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19화 (220/301)

219. 무신의 환생

한바탕 혈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어딘지 모를 공허함만이 남았다.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장소 같다.

심원 안마당에 쓰러져 명을 달리한 무인만 해도 수십 명.

담벼락이 무너지고 전각이 부서졌다.

이게 과연 단 한 사람이 저지른 짓인가 싶을 정도다.

흑천련 무인들은 부상자들부터 먼저 챙기고 시신들을 수습해 갔다.

심장이 뽑혀 죽은 투혈권왕은 가장 나중에 처리할 터였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방관만 하던 권왕계의 호신위들은 모두 뇌옥으로 압송됐다.

그들은 적비연의 미친 신위에 그저 넋을 놓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도저히 자신들이 끼어들 만한 상황도 아니었던 탓이다.

한편 이자권은 투혈권왕의 시체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계단 위에 서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괜찮으신지요? 련주님.”

문득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자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오른손에서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만리혈사 연리하였다.

그는 어딘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저리 태연하고 천진한 표정이라니.

엄밀히 따지면 이 모든 일이 발생한 원인이 바로 만리혈사 때문 아니던가?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이자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오 공자 연리하가 분명 사부님을 해쳤으리라!

하지만 그걸 따질 수는 없다.

만리혈사의 손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공범이 될 수밖에.

이렇게 된 이상 흑천련주의 지위를 최대한 이용해서 연리하의 방심을 노려야 한다.

그때까지는 참아야 하리라.

“괜찮다. 너는 어떠냐?”

“저도 괜찮습니다.”

“내상을 입었던 것 같은데.”

“영단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을 했더니 한결 나아졌습니다.”

“다행이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

마침 한쪽에서 무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진회균 부회주 장로가 다가왔다.

“한동안 정비를 하느라 바쁠 듯합니다. 일단 궁으로 들어가서 향후 대책을 논의하시지요.”

이자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무림맹의 화력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언제까지나 내부 사정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침 이자권은 한쪽에 서 있는 만통지에게 시선을 던졌다.

만통지는 손에 든 건포를 마저 입에 털어놓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해 보이는 노인.

세상 돌아가는 일과 무관하게 유유자적 노년기를 보내는 영감 같다.

저런 자가 하늘이 내린 지자라는 게 도통 실감이 안 간다.

더구나 지금은 자신을 데려온 투혈권왕이 죽었음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어딘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이자권이 그에게 다가가 포권했다.

“귀인을 모시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허허. 불청객이 오히려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소.”

“불청객이라니요. 만통지께선 저희 흑천련의 귀빈이십니다.”

“날 데려온 자가 저리 처참하게 죽었는데, 어찌 내가 귀빈이 될 수 있겠소?”

은근히 가시가 담긴 말.

이자권이 잠깐 멈칫거렸지만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집안일이니 너무 신경 쓰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면 부탁하건대, 앞으로도 내게 집안일만큼은 말씀하지 말아주시오. 이거야 원, 살 떨려서…….”

그제야 이자권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만통지를 책사로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흑천련 깊이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이 흑천련의 일에 깊이 개입하기 싫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그 문제를 두고 실랑이할 수는 없는 일.

이자권이 노련한 태도로 받아넘겼다.

“앞으로는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귀빈께서 불편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자, 안으로 드시지요.”

이자권이 몸을 돌리다가 옆에 우두커니 선 교패를 힐끔 보았다.

그는 교패에게도 뭐라 말을 건네려다가 말고는 걸음을 옮겼다.

교패는 이제야 바닥에서 치워지는 투혈권왕의 시체를 물끄러미 보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투혈권왕의 행보에 의심이 든 적이 있었다.

특히 그가 혈조야귀를 궁지에 몰아서 죽게 만들었을 때는 그 의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지금은 또 모르겠다.

오히려 대놓고 정공과 마공을 마구 사용하는 그를 보니 머릿속이 어지럽다.

언제나 논리적으로 추론을 하는 그였다.

하지만 지금 투혈권왕은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 된다.

너무 무모하지 않았던가?

아니, 무모한 것을 떠나서 불가능한 걸 해냈다.

정공과 마공을 동시에 운용하다니?

물론 체내 혈맥을 좌우로 나누어서 각각의 다른 기운을 운공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우검에는 극양의 기운을, 좌검에는 극음의 기운을 사용하는 것이다.

매우 어렵고 까다롭지만 실제로 성공하는 사례도 많다.

하지만 정공과 마공을 동시에 사용하다니?

‘가능하단 말인가?’

교패가 나직이 침음을 흘렸다.

기본적으로 모든 정공에는 항마성(降魔性)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불가의 무공은 심하지만, 도가 계열의 무공도 항마력이 없는 게 아니다.

때문에 한 사람이 신체의 좌우를 나눠서 정마공을 한꺼번에 운용하는 경우는 역사에서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억지로라도 그렇게 운용하면 어떻게 될까?

좌측에서 일어난 마공은 우측에서 일어난 정공을 의식하고 더욱 폭발적인 기세를 끌어올리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측에서 일어난 정공은 좌측에서 일어난 마공을 의식해서 반사적으로 폭발한다.

즉, 정공과 마공이 서로를 이겨먹기 위해 본능적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럼 종국에는 결국 내기가 서로 충돌해 몸에 무리가 가거나 심할 경우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이렇게 진행되지 않는다.

왜냐?

본능 때문이다.

뜨거운 불길에서 손을 거두게 마련이고, 날카로운 칼은 피하게 마련이다.

정공과 마공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순간 인간의 본능은 반사적으로 둘 중 하나의 기운을 흩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투혈권왕은 동시에 일으켰다.

그 폭발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두 가지 기운이 서로를 이겨먹기 위해서 폭발하니, 주변으로 광풍이 휘몰아칠 수밖에.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의지가 두 개가 되어야 한다.

오로지 정공에만 집중하는 의지와 오로지 마공에만 집중하는 의지.

하지만 불가능하다.

사람의 영혼이 둘로 쪼개지지 않는 이상.

하나의 육신에 두 개의 혼이 들어가지 않는 이상!

‘설마……?’

교패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불가능이 현실로 이루어질 리가.

교패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늘 겪은 일은 그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였다.

* * *

몇 시진 전, 은하란은 투혈권왕 모습을 한 적비연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정공과 마공을 동시에 끌어올리면 서로의 기운을 이겨내기 위해 폭발적인 힘을 낼 수가 있죠. 물론 몸에 무리가 많이 생기지만요. 극마와 일체화가 진행될 때만 가능한 힘이에요.”

“어떻게 보면 제 살 깎아 먹으면서 공력을 극대화한단 말이군. 그러다가 내가 정말로 그들을 다 쓸어버리면?”

“그럼 그것대로 나쁘지 않죠. 그대로 흑천련을 접수하고 본 가와 결탁하는 전개로 가는 것으로.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을 거예요.

적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이자권만 상대할 문제가 아니다.

연리하가 끼어들 것이고 이미 이자권 편으로 돌아선 교패와 장로들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아니, 흑천련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죽을 각오로 싸우셔야 해요. 죽겠다는 심산이 아니라.”

“자칫하면 자살 의지로 받아들여 주술이 발동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죠. 어떻게든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집념으로. 그게 가장 중요해요.”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라고 답해주고 싶었다.

죽음을 겪어본 자가 있을까?

죽다 살아난 사람은 있겠지.

무림인으로 살다 보면 늘 삶과 죽음을 한쪽 다리씩 걸쳐야 하니까.

특히 거친 임무를 주로 맡는 자들이라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건 다반사다.

하지만 진짜로 죽어본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은 죽어봤다.

결론부터 말하라면 결코 할 게 못 된다는 거다.

환생할 걸 알아도 다신 겪고 싶지 않다.

적비연이 창가로 걸어갔다가 은하란을 돌아보았다.

“죽어본 적 있소?”

“…….”

“그게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시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럼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운 난이도로 대화해 봅시다.”

“……?”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뼈는 더 단단해진다고 칩시다. 그 팔, 몇 번이나 부러뜨릴 수 있소?”

“…….”

“부러뜨리고, 다시 붙어 단단해지고, 다시 부러뜨리고, 또 더 단단해지게 붙여 회복하고. 이걸 몇 번이나 반복할 수 있겠소?”

“확실히 이해가 쏙쏙 되네요.”

아무리 더 단단해진다고 한들 한 번도 시도하기 싫다.

하물며 죽음이야.

“죽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고독이오. 죽음만큼은 그 누구도 함께해 줄 수가 없소. 주변이 암흑에 잠긴 채 오로지 홀로 남게 되는 거요. 그땐 나 자신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지. 죽음을 겪을 때마다 내가 성장하는 것은…… 어쩌면 타인의 기억을 흡수하는 것보다 그때의 영향이 더 큰지도 모르겠소.”

“반드시 이기시길 바랄게요. 그 힘들고 외로운 죽음을 또 겪지 않으시길.”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이겨 버릴 생각이오. 그 끔찍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도록.”

* * *

“……라고 말했는데 연리하 이 개새끼가 내 심장을 뽑아……!”

적비연이 열불이 뻗친 표정으로 소리 지르다가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다.

미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살수를 쓸 줄이야.

적비연은 가슴에서 세차게 뛰는 심장을 확인하고는 심호흡을 했다.

은하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술이 통해서 다행이에요.”

“흑천투권공을 익힌 투혈권왕에게 가장 상성이 잘 맞는 사람은 역시 흑천련주밖에 더 있겠소? 마침 의식도 잃은 데다 흑천련으로 가기 전에 독을 일부러 주입한 것도 효과가 있었던 것 같고.”

“몸은 좀 어떠세요?”

“아…….”

그제야 적비연이 호흡을 가다듬고는 눈을 감고 전신의 공력을 운기해 보았다.

독공에 당해서 위독했던 태청강은 이제 완전히 치유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여느 때처럼 몸을 관통한 상처도 빠르게 아물고 있었다.

특히 빙백독광사의 내단을 복용해서 만독불침지체가 된 적비연에게는 태청강을 힘들게 했던 그 독이 오히려 보약이나 다름없었다.

구오오오오.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증유의 기운이 적비연의 전신을 감싸고돌았다.

푸른 빛깔과 검은빛, 그리고 붉은빛이 어지럽게 어우러지면서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적비연 주변의 공기가 훈훈해지면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은하란과 예홍이 그 모습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보았다.

확실히 적비연은 이전과는 또 달라져 있었다.

당연하리라.

무신 태청강의 기운을 흡수했으니 그럴 수밖에!

마침내 적비연이 두 눈을 떴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푸른빛에서 검은빛으로, 그리고 핏빛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검은 동자가 자리를 잡은 적비연이 씨익 웃었다.

“마침내 초절정 끝자락에 이르렀군.”

“……!”

은하란과 예홍의 표정이 한껏 상기됐다.

예홍이 은하란을 돌아보자, 은하란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어가는군요. 본신을 되찾을.”

적비연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았소.”

“새로운 사실이라면……?”

태청강의 기억을 흡수하면서 지금껏 풀리지 않았던 의문 중 하나가 조금은 해소됐다.

물론 완벽하게 풀린 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현무각에 사로잡혀 있던 광인은 흑천련이 만든 게 아니었소.”

“그럼요?”

“오히려 흑천련은 광인들을 치유하려는 중이었소.”

그러자 예홍이 깜짝 놀라 소리쳐 물었다.

“그럼 설마 무림맹이 만든 광인들이란 말씀입니까?”

“글쎄. 태청강도 거기까진 모르는 것 같군. 다만 그렇게 추측은 하고 있어.”

“말도 안 돼. 하면 그동안 흑천련에 납치당했다는 강호명숙들은…….”

“태청강의 추측에 의하면 그들 역시 무림맹이 손을 쓴 것 같다.”

“그런…… 도대체 무림맹이 노리는 게 뭐죠?”

“글쎄. 거기까진 모르겠군.”

적비연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도 자신을 따르던 호신위와 사예린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일단 흑천련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위험합니다!”

예홍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하지만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누군지 잊었나? 난 지금 흑천련주야.”

“아…….”

“그리고 예홍 너도 함께 간다.”

“저도요?”

예홍이 상기된 표정으로 반문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를 본 연리하 그 개놈의 쌍판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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