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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217화 (218/301)

217. 누가 죄인인가?

이자권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미처 지워지기도 전에 다시 한번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말한다! 죄인 이자권은 당장 기어 나와서 내 주먹을 받아라!”

사자후에 어찌나 큰 내공이 담겼는지 흑천궁 지붕이 떨려댈 정도였다.

흑천궁에 모인 수뇌인사들 모두 사색이 되어서는 이자권의 눈치를 살폈다.

놀라기는 엽강호를 비롯한 호신위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이렇게 끌려온 이상 적비연이 벽력적가 무인들과 합세해서 차후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달려올 줄이야?

설마 그사이에 벽력적가 무인들을 다 끌고 온 것일까?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이자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군.”

하지만 내뱉는 말과 달리 그의 두 눈은 살의로 충만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신이 오죽 만만하게 보였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겠나?

그렇지 않아도 연리하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그였다.

한데 투혈권왕까지 자신을 우습게 여기니 부아가 치밀 수밖에.

이자권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로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권좌를 지키고 위엄을 보이십시오. 아랫사람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련주께서는 그저 지켜보시고, 사 공자는 아랫사람들에게 처분을 맡기십시오.”

수뇌인사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간청했다.

하지만 이자권은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미친개가 짖는데, 오라 하면 말을 듣겠소?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구태여 미친개를 신성한 흑천궁까지 들일 필요도 없고.”

이자권이 단상에서 성큼성큼 내려오자 수뇌인사들이 더는 말리지 못하고 그 뒤를 따랐다.

뒤숭숭한 상황 속에서도 시종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람은 지금도 건포를 물어뜯고 있는 만통지가 유일했다.

* * *

적비연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처처처척!

시커먼 철갑으로 온몸을 두른 철기대가 흑천궁 안마당을 빙 두른 채 장창을 앞세웠다.

눈만 겨우 보이는 투구. 웬만한 강철로도 뚫기 어려워 보이는 갑옷, 길이가 족히 구 척은 될 듯한 장창.

철기대는 그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과시한다.

철기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벌레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그들의 잔인함과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웬만한 무인도 철기대에 둘러싸이면 제정신으로 서 있기가 힘들 정도라니 말 다 한 게 아닌가?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다.

흑천궁 입구에 방어벽처럼 도열한 혈랑대.

그들이 습격한 곳은 비명이 하늘을 떨쳐 울린다는 말이 떠돈다.

과장이 좀 보태졌겠지만, 혈랑대가 흑천련에서도 알아주는 조직이라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전각 지붕과 담벼락마다 포진해 있는 흑궁단은 또 어떤가?

흑천사왕 중 한 명인 조신우를 필두로 사파제일의 신궁이라 불리는 자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검은 철시를 사용한다.

그 위력이 워낙 강맹하다 보니 흑궁단의 철시에 맞아서 죽었다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보통 흑궁단의 철시에 맞아서 파괴됐다고 표현하니까.

지붕과 담벼락마다 삼백에 달하는 흑궁단이 까마귀 떼처럼 내려앉아서 적비연에게 화살촉을 겨누고 있다.

스치기만 해도 치명적인 맹독을 묻히고서.

그럼에도 적비연은 태연했다.

그 기세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절한 무공을 익힌 자라고 할지라도 이런 상황 속에서는 조금이라도 긴장될 수밖에 없을진대.

이자권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사 귀환해서 다행이구나. 한데 어찌 오자마자 이리 소란이더냐?”

“몰라서 묻는 거요?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대사형이 차지하고 있으니 따지는 것 아니오?”

“네가 있어야 할 자리?”

“그렇소. 내가 만통지를 무사히 데려오면 사부님이 내게 흑천검을 하사하기로 하셨소. 이미 알고 있는 바가 아니오?”

“네가 없는 동안 일이 있었다.”

“무슨 일? 대사형이 사부님을 해하고 권좌를 차지한 일 말이오?”

처처처척!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기대와 혈랑대, 흑궁단이 일제히 적비연을 향해 살기를 쏟아냈다.

이자권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일렀다.

“입을 가벼이 놀리는구나.”

“됐소. 시답잖은 말씨름이나 할 생각은 없소. 내 요구는 간단하오. 월희계와 권왕계 무인들을 모두 석방해 주시오.”

“싫다면?”

“힘으로라도 대응할 수밖에!”

쾅! 쾅!

적비연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마주쳤다.

동시에 흑천투권공까지 일으키니 사방으로 기풍이 불어나가면서 큰 소리가 울렸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바람 한 줄기만 잘못 불어도 철우(鐵雨)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이자권은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찼다.

도대체 저 철부지가 뭘 믿고 저렇게 설치는 건가?

사예린이 투옥된 걸 알고 미쳐 돌아 버린 걸까?

투혈권왕이 돌아오면 사예린을 설득하게 해서 자신을 인정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한데 이건 뭐…….

“미쳤느냐?”

대뜸 입에서 나온 소리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하다.

하지만 투혈권왕이 워낙 물색없이 나오니 제대로 된 말이 나올 리가 없다.

적비연은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내 요구를 들어줄 거요? 말 거요?”

“네 요구를 들어줄 방법은 하나다.”

“뭐요?”

“너와 월희계 모두가 내게 충성을 맹세할 때다. 그 진심이 보인다면 석방은 당연지사.”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소? 련주는 내가 되어야 마땅하니.”

진짜 말이 안 통한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황당함을 금치 못한 이자권이 무의식중에 교패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교패 역시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투혈권왕이 원래 이렇게 말이 안 통하던 자였던가?

이래서야 마치 싸우려고 작정한 자 같지 않은가?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미리 경고하지만 난 아주 강하오. 그러니 후회할 짓은 하지 마시오.”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구나. 네놈이 잠깐 이성을 잃은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정신 차리고…….”

“시답잖은 소리는 관둡시다!”

버럭 일갈을 내지른 적비연이 순식간에 흑천투권공을 일으키더니 허공을 가로지르며 붕 날아왔다.

‘이 미친……?’

순간 혈랑대가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적비연을 향해 달려들었고, 흑천궁 지붕 위에 있던 흑궁단이 일제히 시위를 놓았다.

패패패패패애앵!

“와아아아아!”

파아아아앙!

적비연의 전신에서 호신강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투타타타타타탕!

호신강기에 부딪친 철시가 철판에 콩을 볶는 듯한 소리를 울리며 튕겨 나갔고, 달려들던 혈랑대가 기풍에 떠밀리며 넘어졌다.

지켜보던 이자권의 눈동자가 커졌다.

‘넷째가 언제 이렇게……?’

분명 잠깐 사이에 투혈권왕의 무공은 또 한층 상승해 있었다.

호신강기를 끌어올렸던 적비연은 그대로 몸을 날려 가장 가까이에 다가섰던 혈랑대원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외마디 비명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철퇴 같은 주먹이 그의 두개골을 단숨에 으깬다.

퍼억!

소름이 끼칠 만큼 잔인하다.

흑천투권공은 흑궁단의 철시와 닮은 부분이 있다.

한 번 공력을 일으키면 철저한 파괴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적당히’라는 게 없다.

오히려 그 적당한 수준을 맞추려면 공력이 더 소모된다.

그냥 내력이 흐르는 대로 몸의 움직임을 내맡겨야 한다.

꽝! 퍽! 투앙! 빠악!

일격일살이다.

늑골이 함몰되어 즉사하거나, 두개골이 깨져서 죽거나, 심장이 파열되어 죽는다.

운이 좋아서 빗맞으면 어깨가 탈구되거나 고관절이 부서진다.

하지만 검을 다시 들어 싸울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건 매한가지다.

연리하를 데려간 혈랑대주는 부재중이었다.

때문에 혈랑대 부대주가 철기대주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소리쳤다.

“혈랑대 퇴(退)!”

그의 명이 떨어지자 혈랑대 무인들이 일제히 썰물처럼 빠졌다.

곧이어 철기대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철기대! 공격!”

“충!”

시커먼 갑주를 두른 무인들이 일제히 적비연을 향해 장창을 내밀었다.

“까불지 마라!”

적비연이 버럭 소리치더니 양손을 활짝 펼쳤다.

순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도검이 각각 날아 들어와 양손에 잡혔다.

투따다다다당!

적비연의 몸이 회오리바람처럼 회전하자 장창이 속수무책으로 튕겨 나갔다.

쑤아아아앙!

놀랍게도 적비연의 양손에서 검강과 도강이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저, 저것이 어찌……?”

이자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옆에 선 교패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

오른손에 솟구쳐 오른 검강은 정순한 기운이, 왼손에 솟아오른 검강은 사특한 기운이 팽배했다.

한 사람이 정사의 기운을 동시에 운공할 수 있다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면 모를까?

그런데 실제로 적비연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격이니 그 황당한 추측이 틀린 건 아닌 셈이었다.

어쨌거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흑천련 무인들은 저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적비연이 살기 서린 표정으로 적들을 둘러보았다.

“뭘 이 정도로 놀라고 그래? 앞으로 놀랄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네 이놈! 사문을 배신한 것은 오히려 네놈이 아니더냐?”

“정공을 훔쳐 배웠다고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사부님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강해지라고 배웠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사파라고 해서 정공을 익히지 말란 법은 없다.

사공이든 정공이든 강해질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흑천련 방식이다.

다만 사공에 비해 정공은 성취가 더딘 편이다.

그러다 보니 익힐 기회가 있어도 굳이 익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절세무공일 경우에는 익히거나 파훼할 목적으로 비급서를 훔치기도 한다.

그런 비급서가 흑천련 서고에도 꽤 쌓여 있다.

하지만 적비연이 이 시점에서 정공을 사용한다는 건 오해받기에 딱 좋은 환경이긴 했다.

그리고 이자권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했다.

“닥쳐라! 네놈이야말로 권좌에 눈이 멀어 무림맹과 내통한 게 틀림없구나!”

말을 마친 그가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적비연 앞에 나타났다.

그야말로 감탄을 금치 못할 경신법이었다.

쉬이이잇!

이자권이 망설임 없이 검을 찔러가자 적비연이 몸의 중심을 낮추며 평호추월 초식을 펼쳤다.

쏴아아아악!

잔잔하게 퍼져가는 호수의 수면이 내려찍을 듯 떨어진 혜성과 부딪치며 격랑이 일었다.

따아아앙!

검강이 부딪친 두 사람이 주르륵 밀려났다.

콰콰콰콰!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기다란 발자국이 새겨질 정도였다.

잠깐 거리를 둔 사이 이자권은 숨을 돌렸지만, 적비연에게는 그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죽어랏!”

철기대원들이 다시 살기를 일으키며 날아든 탓이다.

수십 명의 철기대가 일제히 적비연을 덮어버릴 듯 달려들자 지켜보는 이들마저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쿠콰콰콰콰콰!

검기와 검강이 마구 부딪치면서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떨어댔다.

도검을 교차해서 장창을 막아낸 적비연은 마치 무너져 내리는 산을 통째로 떠받치는 기분이었다.

“크읍!”

전신의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적비연이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극마아아아!”

-기다렸다, 주인!

다음 순간 적비연의 몸으로 극마의 혼이 스며들었다.

동시에 적비연의 두 눈이 붉은 광채를 번뜩이자,

“으아아아압!”

콰콰콰콰콰콰앙!

마기가 폭발할 듯 솟구치며 적비연을 뒤덮고 있던 철기대원들을 추풍낙엽처럼 휘날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 과정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이자권과 수뇌인사들이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떴다.

“저, 저, 저건……!”

“마공……?”

적비연의 전신에서 풀풀 일어나는 붉은 기운.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마기였다.

적비연이 목을 우둑 꺾고는 검을 들어 이자권을 가리켰다.

“넌 이제 뒈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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