어둠과 완전히 동화됐다.
제삼자는 싸움의 과정을 전혀 알아볼 수 없다.
싸움에 임한 자들 역시 감각만으로 진행 상황을 깨달을 뿐이다.
촤아악! 푹! 푹푹푹!
“크아악!”
“아아악!”
파육음과 비명이 어둠 속에서 거칠게 터져 나온다.
후드득!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흩뿌려진다.
촤아악!
까강! 땅!
파바박!
“커윽!”
“아아악!”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터져 나오다가도 금세 암흑에 묻힌다.
츄아아아아!
검은 안개 밖으로 피가 분수처럼 뿌려지며 비산한다.
“크아아압!”
털썩!
비명 소리와 한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
점점 생동하는 기운이 잦아 들어간다.
이윽고 희미한 기운 두 가닥만 흑막 밖으로 새어 나온다.
마침내,
파앗!
한 줄기 빛이 암공(暗空)에서 번쩍이더니,
촤아아악!
매서운 파육음과 함께 정적이 내려앉았다.
휘리릭, 툭!
데굴데굴……!
흑무(黑霧)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사람의 머리.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광인의 것이다.
한때는 강호에 이름깨나 떨쳤을 고수이리라.
츄아아아아!
피가 흩뿌려지는 소리와 함께 어둠의 기운이 연기처럼 흩어져간다.
마침내 그 중심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태청강.
피 묻은 검을 들고 석상처럼 선 그는 머리를 잃은 시체를 담담히 내려다보고 있다.
“후우우우.”
태청강의 입에서 검은 입김이 연기처럼 흩어져 나왔다.
오랜만에 진력을 끌어 올려 싸웠다.
이번 싸움에서 숨을 끊어놓은 맹수는 모두 열셋.
비록 이지를 잃었다고는 하나 각각의 무공 수위가 초절정 후단에 속하는 자들이다.
누군가 보았더라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물론 그 누군가 지켜보았더라도 결과만 볼 수밖에 없다.
흑천강신기가 극성에 이르면 주변은 암흑에 잠겨드니까.
적어도 흑천강신기가 극성으로 발휘될 때만큼은 태청강이 무적 상태나 다름없다고 봐야 하리라.
물론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중 하나라면,
쒸이이잇!
바로 지금처럼 싸움이 끝난 직후!
따아앙!
흑천검이 날아드는 빛살을 아슬아슬하게 쳐냈다.
촤아아아악!
무려 대여섯 장이나 미끄러진 태청강이 두 눈에 힘을 주고는 전각 위를 올려다보았다.
“네놈은?”
놀랍게도 이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
냉혼신검이 지붕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냉혼신검이 입매를 히죽 치켜 올렸다.
“천벌……!”
팟!
순간 냉혼신검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곧이어 그가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태청강 배후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일장을 뻗어냈다.
슈우욱, 퍼엉!
강맹한 장력에 호신강기가 부딪치면서 기파가 사방으로 거칠게 불어나갔다.
쿠파파파파파!
쓰러진 전각더미와 무너져 내린 담장이 기파에 떠밀려 사방으로 불어나갔다.
마치 포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태청강이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둥근 터가 생겼다.
파앙!
냉혼신검은 여유를 두지 않았다.
그가 바닥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손을 펼쳤다.
쒸이이잉!
그러자 주변에 떨어져 있던 십여 자루의 검이 일시에 허공을 가르면서 태청강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능공섭물? 아니, 이기어검이군!’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질 만한 신공.
각기 다른 방향에서 십여 자루의 검을 날리면서 본인은 장력을 뻗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걸로 확실히 한 가지는 알았다.
냉혼신검이 어느 정도 이지를 지녔다는 것을.
그러지 않고서야 흑천강신기가 가장 빈틈을 보였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치고 들어왔을까?
게다가 지금의 공격은 본능만으로는 펼칠 수 없는 경지.
하나 무신지경에 이른 태청강은 코웃음을 치고는 몸을 빠르게 회전했다.
“가소로운!”
그가 흑천강신기를 다시 한번 극성으로 일으키자 검은 기운이 돌개바람처럼 회오리쳤다.
쏴아아아아!
따다다다앙!
매섭게 날아들던 검들이 그대로 돌개바람에 휘말리다가 튕겨 나간다.
태청강을 공격하던 검은 이제 오히려 냉혼신검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었다.
태청강의 회전력이 더해지는 바람에 날아가는 속도도 더 빨라졌다.
“흥!”
냉혼신검도 코웃음을 치더니 쌍장을 뻗었다.
콰콰콰콰앙!
화살처럼 날아가던 검들이 조각조각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 바람에 주변 전각들이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터지면서 가루가 되어 버렸다.
냉혼신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천벌! 천벌! 천벌! 천벌이다!”
사자후를 터뜨리며 날아간 그가 태청강을 향해 정신없이 쌍장을 퍼부었다.
콰콰콰콰콰쾅!
장력이 어찌나 센지 호신강기를 일으켜 막아내는 대도 전신이 충격으로 떨릴 정도다.
마치 벽력탄이 코앞에서 연이어 터지는 것만 같다.
충격을 받아낼 때마다 흑천강신기가 일으킨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훅훅 불어나간다.
쿠구구구궁……!
그나마 버티고 있던 주변의 전각들이 그 기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완전히 주저앉기 시작했다.
태청강이 선 자리는 마치 화산의 분화구처럼 움푹 파여 갔다.
‘어찌 이리 무식한……!’
태청강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흑천강신기를 밑바닥까지 끌어올리지 않고서는 버텨내기가 힘들 정도의 괴력이 아닌가?
이 정도라면 냉혼신검 역시 목숨을 내던지고 쏟아붓는 공격이리라.
뚜둑……!
어깨뼈에서 소리가 울린다.
호신강기를 펼치고 있음에도 몸에 무리가 간다는 신호다.
냉혼신검이 이 정도였나?
쾅쾅쾅쾅쾅……!
‘미친…….’
쏟아지는 장력이 멈출 줄을 모른다.
마치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같다.
물론 이대로 계속 버티면 결국 냉혼신검은 나가떨어질 것이다.
양팔의 뼈가 조각조각 부서져서 쓸 수 없는 상태가 되리라.
하지만 태청강 본인도 내상을 입지 않고 끝낼 수는 없다.
이 미친놈을 상대로 어떻게든 수를 쓰긴 해야 하는데,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사부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어 한 줄기 강기가 냉혼신검 배후로 날아들었다.
연리하였다.
“치잇!”
냉혼신검이 혀를 차고는 몸을 빼내자, 배후에서 날아들던 강기가 공교롭게도 태청강의 정면으로 쏟아졌다.
“엇, 사부님!”
연리하가 얼른 공력을 회수했지만 관성에 의해 남은 강기가 그대로 태청강에게 작렬했다.
따아아앙!
촤아아아악!
태청강이 대여섯 장이나 미끄러졌다.
“쿨럭!”
갑자기 날아든 강맹한 공격에 태청강이 얕은 내상을 입고는 탁혈을 뱉어냈다.
“사부님! 죄, 죄송합니다! 저놈이 사부님을 공격하는 걸 보고 다급한 마음에……!”
갑자기 나타난 연리하가 사색이 된 채 소리쳤다.
하지만 태청강은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 냉혼신검을 쏘아보면서 씹어뱉듯이 말했다.
“나는 됐다. 다른 곳은?”
“난리도 아닙니다. 장로회까지 나서서 막고 있지만 광인들의 괴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놈을 무조건 잡아야 한다. 저놈이 이번 사건의 열쇠다.”
“네, 사부님!”
연리하가 대답하는 사이 냉혼신검이 반대 방향으로 신형을 쏘았다.
“엇! 저놈이?”
“잡아라!”
태청강이 바닥을 차고 화살처럼 날아가자, 그 뒤를 연리하가 바짝 쫓았다.
* * *
푸욱!
차가운 금속이 폐부를 찢으며 파고들었다.
그 순간 일악은 삶의 끝자락에 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털썩!
무릎을 꿇은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어쩌다가…….
’투혈권왕을 공격했던 무리들이 전멸했다.
시산혈해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자들은 전부 파천신군이 보낸 자들이었다.
대신 시신들 사이에 우뚝 저승사자처럼 우뚝 선 자들은 녹림인들이었다.
촤아악!
검신이 뽑혀 나가자 피가 터져 나왔다.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읊조렸다.
“말했잖아. 보통 죽기 살기로 싸우면 죽는다고. 내가 다 해봤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