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누가 죄인인가?
실내에는 약향이 가득했다.
다만 머리가 맑아지는 종류의 약향은 아니었다.
보통 몸을 보하는 영약이나 영단의 경우에는 향만 맡아도 일시적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다친 몸을 치료할 때 사용되는 약들은 향도 독하거나 쓴 경우가 많다.
특히 독을 치료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라는 말도 있듯이, 대게 지독한 독기는 그에 버금가는 또 다른 독으로 치료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뭐 약이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독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적비연은 신중한 표정으로 태청강의 인중에 세침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숨죽여 지켜보던 은하란이 사뿐사뿐 다가왔다.
“좀 어떤가요?”
“다행히 응급처치를 잘해두었소. 다만 전신에 퍼진 독기를 완전히 제거하기가 어렵소. 지금으로서는 꺼져가는 수명을 연장한 꼴밖엔 되지 않소.”
“곤란하게 됐군요.”
은하란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다 된 밥상을 오 공자인 만리혈사가 엎어버린 격이었다.
적비연이 태청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만리혈사가 그런 속셈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군. 한데 본인이 흑천검을 받지 않고 대공자에게 건네줬다는 건…….”
“대공자를 꼭두각시로 내세우겠다는 뜻이겠죠.”
“대공자의 지시는 아니고?”
“예홍 대주가 목격한 바로는 오 공자가 대공자보다 무공이 더 강해 보였다고 했어요.”
“하긴…….”
적비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청강은 무신이라도 불리는 자다.
그야말로 사파의 하늘.
한데 그런 태청강을 일도에 꺾었다.
물론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고, 제자에 대한 신뢰를 역이용한 것이긴 하다.
살기를 철저하게 숨기고 배후에서 느닷없이 급습한 것이니 무신이 아니라, 무신 할아비라고 해도 위험천만했으리라.
무신이라고 불리지만 정말 신은 아니니까.
그래도 만리혈사가 그저 그런 고수였다면, 도봉이 살갗에 닿는 순간 태청강은 방어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만리혈사의 무공도 고절하다는 뜻.
적어도 대공자에 준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파천신군마저 어쩌질 못하는 놈이었다니.”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생각에 잠겼다.
은하란이 창가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귀문회로부터 입수한 정보가 또 있어요.”
“무엇이오?”
“무림맹의 총공세를 흑천련이 막아낼 확률은 이 할이 채 안 된다는 것.”
“그 정도로?”
“무림맹의 기세가 매서워요. 지난번 장강에서 수로채에 패하고도 숨죽인 건 이때를 위해서겠죠.”
“삼 공자가 직접 나섰다고 들었소만.”
“설마 그자에게 뭔가를 기대하는 건 아니겠죠?”
“흐음.”
“죽지 않으면 포로가 되겠죠.”
“항주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글쎄요. 지금처럼 거침없이 밀고 온다면 길어야 한 달? 하지만 또 모르죠. 무림맹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무림맹이 흑천련을 멸하고 강호를 통일한다면 어찌될 것 같소?”
은하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가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당연히.”
“제일 먼저 본 가를 제거하려고 할 거예요.”
본 가라…….
문득 쓴웃음이 그려졌다.
한때 그녀를 의심하고 사활침까지 놨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한데 지금은 누구보다도 그녀를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거요?”
“그렇죠. 맹은 지금도 본 가를 옥죄고 있어요. 한데 주적이 사라지면 말 안 듣는 강아지는 더욱 필요 없겠죠. 명분이야 어떤 식으로든 만들 수 있을 테고.”
적비연은 기분 나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역시 충분히 짐작하던 바였기에.
그보다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겠군.”
그의 시선이 태청강에게 향했다.
어쩌다 보니 무림맹과 싸워야 할 판이 됐다.
벽력적가주로서는 무림맹이 너무 강성해지는 것도 부담스럽다.
상황이 이럴진대 흑천련은 내부 전쟁이나 치르고 있으니.
적비연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은하란이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궁지에 몰렸던 대공자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을 거예요. 그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었을 테니까요.”
“확실히 교패마저 그를 지지하고 있다면 상황이 어렵게 되긴 했소. 월희계와 권왕계가 모두 투옥되었으니.”
“이제 어쩌실 생각인가요?”
“보통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질 때는 생각해 둔 묘안이 있는 것 같은데.”
“벌써 절 꿰뚫어 보시는 건가요?”
“그 반대가 아니오?”
은하란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부정은 아니라는 뜻.
하긴.
적비연이 이런 기행을 겪는 이유가 모두 그녀 때문이 아니던가?
“만통지는 지금 어디에 있죠?”
“다른 객점에서 대기 중이오.”
“곧 들키겠군요.”
이번에는 적비연이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지금쯤 파천신군의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적비연의 행로가 다 밝혀진 상황에서 만통지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기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결국 일행들을 객점에 머물게 하고는 적비연만 인피면구를 써서 남몰래 빠져나온 것이다.
자칫 꼬리가 붙어 이곳을 들키면 태청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마저 발각될 테니까.
“위기를 다른 말로 하면 기회죠.”
“그래서 그 기회라는 건?”
은하란이 목소리를 죽이고는 말을 건넸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예홍이 뛰어 들어왔다.
“가주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야?”
“파천신군이 만통지를 데려갔습니다. 호신위와 괴독자도 함께 끌려갔습니다.”
“결국 그렇게 됐나?”
적비연은 이미 예상한 듯 담담하게 대꾸했다.
은하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거래는 물 건너갔군.”
“어쩔 수 없는 일. 어차피 통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 정공법으로 갈 수밖에요.”
은하란의 말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들어가라!”
혈랑대주가 엽강호의 등을 발로 거칠게 밀었다.
쇠사슬에 포박된 채 흑천궁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선 호신위들과 괴독자가 융단 가운데에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엽강호가 버럭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런. 누가 이들을 함부로 대하라고 했던가?”
태사의에 앉은 이자권이 짐짓 엄중한 태도로 따져 물었다.
혈랑대주가 한 걸음 나와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워낙 반발이 심해서 그만.”
“쯧쯧. 사제의 호신위들이 아닌가? 괴독당주도 자네들이 함부로 대할 신분이 아니지. 어서 포박을 풀어주게.”
“예, 련주님.”
혈랑대주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대답하고는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엽강호가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불만 서린 표정으로 이자권을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자권은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물었다.
“혈랑대주가 뭔가 착각한 모양일세. 너그러이 이해하시게.”
“흥! 착각은 대공자께서 하는 게 아니오?”
“무슨 말인가?”
“권왕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묘한 술수로 권좌를 차지하면 모든 이가 련주로 인정할 줄 아셨소?”
순간 혈랑대주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엄하다! 련주님은 정당하게 흑천검을 하사받으신 것!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가!”
“정당한지 부당한지 내가 봤어야 알지.”
엽강호는 거침이 없었다.
파천신군은 그런 그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침 교패가 나섰다.
“그대들이 없는 동안 본 련에 큰일이 있었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가 당황스럽겠지만 모든 과정은 정당하게 진행됐으니 경솔한 언행은 삼가도록…….”
“정당했다면서 어째서 월희계 무인들이 모두 투옥된 건지요?”
또박또박 따져 물은 사람은 바로 현청이었다.
교패가 눈살을 슬쩍 구겼다가 대꾸했다.
“그들은 정당한 승계를 인정하지 않고 반역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하면 련주님이 대공자께 흑천검을 정식으로 하사한 걸 증명할 사람은 있습니까?”
“물론이다.”
“그게 누굽니까?”
“오 공자님이시다.”
적비연과 달리 갑자기 본단으로 끌려오게 된 호신위들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 공자가 증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마땅히 반박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임송화가 다시 나섰다.
“오 공자님은 련주님께서 돌아가실 때 무얼 하셨는지요?”
그녀의 질문에 장내가 술렁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 공자를 질책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에.
연리하가 잔뜩 풀 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부족해서 사부님을 지켜 드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을 볼 낯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련주님의 시신조차 지키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련주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기적처럼 사지육신이 멀쩡하시군요.”
임송화가 날카롭게 지적하자 다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녀의 말에 동조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무례함에 혀를 내두르는 소리였다.
혈랑대주가 분노에 찬 고함을 버럭 질렀다.
“감히 오 공자께 무슨 무례한 소리를……!”
“아닙니다! 저 역시 죽을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살아생전 신상필벌이 분명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흑천검을 하사받고 본단을 혼란에서 구하신 대사형은 련주로 즉위하심이 마땅하나, 반대로 곁에서 사부님을 지키지 못하고 시신마저 갈취당한 저 같은 놈은 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해서 저는 이 자리에서 죽음으로 사죄를 드립니다!”
말을 마친 오 공자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강하게 내리치는 것이 아닌가?
“어엇! 오 공자!”
바로 옆에 있던 교패가 깜짝 놀라서 손바닥을 뻗었다.
그 바람에 연리하가 내려친 손바닥은 그대로 교패의 손바닥을 때리면서 제 가슴을 쳤다.
콰앙!
어찌나 강맹한 공력을 실었는지 큰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기풍이 훅 불어갔다.
근방에 선 사람들의 장삼 자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쿨럭! 쿠웨엑!”
교패가 급히 방어를 했다지만 그 충격을 완전히 막아내진 못한 것인지 연리하가 비틀거리며 피를 토해냈다.
목숨을 잃진 않았지만 내상을 입은 것이다.
상황이 이리 되자 연리하를 매섭게 몰아붙였던 임송화마저 두 눈을 끔뻑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교패가 얼른 연리하의 요혈을 점하면서 소리쳤다.
“오 공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본 련이 어려운 시기에 어찌 이런 무모한 짓을 하십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교 선생. 사부님께 도움이 되지 못한 이 천덕꾸러기를…….”
“그만! 지금은 사사로운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어서 몸을 보하십시오!”
잠시 주춤거리던 연리하가 마지못한 듯 고개를 숙였다.
“교 선생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혈랑대주! 공자님을 모시고 의성각으로!”
“알겠습니다!”
혈랑대주가 얼른 다가와 오 공자를 부축해서 걸음을 옮겼다.
상황이 이리 되자 이자권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짓 분노였다.
그는 내심 놀란 마음이 더 컸다.
‘조금 전 오 사제는 분명 살수를 펼쳤다.’
그 말인 즉슨, 제 심장을 내려칠 때만큼은 진짜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한데 다행히 교패가 바로 옆에 있었다.
‘만약 교 선생을 의식하고 모든 걸 계산에 넣어서 한 행동이라면…….’
정말로 무서운 녀석이 아닌가?
조금 전의 행동으로 흑천궁에 모인 수뇌인사들은 일말의 의심마저 지우고 연리하를 신뢰하게 됐다.
투혈권왕의 호신위들마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 말 다 한 셈이다.
련주가 되면 기회를 봐서 반드시 연리하부터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자권이었다.
한데 어째 점점 연리하가 더욱 무섭게만 느껴진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자권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넷째 사제는 어디에 있는가?”
엽강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저희들은 모릅니다.”
“자네들도 날 련주로 인정하지 않고 반역을 모의하려는 것인가?”
수많은 시선들이 날아든다.
명백한 적대감이 담긴 시선이다.
연리하의 돌발행동으로 저들의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진 탓이다.
엽강호가 머뭇거리는데, 문득 흑천궁 밖에서 적비연의 사자후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죄인, 이자권은 당장 기어 나와서 내 주먹을 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